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애걸복걸했는지가 궁금해 사내들이 육도선생을 바라보자 그의 뒷말이 묘한 흥분을 일으켜 주었다. 그가 말문을 열었다.

화옥미(花玉美)라는 처녀가 있었는데 그의 부친은 예전에 제왕을 비롯하여 중신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왕실의 화가였다. 세필(細筆)이든 무심필(無心筆)이든 어떤 것을 쥐었던 간에 펼쳐진 화폭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금방이라도 웃어댈 것 같은 생기 있는 초상(肖像)이었다.

“과연 신필일세 그려!”

사람들이 극찬을 아끼다 못해 눈앞에서 재롱을 떨듯 칭찬을 쏟아내면 이 화가는 무심한 어조로, ‘내 실력은 담벼락에 그린 용이 벽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질 못했습니다’ 하는 것이어서 그 말이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별 이상한 인간 다 봤네. 그림 한 점 얻으려고 그런 말 한 것은 아니지만, 잘 한다 잘 한다 했더니 이젠 아예 능청을 떨며 개폼을 잡는다 말이야. 하긴 뭐, 우리가 그 사람 집에 가는 게 그림 때문인가. 그 집 딸년을 보기 위해서지.”

화가의 딸은 어느 한 곳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자색이 빼어났다. 그렇다 보니 사대부가의 행세깨나 하는 한량들이 그 집을 찾아와 화가의 딸을 곁눈질 하는 게 예사였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늘 무심한 표정이었다.

경위원의 가네마루(金丸) 경무사의 먼 친척뻘 된다는 마흔쯤의 사내가 일본에서 건너 온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는 관직에 있는 몸이었지만 특별한 취미가 있었는데 어떤 것이든 최고를 찾았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 귀한 것, 남들이 구경하기도 어려운 물건들을 구하기에 혈안이 되었는데 누군가 귀띔한 것이다.

“제가 희한한 물건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말씀을 들어보시고 값어치가 있다 보시면 쌀가마나 좀 들여 주십시오. 그리하시겠습니까?”

“말해보게.”

“예전에 궁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가 있었습니다. 워낙 실력이 출중하여 신라의 유명한 화가 솔거(率居)가 환생했다고 소문이 돌만큼 대단했지요.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만 어느 댁 벽화를 그릴 때엔 참새 새끼가 날아들었고, 어느 댁은 숲을 그리자 뱀(蛇)들이 몰려들어 집주인이 기절초풍했다지 않습니까.”

“어허, 이 사람아 하고 싶은 얘기가 뭔가?”

“그림을 잘 그리는 이 사람의 취미는 오로지 바둑뿐입니다. 예전처럼 바쁘지 않지만 요즘도 심심찮게 사람들이 찾아와 그림을 부탁하고 갑니다만 사례금이 만만찮아 소인도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들리는 소문엔 딸아이와 바둑을 둔다는 데 실력이 여간 아니랍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에 가인(佳人)과 미인들이 많이 있지만 정작 나라를 잃는 데도 사랑하고 싶은 여인을 경국지색이라지 않습니까. 그런 절세가인이 화옥미라는 처녑니다. 그러나 나으리, 천하에 둘도 없는 계집도 하룻밤 품으면 그 값어치는 반감되고 맙니다. 나으리도 내기바둑 두는 걸 좋아하시니 그 화가와 내기 바둑을 두십시오. 지금은 초겨울이니 그런 일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인 듯 싶습니다.”

“허어, 이 사람 보게. 초겨울에 내기바둑을 둔다?”

“그렇습니다. 나으리께선 내기바둑에 걸만한 물건이 있으십니까? 귀한 것일수록 좋습니다만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이번 내기바둑은 무조건 나으리가 이기니까요. 소인이 나으리께 얘길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밖으로 새어나갈까 싶은 노파심에 소인의 마음자리에 자물쇠를 채워 숨겨두겠습니다. 일단 내기바둑이 벌어지면 그때 가서 다음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꿍꿍이가 준비되자 거간꾼은 곧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게 달려가 그의 관심을 잡아끌었다.

“오늘은 참으로 희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일본에서 어떤 관리가 며칠 전 도착했는데 제게 이상한 말을 하지 뭡니까. 글쎄, 자신은 천하에 들도 없는 물건들이 많이 있는데 이번에 구한 것은 ‘기보(棋譜)’라는 오래된 책이랍니다. 이기면 그 양반이 내기물품(현상품)으로 준다고 했으니 나으리도 한 번 도전을 해보시지요.”

“물건은 욕심 나네만 내기에 걸만한 물건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럴만한 물건이 없네.”

“그런 일은 조금도 걱정 마십시오. 나으리께서 지신다 해도 그림 하나를 내어주시면 됩니다. 그러니 마음에 부담이 전혀 없지요. 나으리가 내기바둑에 이긴다면 ‘위기도소’라는 귀중품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올 겁니다.”

“위기도소? 그게 뭔가?”

“일본의 유명한 장인(匠人)이 만든 것으로 일종의 도자기로 만든 바둑 두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도자기로 빚은 것이지만굉장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나으리께서 승리하면 그것까지 얻을 수 있다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