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돌 책상이 있고 그곳에 서찰이 있었다. 그것은 인연 있는 자에게 보내는 글이었다.

<내가 오죽헌이라 부르는 석실을 만든 것은 몇 가지 뜻이 있다. 자세한 것은 다섯으로 나뉜 각 실에 놓여있는 봉서(封書)를 보면 알 것이다만, 인연 있는 자는 눈앞에 펼쳐진 구궁진변(九宮陣變)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이는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구궁법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을 뿐, 삼서(三書 ; 육임·기문·태을)를 익힌 자라면 쉽게 통과할 관문이다.>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미구에 닥칠 액업으로 인해 부득이 이곳 오죽헌을 폐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인연 있는 자는 한 가지 의문을 품을 것이다. 어떻게 하여 사람의 모습과 물건의 형태가 진법 안에 갇혀 보이지 않는지를! 누구든 처음 대할 때는 신기해 보이지만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되면 삼서의 오묘함에 오히려 놀랄 일이다.>

잠깐 호흡을 가다듬었다가 다시 읽어 내렸다.

<세간에는 이 집이 엎드린 호랑이형(伏虎形)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집을 진(震 ; 동쪽) 방향에서 보면 두 개의 동문과 네 귀가 별채를 배합해 용(用) 자를 만든다. 오래 전엔 삼정승을 낳으라는 삼상산실(三相産室)과 장수하라는 불사간(不死間) 그리고 도둑을 예방하는 퇴도문(退盜門)을 두었다.

나의 사숙께선 능히 태을신수를 깨우쳐 집의 동서 양쪽에 문을 만들었지만 남쪽만은 작은 문을 달아두었다. 그 문이 인연 있는 자가 들어온 철문이다. 이 문으로 도둑이 들어오면 눈앞이 캄캄해 허둥대기 마련이다. 결국 나가는 문을 찾지 못해 잡히므로 이 문 안에 발을 넣으면 눈이 먼다는 소문에 퇴도문이라 한 것이다.>

내용으로 보면 이 글을 남긴 인물은 윤사달이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앞서 기록한대로 집안 구조를 이루었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퇴도문의 용도가 바뀌었다. 어쩌면 윤사달이란 사람이 용도를 바꿔놓았는지도 몰랐다.

돌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은 점법서(占法書)와 기서(棋書), 그리고 풍수지리서(風水地理書)였다. 쓰윽 훑어보니 [지인명감(知人明鑑)]과 [물형관상(物形觀相)], [신상전편(神相全篇)]을 비롯하여 [마의상법(麻衣相法)] · [신상수경집(神相水鏡集)] 등 서책이 있고, [금오경], [청오경]을 비롯한 풍수지리서에 한중일 세 나라의 바둑 서적이 꽂혀 있었다.

그 가운데 유난히 시선을 끈 것은 저자 이름이 적히지 않은 [귀기(鬼棋)], [선기(仙棋)], [백기(魄棋)]라는 책이었다. 가까이 놓인 서찰의 말미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인연 있는 자에게 전하려는 것은 반드시 서책만이 아니다. 첫째는 인명을 구하는 활인술(活人術)이요, 둘째는 심술(心術;독심술), 셋째는 제도술(濟度術)이다. 모름지기 뜻을 이루려면 내가 창안한 여러 가지 수법을 익혀야 할 것이며 또한 비밀의 문을 통과해야 와룡패(臥龍牌)를 얻을 수 있다. 이제부터 석실 출입문은 폐쇄됨을 명심하라.>

무엇을 먹고 지내는가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분명 오죽 선생이 어딘가에 배려했을 거라는 안도감이 있었다. 다만 관문을 통과하는 기간이 어느 정도며 왜 석실 안에 이런 기관을 설치했는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사흘이 지났다. 무심하게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실마리는 보이질 않았다. 뱃가죽이 허리에 붙기라도 한 것일까? 바늘로 찌른 듯한 고통이 몰아치며 한기가 몰려들었다. 얼음덩이 위에 몇날 며칠 놓인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차가움이 밀려들었다.

어둠뿐이었다. 손전등은 이미 빛을 잃고 스위치를 올릴 때마다 핏발선 눈처럼 벌건 색깔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사물을 본다는 건 어림없었다. 여전히 바닥에 누운 채 눈을 감았다. 문득 사흘 전에 있었던 초하와의 정담(情談)이 뇌리를 스쳤다. 한차례 숨가쁜 정사를 마쳤을 때 그녀는 속삭였었다.

“내가 박선생님 이름자를 수리 오행(삼재성명학)으로 풀었을 때 어땠는지 아세요? 이름자가 한결같이 쇠(金)로 떨어지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다고요. 아버님이 집 떠나실 때 말씀하셨어요. 머잖아 집안으로 불가사리가 찾아온다고요. 그땐 말뜻을 헤아리지 못했죠. 삼재성명학을 보기 전까지는요.”

일우는 그때 잠깐 생각했었다. 세운상가의 청계천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좌판을 펼친 노인의 모습이 떠올라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굳이 그 얘기를 지금 해야 될 특별한 이유가 없다보니 일단 접어두었다. 초하가 속삭였다.

“비록 작수(酌水)만으로 예를 치렀지만 이제부턴 제 서방님이에요. 당신과 잠자릴 같이하고 아침 밥상을 함께 받아야겠지만 타고난 분복이 적은 탓에 그러지 못함을 용서하세요.”

초하는 역술인이라기보다 그녀의 아호대로 신내림을 받은 ‘보살’이었다. 이곳에 진역관(眞易館)이라는 바둑 도장의 명호가 걸리기 전까지 그녀는 선녀보살이었다. 그렇기에 남편을 둘 수 없었다. 남편(또는 기둥서방)을 둠으로써 신통력이 빠져나가거나 잦은 병고로 고통 받는다. 그 점을 모를 리 없었다.

“이봐요 서방님, 난 대장장이예요. 사람들이 붙들고 있는 인생이란 쇠붙이를 여러 형태로 변화시키는 기술자예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이상했다. 자신의 이름자가 삼재성명학으로 모두 쇠(金)고 하룻밤 인연을 만든 여인이 대장장이라면 어찌되는가? 결국은 이 여인에 의해 인생이 변화된다는 뜻이다. 초하로 인해 자신에게 낀 악살(惡煞)이 사라진다는 것인가? 그녀의 나긋한 속삭임이 꽃향기처럼 날아들었다.

“서방님, 인생은 절대자가 만든 달력 같은 거예요. 우리들은 죽음을 맞이할 순간까지 자신의 생명을 한 장씩 찢어내는 반복 연습을 하거든요. 그게 인생이니까.”

후후 실소가 새어나왔다. 이미 출입문은 폐쇄한 상태인데 오죽 선생이 준비한 관문을 깨뜨릴 방도는 전연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허기는 사라지고 찬 기운에 휘감긴 전신은 마비되어가는 상태였다.

킥킥킥킥! 

괴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온통 어둠뿐인 석실 어디에서 그런 소리가 들릴까? 슬며시 눈을 떠 눈매를 가늘게 만들었다. 그 순간 깜짝 놀랐다. 어둠이 내린 석실 안이 환한 빛살에 싸여 있었다. 빛살은 석실 중앙 천정에서 새어나와 어둠을 발가벗겼다.

킥킥킥킥!

다시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인가 저쪽인가 두리번거리던 눈길이 돌 침상 위에 멈추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예닐곱 여덟쯤의 처녀가 엇비슷이 앉아 웃고 있었다.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빤히 바라보던 처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장난스러웠다.

“킥킥킥킥, 이봐요 총각. 왜 이곳에 있어? 소문 들은 거야? 그렇지, 도박 배우러 왔지? 내가 도박을 가르쳐 주면 어쩔건대? 내 말 듣겠어? 도박으로 한밑천 잡게 해줄까?”

무표정하게 고개만 까딱거렸다. 반쯤 혼백이 나간 듯 몽롱한 상태였다. 처녀가 까르르 웃자 풍만한 가슴이 육감적으로 흔들렸다.

처녀는 짐승 가죽으로 은밀한 부위만을 가린 채 화투패를 돌렸다. 어떻게 그런 물건이 석실 안에 있는가는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화투장은 처녀의 손가락 위에서 춤을 추었다. 손가락을 까딱하면 손 등에 붙고, 또 한 번 까딱하면 어느새 일우의 주머니에 들어와 있었다. 마치 요술을 부린 듯 처녀의 주문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