덫 

“이런 말하면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고생 끝났다 싶었는데 공장이 불나는 바람에 정신이 있어야지요. 못 먹는 술 좀 마시고 차를 몰았는데, 집 앞에서 사고가 났지 뭡니까. 조심한다고 했지만 그 영감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사고를 쳤으면 자수를 하는 게 순립니다만···, 회사 상황이 그렇질 못해요.

이번에 무너지면 재기할 길이 없거든요. 부모님 등골 빼내 사업 자금으로 날리고 여기저기 친구들한테 빌린 돈도 수억입니다. 어려운 중에 정력주 계발해 한시름 놨다 싶었는데···. 선생님, 죽은 놈 살리는 셈 치고 한 번만 봐주십시오. 이번 고비 넘기면 다친 분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 천 배 사죄드리고 선생님의 은공도 잊지 않겠습니다.”

“글쎄요, 이건 내가 봐줄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요. 비오는 날 사고 쳤다면 상대는 중상 아니겠어요? 저한테 이러시지 말고 자수 하세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사기꾼들이 은근슬쩍 공갈치는 상투적인 말로 여긴 탓인지 문치수는 아예 붙잡고 늘어졌다. 봉투 하나가 일우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우선 이백 만들었습니다. 수금되는 대로 드리겠으니 오늘밤 집으로 오십시오. 술 한잔 하면서 의논하십시다.”

일우는 손바닥을 세워 목을 치는 흉내를 냈다.

“이렇게 하려는 것 아니오?”

“아이고 무슨 말씀을!”

“좋시다, 저녁 아홉 시까지 가겠소.”

문치수는 다방 문밖까지 따라나와 굽실거리다 들어갔다. 예순이 다된 다방 여주인은 빚 독촉 때문에 저러려니 생각하며 큰 잔에 냉수를 가득 채워 갖다 주었다.

“속탈 때는 냉수가 최고유!”

묵묵히 담배를 뽑아든 문치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거 된통 걸렸는데. 저 새끼 하는 짓을 보니 풋내기가 아니야.  완전히 닳고 닳았잖아. 이걸 어쩌지….’

문치수가 생머리를 앓고 있을 때, 다방에서 나온 일우는 곧장 을지로에서 기다리는 탁원제에게 전화를 때렸다.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어디 계십니까. 부장님 만나려면 꼭지가 돈다니까요. 거기 어딥니까?”

“잠실!”

“지금 을지로로 오실랍니까.”

“을지로 어디?”

“어디긴 어딥니까, 종 다방이죠.”

탁원제는 만나자 마자 열을 올렸다.

“나는 이제껏 역사 밖에서 놀았나 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 일본 놈 있잖습니까. 가만, 이름이 뭐라드라. 글쎄, 그 자식이 온다는데요. 아니지 그 자식의 제자라는 호소가와 가야꾸(細川谷區)란 놈이 사업차 온다잖습니까.”

탁원제는 여기저길 뒤적거리다 손바닥만한 메모지를 찾아냈다. 씌어있는 이름자를 내려다보며 검지 끝으로 콕콕 찍으며 같잖다는 듯 갉아댔다.

“그래, 이 자식.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 이 작자가 조선 천지 돌아다니며 금수강산에 쇠말뚝 박았답니다. 이른바 혈맥을 끊은 거죠. 기막힌 것은요. 이왕가(李王家)의 참봉을 지낸 전기응(全基應)이란 자가 앞장섰다니 이 또한 웃기는 짜장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만나자 한 거야?”

“그것이 뭡니까. 아주 큰일이지!”

“자유당 말기 때 기사 가지고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해.”

“예에?”

“쇠말뚝은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야. 이 친구 뭐에 홀렸길래 정신 빼놓고 다녀! 요즘 껀수 큰 거 낚았다는 게 이거야? 허어, 이 친구 큰일났구먼. 누굴 쇠말뚝으로 박으려고 그래! 것보다, 취잴 하고 싶으면 이런 거나 파고들어가! 자네 바둑 둘 줄 알아?”

“바둑이오?”

“몇 달 전 전북 익산을 다녀온 일간지 후배 기자가 귀띔했는데 지난 4월 괴이한 일이 있었다는 거야. 행정단위로는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내산동이지. 거기에 이완용의 묘가 있는데.”

“매국노 말입니까?”

“그래. 그 자에 대해 새삼 이렇다 저렇다 말하긴 그렇고, 어쨌든 그 자가 죽자 은밀하게 낭산면 내산동으로 주검을 운구했는데. 그때가 1926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53년 전이지.”

“….”

“그자는 북청 사람 전기응에게 거금을 주며 부탁했어. 남들이 어찌 생각하든 자신은 모닥숨이 붙어 있는 지금까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다고! 이 나라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했노라 개뼈다귀 갉는 소릴 했다는 거야. 그 자는 부와 명예를 한손에 쥐었으니 천하제일의 명당에 묻히고 싶었겠지.”

탁원제가 추임새를 놓았다.

“쥑일 놈.”

“전기응이 이왕직(李王稷)이란 어용단체에 몸담았기에 이완용으로선 부탁하기가 쉬웠겠지. 그 자는 조선의 실세인 이완용을 위해 팔도를 들쑤셔 두 군데 명당을 찾아낸 것으로 알려졌어. 그중 한곳이 조금 전에 말한 낭산면 내산동이지. 자신이 묻힐 장소에 대해 얘길 나눌 때에는 아마 바둑을 두고 있었을 거야. 대국 상대는 자네 말처럼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이었구.”

“그 매국노가 들어갈 곳은 어떤 땅입니까?”

“풍수사들은 선인무수형(仙人舞袖形)이라 불러. 신선이 내려와 춤추는 형국이라나. 풍수를 몰라도 산세를 보면 이해가 가더구먼. 이완용의 묘는 미륵산과 맞절하고 있는 모습인데 봉분 뒤로 우거진 수림이 아늑하다는 거야.”

“가묘도 여러 곳이라면서요?”

“자기가 죽은 후 무덤이 훼손하는 걸 막으려는 의도였겠지. 풍수사에 따라선 도굴범을 막기 위한 방편이라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애.”

“그럼?”

“먹고 살기 어려웠던 때니 도굴하려는 무리도 있었겠지. 나도 지리학과 출신이니 그쪽엔 관심이 많아. 이완용의 묘혈이 어떤지 궁금했거든. 급한 일이 없었다면 아마 그곳에 다녀왔을 거야. 근데 말이야. 이완용의 무덤이 53년 간이나 알려지지 않은 건 우연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이유요?”

“천하 명당으로 소문난 매국노의 무덤으로 가는 길을 누군가 판축법으로 진식(陣式)을 만들어 놨다는 거야. 그러기에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았다는 거지.

소문엔 이완용이 무라야마 지쥰과 바둑을 둘 때 일본에서 온 음양사(陰陽師)가 같이 있었는데 그 자가 묘역의 진입로에 이상한 모양을 만들어 흙을 쌓았다는 거야. 그렇게 하면 오십 년은 괜찮을 거라 했다는데 빈말처럼 흘러다닌 얘기는 먼 훗날 자신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영원히 평안을 누릴 것이라 하였대.”

“그게 정말입니까?”

“우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 바둑계의 거목으로 알려진 조관수(趙寬秀) 선생이 이곳에 가셨다가 하나의 도형을 발견했어. 선생이 볼 때 주위의 모습이 어쩌면 묘수풀이와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했거든. 흐릿하게 숨겨진 부분들을 찾아내 하나의 형태를 만들었지만, 이 일은 매스컴에서 씹지도 않고 삼켜버렸어.”

“왜요?”

“글쎄, 애국인사들이 들고 일어나거나 골치 아픈 위인들이 모여들까 봐 차단시켰겠지. 시미즈 게이꼬가 한국에 온다는 연락을 받고 내가 그 도형을 찾아봤거든. 바로 이런 모양이야. 조관수 선생은 낮과 밤을 해와 달이 번갈아가며 비춘다고 써 놓았더구만.”

일우는 다방 한 켠에 있는 바둑판을 가져와 조관수 선생이 찾아낸 도형을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