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부장, 그 사람 노는 게 참 귀여워.”

유상희는 늘어지게 하품을 뽑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앞으로 취재부장 박일우와 어떻게 즐길 것인지를 생각해볼 참이었다. 어차피 사장을 속인 그의 약점은 쥐고 있다. 또 자신의 몸을 내던졌으니 박일우의 입장에서는 함부로 운신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민사장과 박부장, 두 사내를 바쁘게 만들 게임을 생각하니 신바람이 절로 났다.

그러나 그날 이후, 박일우와의 또 다른 만남은 없었다. 모처럼 자리를 만들려 해도 이상하게 엇갈렸다. 어떻게 보면 민사장이 일본에 간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사무실에서 부장님 얼굴 뵙기 힘들잖아요. 무슨 얘기를 하려 해도 다른 사람 눈치 보이구요.”

“마찬가지야.”

유상희는 분위기를 띄우려 애를 썼다. 그것을 짐짓 모른 체 일우가 딴전을 피우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유상희는 몰랐지만 그 날은 봉급날이 이틀이나 지난 토요일 오후였다. 비가 몹시 내린 그 날, 영화사에서 보내온 시사회(試寫會) 프로 초대권을 깜빡 사무실에 놓고 나간 일우는 저녁 아홉 시가 되어서야 잠시 사무실에 들렀었다.

야근과 특근을 밥 먹듯 하는 바람에 보조 열쇠는 주머니에 있었다.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가자 사장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신경이 곤두섰다. 얼핏 안을 들여다보았다. 탁자엔 먹다 남은 생일케이크와 선물상자가 놓여있고, 그 옆 소파에 사장과 유상희가 뒹굴었다.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관계가 아닌 것은 두 사람의 몸짓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틀 전에 있었던 둘 사이의 은밀한 일들을 사장에게 까발리진 않았겠지만 왠지 마음이 착잡했다. 특별히 내색 하지 않은 상태로 지내다가 대한오피스텔을 개인 사무실로 이용하게 되면서 그녀의 출입이 시작되었다.

“부장님, 할 말 있어요.”

“으응, 뭐?”

“저와 부장님이 왜 멀어졌는지 알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시치미 떼지 말아요. 저와 사장님 관계 아시잖아요.”

“글쎄…, 굳이 그런 걸 내가 알아야할 명분이 있을까. 둘 사이가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면 굳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 이유가 없지 않겠어.”

“하여튼 죄송해요.”

“그런 말 들을 이유 없어.”

“저기요 부장님, 사무실로 이상한 편지가 하나 왔었거든요. 특별히 수신인이 없어 제가 뜯어보았는데, 지난 달 공모한 ｢추적 61초｣의 응모작품 같았어요. 내용은 자동차 사고였는데 그 목격담이 너무 생생하더라고요. 천체망원경에 붙은 자동카메라로 촬영해 보냈는데 현장감이 끝내줘요.

닷새 전 사건 현장에 가봤더니 목격자 찾는 현수막이 걸려 있더라고요. 편지를 보낸 쪽은 중학교 2,3학년 같았어요. 현상공모 기간이 지났으므로 제보자에겐 자료비 명목으로 10만원을 보냈거든요. 그 자룐 내일 아침 출근 때 부장님 서랍에 넣어둘게요.”

‘10만원이라….’

짠순이 유상희가 10만원을 투자해 자료를 제 것으로 만들었다면 군침도는 기사가 분명했다. 여우 같은 게 일우의 마음을 어찌 읽었는지 한 수 앞서가는 수순을 밟고 있었다.

“부장님, 술 한 잔 사 주세요.”

“밖에 나가긴 늦었어. 점쟁이들 만날지도 모르고.”

“어때서요?”

“번거로워져.”

“그럼 여기서 마시죠 뭐.”

그녀는 냉장고에서 두 병의 맥주와 소주 한 병을 가져왔다. 맥주를 글라스에 4분의 3을 따르고 나머지를 소주로 채웠다. 이른바 폭탄주였다. 그녀는 두 잔을 만들어 눈높이까지 잔을 들어올렸다.

“드세요 부장님, 부장님의 앞날을 위해!  아니 아니, 세계 평화를 위해 건배!”

유상희는 쨍소리가 나도록 잔을 부딪치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그녀는 다시 술을 섞어 두 잔의 폭탄주를 만들었다. 문득 그녀가 말했다.

“부장님, 공중전화 부스에 가면은요. 동전은 없고 지폐만 있을 때가 있거든요. 아무리 주머니를 뒤지고 있을만한 곳을 찾아도 동전이 없을 땐 정말 황당하잖아요. 근데 말예요, 만약 땅바닥에 동전이 떨어져 있다면 어쩌시겠어요? 일단 줍고 봐야죠. 그쵸?”

“미스 유, 난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 부스에 갈 일 없어. 우연히 길 가다가 땅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본 거지. 전화를 걸 일이 없는데 굳이 동전이 필요할까? 그렇잖아, 주을 이유가 없어. 그 동전은 내 것이 아니니까.”

유상희는 까르르 웃고 나서 그라스의 술을 비웠다.

“그치만 오늘은 주워보세요. 통화할 내용이 너무 절박하고 중요하니까.”

그녀는 투피스의 윗저고리를 벗어 소파에 던졌다. 서둘러 스커트와 란제리를 팽개치고 우뚝 섰다. 걸친 것이라곤 달랑 흰색 브레지어와 팬티 뿐이었다.

“오늘은 동전을 줍는 거예요. 만약 부장님께서 날 멀리 하시면 자폭할 거예요. 부장님과 내가 어쩌구저쩌구 했다구 만천하에 방송하고 다닐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