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은 잡일을 하고 있었지만 눈썰미가 있었던지 고개를 외로 틀며 입술을 빼물었다.

“이건 두 번째 기보예요. 내가 대행수 님의 명으로 세 번째 기보까지 가져갔는데요.”

녀석은 그 날의 일을 애써 끄집어내며 두 눈을 희번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수표교 다리 아래 발견된 사체(死體)의 임자와 왕래하였고 보니 연신 입술에 침을 바르며 무슨 말인가를 할 듯 말 듯 망설이는 빛이 역력했다.

장율하가 대행수의 거처로 안내하라는 말에 사사는 지체 없이 앞장서 길을 열었다. 널찍한 정원을 지나 동으로 향하는 곳에 2층 건물이 섰는데, 아래층엔 이곳에서 일을 하는 사내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사사는 일행들을 2층의 구석진 방으로 안내했다.

나이는 얼추 쉰쯤 됐을까. 한삼 저고리를 걸친 사내가 일본에서 가져온 다탁(茶卓) 위에 바둑판을 펼친 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대행수 천주서(千柱瑞)였다. 얼핏 고개를 들어 혼잣말처럼 말했다.

“손님께선 잠시 기다리시게. 왜놈들이 태합기(太閤碁)를 두었다는 게 사실이란 생각이 든단 말이야. 그놈들에겐 [오처경(吾妻境)]이란 역사책이 있는데, 내 잘못은 아내(처)를 보면 알 수 있다는 흥미로운 말을 한 것은 왜놈다운 이론이지.”

사내는 상대의 반응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얘기에 열중했다. 탁일환 순검과 건너편에 앉은 장율하를 보며 천주서는 하던 얘기를 끌어나갔다.

“천황의 실세가 관동장군 원뢰조(源賴朝) 때에 이르러 정권이 관백(關白)에게 옮겨져 천황은 그야말로 재산만을 살피는 허수아비가 됐지 뭔가. 그러던 것이 원숭이처럼 생긴 수길(水吉)이란 위인이 신장(信長)의 뒤를 잇자 천황의 토지를 야금야금 먹더니 어느 때인가는 그것들을 모두 제 부하들에게 나눠 줬었네. 그러다보니 장군이란 자들은 날이 갈수록 배가 부를밖에 더 있겠는가. 그렇다 해도 그가 섭정 벼슬에 오를 수는 없었네.”

당시 일본은 오로지 네 성씨가 섭정벼슬을 이어받았다. 등(藤)씨 · 귤(橘)씨 · 원(源)씨 · 평(平)씨가 그들이다. 비천한 놈은 비천한 놈의 뒤를 이어왔고 귀족은 귀족의 뒤를 이어왔기 때문에 아무리 세도를 부리는 자라 해도 네 성씨만은 건드릴 수 없었다.

“수길이 놈은 관백이 되자 천황을 찾아가 자신이 네 성씨를 접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네. 그러나 천황의 측근들이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네.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수길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다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네. 곧장 네 성씨의 장자(長子)에게 통문(通文)을 보냈지.

네 성씨가 존귀하니 관백의 뜻대로 할 수 없지만 자신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내기를 하자는 게야. 네 성씨가 내세우는 바둑 잘 두는 사람과 자신(관백)이 내세운 사람이 바둑을 두어 이기는 쪽의 의견을 따르게 하자는 것이었네.”

네 성씨는 부랴부랴 바둑깨나 두는 사람을 찾아내 대령시켰고, 수길은 적광사 절에 머무는 일행(日海)라는 중을 불러들였다. 대국은 초반에 결판 나 버렸다. 상대는 일해의 적수가 아니었다.

이후 수길은 자신의 성을 공공연히 평(平)이라 하다 무슨 심사에선지 풍(豊)으로 고쳤다. 성 따먹기 내기바둑에 출전한 일해는 약관의 나이에 직전신장(織田信長)에게 바둑의 묘법을 얘기한 전력이 있어, 풍신수길은 최고수임을 증명하는 문서와 함께 금리자지(金梨子地)에 국상문양(菊相文樣)을 넣은 기통(棋筒)을 하사하였다.

“그런데 말이야. 수길이 놈이 한번은 일해(日海)와 대국을 하게 되었는데 증여리라는 광대의 귀띔을 받고 흉내바둑을 두어 이겼다는 말이 있어. 난 그게 믿음이 덜 간단 말이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여름날 팥죽 끓듯 변하는 수길이의 비위를 맞추려고 일해(日海)가 모르는 척 두어나갔을 것으로 추측해 보면, 그런 걸 알면서 흔연스럽게 따라 둔 수길이 놈 또한 고수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보네.”

대행수 천주서는 호들갑스럽게 웃어대더니 앞에 놓인 바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상대가 누구인가는 아랑곳없이 혼자말로 구시렁댔다.

“내게 볼 일 있어 왔다면 흑으로 수를 내보게. 그리하면 자네들과의 면담을 허락하겠네.”

눈앞에 펼쳐진 도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발표 2008년 23일 투정여화 101회 연재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