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수 천주서(千柱瑞)는 상대방을 흘낏거리며 여유를 보였다. 그는 실패도를 제시했다.

“내가 항상 이 모양으로 방문객들을 골탕 먹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달엔 이것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소이다. 초면인 듯싶은데 본관이 잘못된 수를 일러 드리겠소이다.”

장율하의 기력에 새삼 놀라워하며 대행수 천주서는 건넌방으로 안내하며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대행수께선 종운가에 자리한 ‘오로관'의 임문혁이란 젊은이를 아실 겁니다. 최근에 어떤 연유로 만나게 됐는지 말씀해 주셔야겠습니다.”

“흐음, 그 일 때문이로구만. 누군가 찾아오리라 생각은 했었네만 이제야 나타났구만. 내가 그 젊은이를 만난 것은 아따미(熱海)란 음식점이었네. 생김생김이 곱상하고 예의가 바른 탓에 내가 음식 대접을 하며 물었네. 그렇다 보니 한 달 후에 큰 내기바둑이 있다는 말을 하여 나는 크게 흥미를 느꼈소.
전라도 용담이라는 곳에서 종이가 올라왔는데 이곳 한양에선 거의 품절되다시피 한 농선지(籠扇紙)였네. 종이를 만든 이는 시야가 흐릿하게 보인다는 최상옥(崔尙沃)이란 장인(匠人)으로 농선지를 만드는 솜씨는 팔도에서 따를 자 없다는 자네.”

대행수 천주서는 젊은 하녀가 가져온 작설차 한 모금으로 입안을 적시고 나서 뒷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최노인의 솜씨도 높이 사지만, 노인과 함께 온 정아(晶娥)라는 처녀에게 관심이 많았소. 최노인의 막내딸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어느 사이 우리 아들놈이 그 처자를 짝사랑하게 됐지 뭔가.

해서, 한양에 올 때마다 사람을 넣어 혼사를 진행시키려 했는데 처녀는 전연 관심을 보이지 않아요. 이번에 최노인이 종이를 가지고 올라와 좋은 기회라 여기고 내가 그 처자에게 직접 청혼을 했어요.

그랬는데 처녀 말이 서로가 번갈아 묘수풀이 문제를 내어 그것을 풀지 못한 쪽이 뜻을 꺾자는 것이었어요. 나 역시 바둑 두는 것을 좋아하였기에 처녀의 뜻을 받아들였는데 즉석에서 백선으로 결과를 묻는 이런 문제를 내지 뭐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