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바둑판에 숨은 여우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다. 삼현금(三絃琴)과 피리 소리가 아우러져 한층 흥겹고 정겨운 분위기를 나타냈지만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고 애잔한 느낌이 안개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 곡조는 처음 듣는 게 아니었다. 황학루(黃鶴樓)란 기방에서 새어나오던 곡조였다. 청아한 여인의 목소리가 안개 사이로 번져 흘렀다.

형산의 백옥은 갈지 않아도 빛이 나고

비록 노방(路傍)에 파묻혀도 빛깔을 유지하는 것

평양이라 색향, 절세의 가인이 널려있는 곳

평양의 명기 진주(珍珠), 그대 이름도 이곳에 있네

평양의 명기 진주. 왜 그녀가 노사용(盧史勇)의 꿈길을 찾아온 것일까. 얼핏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저만큼 어둠이 내린 숲길에 두 여인이 악기를 울리고 있었다.

그녀들이 노래한 진주라는 기생, 그녀는 평양의 명기로서 대단한 이름을 날렸었다.
[명가필보]에 의하면 아호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칭하는 이규보(李圭報)가 평양에 들려 그녀의 자태와 빼어난 재능을 보고 칭송했다는 내용이 전한다.

고려 의종 때 태어난 그는 아홉 살 때 이미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열네 살 때엔 시를 지어 기재(奇才)라 부른 위인이었다. 과거에 급제해 입신양명하는 걸 하찮게 여기고 스스로 백운거사를 자처하고 시를 지으며 [장자] 사상에 심취했었다.

그런 그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진주’라는 기생을 보고 이따금 편지를 보내 그녀와의 인연을 소중히 더듬어 나갔다. 이규보는 그녀가 보낸 청기(請棋)에 대한 화답의 글을 보냈었다.

온 세상이 아는 그 님 시도 잘 짓는다(國色詩名世盡知)

만날 길은 없어도 생각만 흐르는구나(無由會面浪相思)

고운님 말 한 마디 기쁘고도 한스러워(一言堪喜還堪恨)

우선 글 한 수 지어 바둑 대신 보냅니다(該把文章當奕棋)

비록 몸을 섞진 않았지만 상대를 아끼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어 진주는 한시도 이규보를 잊은 날이 없었다. 어느 때인가  좋은 날이 오면 그를 낭군으로 받아들여 알콩달콩 한 세상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날이 가고 해가 거듭될수록 두 사람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리움의 색깔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세 해가 지나서인가.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성천(成川) 땅에 사는 노씨 성을 쓰는 마흔 넘은 진사가 그녀를 찾아왔다. 일찍이 상처하고 재혼을 할까 생각도 했지만 유난히 처복이 없어 이제껏 홀로 지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평양이라 대동강 가까이 풍류랑(風流娘) 진주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것이다.

며칠 후 그녀를 만난 노진사는 놀잇배(畵舫)를 대동강에 띄운 채 풍류를 즐겼다.

“그대에 대한 소문이 높은 건 무엇 때문이오?”

“그 연유를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진주는 여리게 웃으며 구름이 흐르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과연 그 모습은 천상의 선녀가 하강이라도 한 듯 노진사의 마음을 울컥 잡았다 놓았다.

“그대의 시문이 놀랍다고 하던데 문장은 어느 정도인가?”

“계집의 문장에 얼마나 놀라움이 있겠습니까. 다만···.”

“다만?”

“시문 읊조리는 걸 조금 알 뿐이지요.”

“한 수 해보시겠는가.”

언제 준비해 두었는지 붓과 벼루를 가져온 진주는 하얀 속치마를 벗어 배 위에 올려놓고 노진사를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됐지 않느냐 싶은 눈빛이었다.

“제목은 평양의 명기 진주로 하세.”

“운(韻)은 뭘로 할까요.”

“능(能)자가 좋겠네. 능할 능자로 하되 여덟 자를 넣어 지어보게나.”

노진사의 말이 떨어지자 하얀 비단엔 순식간에 능 팔자의 성시가 이루어졌다.

조각배 위의 진주 무엇에 능한 바더냐(貝上珍珠有何能)

노래와 춤 시문에 모두 능하네(能歌能舞詩亦能)

능한 가운데 또 한 가지 능함이 있으니(能能之中又一能)

달 없는 삼경 지아비 희롱함이 능함일세(無月三更弄夫能)

성천을 떠나 올 때는 하루나 길어야 이틀 머무를 예정이었지만, 진주를 만날 때마다 그녀가 보여주는 기예(技藝)에 노진사는 크게 놀랄 따름이었다. 가끔 백운거사 이규보 선생을 사모한다는 마음을 내보이며 노진사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게 안타까웠다.
자꾸만 찾아오는 노진사를 향해 진주는 뭔가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오늘 진사님께서 소첩이 낸 문제를 풀게 되면 진사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녀는 윗목에 놓인 바둑판을 가져와 반상에 주르르 문제도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