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꽃 이름은 지워져도

둥근 원통엔 큼지막한 물고기가 그려져 있었다. 불가의 물건이라면 울긋불긋 색상으로 덧입힌 탱화(撑畵)란 생각이었지만, 겉치장뿐인 껍질이라도 그림은 어둡고 분위기까지 무거웠다. 더구나 물고기가 그려진 그림의 전후 상하엔 불가에서 쓰는 네 가지 단어, 행시(行屍) · 주육(走肉) · 의가(衣架) · 반통(飯筒)이라 세필(細筆)로 끼적여 있었다.

불가에서는 사람을 가리켜 걸어다니는 시체며, 달음질치는 고깃덩이요, 옷을 건 횃대며, 밥 담는 통이라 조롱했다. 아무리 권세 있고 힘자랑을 해도 부질없이 약해 보이는 모습이니 잘났거니 못났거니 떠드는 게 하냥 덧없다는 내용이었다. 더구나 둥근 통에서 나온 서찰은 너무 답답하고 쓸쓸한 내용을 담고 있어 감사 유천기(劉川起)는 다시 한 번 눈에 힘을 주며 시선을 집중했다.

<···사또, 내가 세상을 떠난 지 여러 해가 됐는 데도 저승의 문 안에 들지 못하고 유괴(幽怪)처럼 이승 문턱을 넘나든 것은 티끌 같은 세상 먼지, 혈육을 떨어뜨리고 왔기 때문이오. 아비된 자의 마음은 자식의 뒷배를 돌봐 줄 이가 있으면 훌훌 털고 길을 떠나 머나 먼 저승길의 명부전에 들어갈 수 있으련만, 어찌하여 돌아봐선 안 될 길을 자꾸 돌아보는지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사또, 내 아들은 이제 열 살이 넘었으니 부디 이놈의 한을 풀어주십시오. 어린 내 아들이 모진 세상을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사또께서 부디 이끌어 주십시오. 이렇듯 깊은 한을 이승에 마음을 놓아두지 못한 채 엎드려 절 올리며 사또께 청원하는 바입니다.>

열 살 어림으로 뵈는 사내아이를 앞세운 쉰 살 남짓의 비구니가 전주 감영에 찾아든 것은 한여름의 햇살이 머리 위에 넘실거리는 7월 중순이었다. 벌써 서너 달 남짓 비가 내리지 않은 탓에 논밭의 곡식들은 물기가 도망가 시들시들 힘이 없었고 길거리는 뜨거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감실거렸다.

이날 따라 먹고 사는 데 진력이 난 사내의 주검이 물 빠진 저수지에 둥둥 떠올라 이레 전의 아침처럼 식전의 허기를 송두리째 쓸어가 버렸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희망 있는 소식이 전해지기보다, 달갑지 않은 흉년이 내리 삼 년을 버티는 바람에 곳곳에서 목숨을 끊는 슬픈 소식이 유감사의 마음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첫째 날 - 죽은 자가 고변하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아무리 굶는다 해도 하루 한 끼는 먹어야 그나마 지탱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일주일에 한 끼를 먹는 즐거움도 없으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어나가야 빗줄기가 내릴 셈인가.’

한숨 섞인 푸념을 해보지만 부질없었다. 이날도 물에 빠져 죽은 사체 하나를 아침에 건져 올려 유천기는 초검의 시장(屍帳 ; 검시기록)을 작성하며 형방을 가까이 불렀다.

“이보게, 형방. 한양에 파발을 띄운 지 언제인데 경위원에서 순검을 보내지 않는가. 벌써 이레나 지났는데 소식이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유천기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은 것은 익사사건이 일어난 데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더욱 고달파진 게 그 이유였다 하루 전엔, 죽은 자가 고변을 해오는 일까지 해괴하게 벌어졌지 않은가.

사건은 하루가 멀다 않고 일어나고 미제사건은 몇 개나 쌓였는지 알 수 없었다. 대부분 생활고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은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나 피골이 상접한 모양새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루 전에 일어난 사고는 부모 공양을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내 고기랍시고 구워드린 일이었다. 너무 허기진 탓에 숯불에 자글거리는 고깃덩이를 맛있게 먹고 나서 자식의 아랫도리가 피로 물들여진 것을 눈치 챈 부친은 대성통곡했다. 마을 사람들이 급히 의원에게 데려갔으나 워낙 피를 흘린 데다 베어진 부위가 크고 넓어 목숨을 잃은 애통한 사건이었다.
형방은 정문을 세워 효자로 추숭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콧날이 시큰거리는지 목이 메어 말을 더듬었다.

“이러···다간···, 마을···사람···들이 모두 죽겠습니다. 그것···참···.”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음인지 먼 하늘 바라보며 그저 눈물 한소끔 찔끔거렸다. 그러나 저러나 사체검안소 한쪽에 방치한 이레 전 저수지에서 건져 올린 허달호(許達浩)의 주검은 시일이 지날수록 악취가 진동했다. 술 한 잔 퍼 마시면 주사가 좋지 않은 데다, 한양 본댁의 이씨들 득세에 제놈도 같은 성받이인 줄 알고 함부로 거들먹거리던 시러베 잡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