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음식이 들어와 얘기는 잠깐 끊어졌다가 이내 잇대어졌다.

“책을 보지 않았으니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책의 제목이 주는 뉘앙스가 묘해. 바둑이라고 할 땐 ‘위기(圍棋)’야. 그런데 ‘위기(僞棋)’거든. 오자가 난 게 아니라면 ‘바둑이 아니다’ 또는 ‘가짜 바둑’이나 ‘사기 바둑’에 해당되지.

더구나 뒤쪽의 ‘칠보도’는 일곱 마리 너새를 그린 도면이란 뜻이야. 그러니까 전체적인 뜻은 ‘일곱 마리 너새를 그린 사기 바둑 교과서’ 쯤으로 봐야겠지. 그런 책이 우리 조선 땅 어딘가에 있다는 거야.”

“저도 자료를 뒤적이다 [위기칠보도]란 책에 대해 들은 기억 있어요. 그러나 이후 어떤 문헌이나 자료에 나타난 적은 없거든요. 

아시고 계시겠지만 잡지사 경리 외에 사장님이 별도로 아르바이트를 시키신 일이 있어요. 물론 바둑에 관한 일종의 예화같은 일이죠. 나는 요즘 사장님과 부장님이 왜 점쟁이들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모르겠거든요.

작년엔 민사장님이 무속화(巫俗畵)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는데 어느 순간 시들해지더라구요. 그리고는 지금처럼 점쟁이들과 우리나라 바둑의 발전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모르겠어요.”

“좋아, 좋아. 그런 거야 아무려면 어때. 그러니끼 미스 유는 [위기칠보도]에 대해선 명칭만 들었다 그 말이지.”

“네에.” 

“거기까지 알고 있는 것만으로 됐어. 자, 나가자구. 어차피 오후 일은 쫑났으니까 괜찮지?”

“괜찮고 말고가 어딨어요. 이런 걸 사장님이 알면 단번에 모가지죠. 그렇게 되면 부장님이 절 먹여 살리세요.”

“아이구 영광이지 뭐. 평생 왕비마마로 받들어 뫼셔 줄까.”

일우는 명동 유네스코회관 앞에서 차를 세웠다. 두 번째 골목을 돌아나가자 새롭게 단장한 호프집은 인기가수들이 라이브 하거나 동료 코미디언들이 예정 없이 나타나 술손님들을 즐겁게 해주는 장소였다.

가끔 신문에서나 볼 수 있는 인기 연예인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대하자 유상희는 가벼운 흥분에 빠져들었다. 생맥주와 과일 안주를 시키고 나서 무대 쪽으로 시선을 뿌렸다.

“라이브 무대는 오후와 저녁 시간으로 나뉘지만, 여긴 별도의 시간 지정이 없어. 더구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구.”

“특별한 날이라니요?”

“러시아에서 발레 공부하고 돌아온 내 친구가 소품을 준비했다는 말 들었어. 그 자식 사장 동생이거든.”

“어머, 그래요?”

“남이 보거나 말거나 자신의 일에 충실한 녀석이야. 그 친구 러시아로 떠날 때 나는 군대 갔어. 이번에 보면 3년 반인가, 4년째인가. 자식 많이 변했을 거야.”

“몇 시부터 하는데요?”

“평소대로라면 3시지, 그때 못하면 6시구.”

유상희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은 오후 2시에서 10분이 부족했다.

“발레는 보기에 위태로워요. 금방 넘어질까 봐 조바심도 나구. 근데 부장님, 오늘 무슨 발레를 해요. 나비부인이나 호두까기인형 같은 거예요?”

“아니 ｢무도회의 초대｣야. 미스 유도 주인공에 대해선 많이 들었을걸. 니진스키와 카르사비나, 찰떡궁합인 두 사람이 주연한 단막극 발레지.”

유상희는 애써 기억을 추스른 모양이었으나 전연 생소한 모양이었다. 일우가 덧붙였다.

“이 발레의 이름은 ‘장미(薔薇)의 정(精)’이야. 고티에의 시에 베버가 곡을 붙이고 포킨의 안무로 막이 올랐어. 1911년 디아길레프라는 러시아 발레단이 초연했는데 대성황이었대. 그래선지 장미의 정보다 ‘무도회의 초대’로 더 알려지게 된 건데, 그건 베버의 음악이 뛰어났기 때문이지. 이 발레는 현실과 꿈의 중간지역에서 춤추기 때문에 기법 면에선 환상적이야.”

“여성지 보니까 ‘장미의 기사(騎士)’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써놓았던데요.”

“아, 그래! 우린 모처럼 필이 통했어! 나도 그 얘길 하려고 미스 유 불렀어. ‘장미의 정’은 전 3막으로 된 슈트라우스의 오페라야. 대본은 호프만슈탈이란 분이 썼지. 그러니까 이런 스토리야.

18세기 중엽 독일의 빈은 귀족들의 무도회가 빈번히 열렸지. 무도회가 열리면 결혼을 앞둔 처녀들은 장미 한 송이를 마음에 든 남자에게 바쳤어. 이른바 구애의 표시야. ‘장미의 기사’로 선택된 남자는 처녀가 마음에 들면 은으로 장미 문양을 만들어 보내는데 이게 사실상 약혼의 표시였어.”

“그래서 사람들이 은장미를 하는가 봐요?”

유상희가 엉뚱하게 묻는 바람에 일우는 못들은 척 본론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는 깔끔하게 포장된 보석 상자를 건네주었다.

“생일 축하해.”

엉거주춤 보석 상자를 받으며 유상희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생일?’

그러고 보니 오늘이 주민등록상의 생일인 3월 9일이다. 그러나 3월 9일은 서류상 착오로 그렇게 됐을 뿐 진짜는 3월 12일이었다. 그렇다고 내색할 수 없었다. 너무너무 감사하다는 호들갑을 떨며 포장지를 풀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은으로 만든 장미 문양의 브로치였다.

어차피 내친걸음이란 생각에서일까. 아니면 자신을 인간적으로 감동시켜 준 배려였을까. 생맥주를 2천시시나 더 마시고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술이 깨니 호텔이었다. 시간은 다음날 오전 11시가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