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셋. 나이는 그렇다 쳐도 언제나 활달하고 시원시원한 것이 그보다 훨씬 아래인 열아홉이나 스물쯤의 사고방식을 가진 것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그녀는 팬스트만을 남긴 채 미니스커트도 벗어버렸다. 역삼각을 이룬 은밀한 부위가 팬스트 아래 눌려 있었다. 그녀는 후다닥 팬스트를 벗었다.

“저부터 씻을 게요.”

그녀는 다람쥐처럼 달려가 욕조에 물을 받았다. 문치수는 얼른 옷을 벗었다. 온몸이 경직되며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이제부터 벌어질 전투에 대한 자신감이 뿌듯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함께 몸을 씻고 침대로 돌아왔을 때 장은미는 짓궂은 장난을 쳤다. 수염을 어루만지거나 겨드랑이에 손가락을 넣어 비벼댔다. 그러다가는 아무렇지 않게 문치수의 몸 위에 올라가 그네 타듯 흔들었다.

“동거한다는데 괜찮겠어?

“내게 속박할 권린 없어요. 그이가 취직하면 내가 이럴 필요 없잖아요. 쓸데없는 일에 참견두 않구요. 지금은 자유인이죠.”

문치수는 팽팽한 여체를 눕히고 내려다보았다. 언제 보아도 신비롭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녀의 은밀한 곳을 살피면서 동거중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아냈다. 그것은 상반신에 비해 하반신이 발달되어 균형에 차이가 있었다. 처녀만이 가지고 있는 상큼한 향기, 이른바 처녀취(處女臭)가 그녀에겐 없었다.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음욕이 점점 유체화 되어 짙은 음향(淫香)으로 나타났다.

“좋은 향기야.”

문치수는 미혈(媚穴)을 혀끝으로 콕콕 충동시켰다. 벌이 쏘인 듯 부풀어 오른 부위들을 선으로 이어가면서 그녀의 몸에 체중을 실었다. 참으로 억제할 수 없는 순간에 이르러 문치수의 욕망은 여인의 은밀한 부위를 빠듯히 밀고 들어갔다. 사내의 등 언저리에 놓였던 손이 허리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좌우로 약간 몸을 흔들다가 두 다리를 쭉 폈다. 벌써 정상에 이른 것 같았다. 문치수 역시 서둘러 정상을 향해 달려갔다.

이날 밤 문치수는 큰 소득을 얻었다. 평소 장은미가 느껴왔던 점을 군살 없이 얘기하면서였다.

“사장님, 저는요 우리 회사의 장래성을 생각해 보거든요. 주식회사 미로라는 간판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직원들을 볼 때마다 이 회사가 너무 보장을 안 해 준다는 점에 화가 나요.”

문치수는 뿜어내는 담배 연기로 도우넛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푸념은 계속됐다.

“제가 구로다 그룹의 한국지사에 입사하고 나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면 판매 수익을 남길 수 있을까?

결론은 ‘노’였어요. ‘성기구’ 판매는 한국인들의 정서에 맞지 않아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을 자처해 온 우리 민족이 미개인들이나 사용하던 그런 기구들을 쓴다는 게 말이 되요. 아무래도 그런 것들은 은밀한 지하 거래를 통해서만 판매가 가능하죠. 이를테면 통신 판매 같은 거요.”

이제까지 흘려듣던 문치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번 달만 해도 그래요. 사장님은 본사에서 지불 독촉이 없으니까 안심하고 버티지만, 당장에라도 청구해 오면 문을 닫아야 하잖아요. 밀린 대금을 무슨 수로 갚겠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자체 계발을 하는 거예요.”

“뭘?”

“신상품이오.”

“신상품?”

그녀는 핸드백에서 타이프 용지 다섯 장을 꺼내놓았다. 어쩌면 자신의 사업에 전환점을 갖게 될지 모르는 대단한 기획상품이었다.

“어차피 ‘성기구’ 판매만으론 회사를 유지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돌파구를 찾아야죠. 사장님, 제 기획안 보세요. 이건 구로다 그룹이 판매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만 전연 달라요.

뭐냐믄요, 역대 중국 황실에서 음용한 정력주예요. 하룻밤에 일곱 사내를 상대했다는 측천무후가 개발한 ｢무후주｣를 비롯해 정력강정에 특효라는 술들만 서른 가지가 넘어요. 우리도 중국이나 일본식이 아닌 우리 식의 정력강정주를 만들어 판매하는 거예요.”

‘성기구’에 곁들여 ‘정력주’를 판다는 것, 한 마디로 궁합이 맞는 상품이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일단 사무실에 있는 어음 여유분과 잠실에 있는 아파트를 근저당하면 당장에 필요한 건 어떻게 만들어 볼 수 있었다. 앞으로 6개월만 구로다 본사에 지불 유예를 신청하면 모든 게 순조로울 것 같았다.

장은미와의 은밀한 정사는 일주일 간격으로 이루어졌다. 그럴 때마다 문치수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비슷한 금액으로 옷가지를 사주었다.

그럭저럭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장은미에게 구로다 지사로 복귀하라는 발령이 떨어졌다.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수없이 흘리며 아쉬운 석별의 밤을 지낸 다음날. 점심시간이 약간 지났을 무렵, 얼굴이 해말쑥한 청년이 문치수를 찾아왔다.

“전 장은미와 동거하고 있는 박도식(朴道植)입니다.”

문치수는 소파를 가리키며 자릴 권했다.

“무슨 일입니까?”

“은미에게 모든 걸 들었습니다.”

“모든 걸 들어요?”

“브라쟈와 팬틸 사 주어 어쩔 수 없이 동침했다더군요.”

“뭐요?”

“그렇게 화낼 일은 아니죠. 은미는 피해자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당한 건 내 쪽이니. 아무리 모양새가 사나워도 피해를 본 건 내 쪽이요.”

“그래도 사장님께선 거절했어야죠. 저와 동거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데리고 놀았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이해할 수 없잖아요. 만약 이런 사실을 구로다 그룹에 알린다면 사장님은 손해가 막심할 겁니다.”

말은 차분했지만 그 속엔 상대에게 치명타를 가할 매서운 독기가 숨어 있었다.

“목적이 뭐요, 돈이오?”

“아닙니다.”

“그럼?”

“은미에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전 대학 3학년입니다. 그럴 듯한 직장을 구하면 결혼하기로 했습니다만, 어떻게 하다 보니 세월만 보내고 말았어요. 노는 데 정신이 팔렸으니 입사 시험을 치뤄도 붙을 리 만무구요. 조그만 회사에 교수님 추천으로 자릴 하나 만들었는데 재정보증이 문제예요. 전 시골 출신이라 서울엔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보증은 부모자식간에도 안 섭니다!”

“싫으시면 할 수 없죠.”

“가만있지 않겠다는 말이구만.”

“은미가 고발할 겁니다. 옷가지 몇 십만 원에 휘말려 본사의 새상품 기획안을 빼낼 수밖에 없었다는 고소장이 날아가겠죠.”

별수 없이 재정보증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이로부터 한 달 후였다. 단자회사에 재정보증을 해준 박도식이 사고를 치고 잠적해 버린 것이다. 사고 금액은 어림잡아 4억은 넉넉했다.

그로인해 문을 닫을 것 같은 회사는 뜻밖에 폭발적인 ‘정력주’ 판매로 숨통을 텄다. 수요가 급증된 상태이므로 박도식의 채무는 서너 달이면 변제가 충분하다는 계산서도 뽑았다. 안도의 숨을 쉬던 이 무렵, 하남에 있는 공장에 화재가 발생해 문치수의 정신을 흔들어 놓았다. 현장에 도착하자 공장장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횡설수설했다.

“전기 누전으로 보긴 힘들고요. 아무래도 고의적인 방화 같아요. 틀림없이 공장 내부에 근무하는 작자들의 소행이에요.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지만 원재료가 몽땅 불구뎅이에 들어갔으니 그게 문제죠.”

아무리 생각해도 재기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사무실에 비치해둔 술을 퍼마시고 만취한 상태에서 차를 몰았다. 비가 워낙 사납게 쏟아져 음주 단속도 없었다. 문치수는 자신의 아파트 진입로에서 쉰이 넘은 사내를 들이받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한동안 주위를 살폈으나 오가는 사람이 없어 뺑소니 칠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아파트 진입로에 현수막이 걸린 건 다음날이었다. 사고 시간에 따른 목격자를 찾는다는 내용을 볼 때마다 발이 땅에 붙은 듯 꼼짝달싹 못했다. 어쩔 때는 호흡 곤란을 느끼고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왕진을 나온 의사는 과로가 겹쳐 심신불안정 상태가 진행 중이라 했다. 최대한 안정을 취하라는 권유에 부득불 사흘이나 집안에 처박혔다.

“사장님요, 회사엔 특별한 일이 없습니다. 하남 공장은 다섯 달이면 정상 가동할 수 있다니 힘내십시오. 직원들이 허리띠 꽉 졸라맸으니 잘 될 겁니다.”

영업부 박대리가 짜낸 듯한 목소리로 위로 전화를 주었지만 마음자리가 불편한 것은 여전했다. 큰 문제가 벌어질 것 같았지만 모든 게 조용했다. 화재 소식을 들었는지 본사나 급전을 쓴 단자 쪽에서도 독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자 법원에서 서류가 날아들었다. 박도식의 보증인으로서 이의가 있을 때엔 재판 기일에 참석해 변론하라는 날짜 고지였다.

오전에 구로다 한국지사에 들어갔다 온 박대리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미로에 대한 그곳 공기가 심상찮다는 것이다. 그는 영업부 사원과 술자리를 벌이면서 이번 달이 고비라는 말을 몇 번이나 내비쳤다.

문치수는 돈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장안동 집에 들러 아버지에게 매달렸으나 소득이 없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정력주’를 구입하겠다는 주문은 갈수록 늘어났다. 지방에 내려 보냈던 것을 회수해 어렵사리 물량을 맞추며 그때그때를 넘길 무렵, 문치수는 한 통의 서신을 받고 넋이 달아나 버렸다. ｢스캔들｣ 잡지의 취재부장 박일우의 편지였다.

<얼마 전, 문선생이 사시는 아파트 입구에서 뺑소니 사고가 났었습니다. 비가 너무 쏟아지는 밤이라 운전자는 보는 사람이 없다고 믿었을지 모르지만 그건 아주 잘못된 판단입니다. 사고 당시의 사진과 나의 명함을 동봉했으니 저를 만나야할 필요성을 느끼신다면 전활 주십시오.>

예기치 않은 사고는 이렇게 벗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