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든 부모 입장에서야 그것이 자식의 어리광이나 농담이라 여겼었다. 식을 올리지 않았지만 며느리 대접을 받는 하나꼬의 물젖은 목소리를 듣고서야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맛본 것이다.
“아버님, 이 이가 세상을 떠났어요. 하루 전 병원에 갔더니 이제껏 소식이 없던 아이가 들어찼다지 뭐예요. 이버님께서 큰 재산은 남기지 못하지만, 그래도 자식을 남겼으니 마지막 효도라도 하는 셈인가 봐요. 아버님, 아무리 화가 나시더라도 이 이가 말한 대로 일을 처리해 주면 더 이상 다른 원은 없을 거예요.”
자식이란 게 물건이라면 겉으로 보기엔 쓸모 있는 것 같지만, 아무 짝에도 소용되지 않은 짐이나 다름없었다. 젊은이들은 우스갯말로 나이든 부모님을 골동품이라 한다. 그러나 나이든 부모님들은 자식을 그런 말로 나타내진 않았다. 그것은 배움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조선의 부모들은 한결같이 그런 마음이었다.
조만호 역시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겨우 참아내며 자식의 주검을 묻고 근처에 여막을 짓고 웅크리고 있었다.
둘째 날 - 사마귀 암컷은 수컷을 물어 뜯는다
경위원에 한 통의 서찰이 당도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는 조창구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천황(일본 천황)의 생신을 맞이해 준비해 두었던 보석이 사라졌음을 알렸다.
<제가 조선 순검들에게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은 아무래도 이번 일이 은밀한 계획에 의해 치러진 것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나는 고향이 일본 태생으로 유학을 온 조창구를 만났습니다. 그와 어울리며 지냈습니다만, 도박판을 기웃거리며 먹잇감을 노리는 하루하루의 삶은 잘못된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던 조창구가 어느 날 조선으로 돌아가 한 상 그득하게 차려 먹을 수 있다는 말에 그를 따라 왔습니다만,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전, 조창구의 애인 하나꼬(花子)가 마침내 좋은 때가 닥쳤다고 했는데 처음엔 그 뜻을 몰랐다가 지금에야 깨닫게 됐습니다. 자세한 것은 ‘명례동 전당포’에 들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경위원의 탁일환 순검이 명례동(명동) 전당포를 찾아갔을 때, 그곳 주인 마사오(正男) 씨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곳 전당포는 앞쪽에 있는 보석상의 반대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장사의 대부분은 보석상이라고 봐야겠지요. 이곳을 찾는 손님은 한양에 사는 저명인사가 대부분으로 대게 주문제작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일을 하다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되면, 작은 통로를 열어 이곳 전당포로 이동합니다. 물론 사방 문엔 출입을 통제시키는 여러 기관이 설치돼 있습니다. 누군가 문을 열려고 하면 요란스럽게 벨이 울리므로 도둑을 맞는다는 건 생각해 볼 수 없지요.
며칠 전, 이곳 전당포에서 하나후다(花札;화투)를 즐기는 패거리들이 놀다간 적이 있어요. 그들이 놀다간 후 금고 문을 열었더니 귀한 보석 하나가 사라졌지 뭡니까. 저희 가게가 사람들에게 주는 공신력이라든가 여러 문제 때문에 신고를 미루고 있었습니다만, 그 물건을 찾지 못하면 저의 전 재산을 팔아 변제를 해줘야 될 것 같으니 제 사업은 망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아낼 것 같은 쉰 쯤 돼 보이는 주인의 하소연을 들으며 현장을 돌아본 뒤 종업원들 신상에 대해 물었다. 특별히 눈에 띈 이는 없었고, 보석상에서 물건을 파는 상담역의 하나꼬(花子)라는 여자에 신경이 쓰였다. 그녀가 게임을 즐기던 조창구와 동거한다는 소문이고 보니 우선적으로 신경이 쓰였다. 문제는 전당포 주인 마사오(正男) 씨가 푸념처럼 던진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사실···, 이곳에서 도박판이 벌어지던 그 날···, 한 사람이 죽어나갔습니다. 바로 하나꼬의 남편 조창구씹니다. 하나후다를 돌리던 중 배를 쥐고 나동그라지더니 이내 숨이 끊어졌지 뭡니까. 갑작스러운 일이라 손을 쓸 여유도 없는 데다 사람이 죽어 비밀리에 묻었습니다.”
당연히 관에 알려 의사의 소견서를 받아야 했지만 그럴 경황이 없었노라 마사오는 탄식했다.
“우리 가게는 대개 비싼 물건엔 독어(毒魚;복어)의 알이나 극약을 묻혀놓습니다. 그렇게 해야 사악한 기운이 틈타는 걸 막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없어진 ‘태양의 눈’이라는 보석에도 그런 독극물이 묻혀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하나꼬가 보석을 훔쳐내 도박을 하는 남편에게 먹게 하였는가를 생각했거든요. 그러다 고개를 저었어요.”
“왭니까?”
“이곳에서 일을 하는 하나꼬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보석이 탐이 난다고 남편의 목숨을 빼앗으면서까지 그걸 삼키게 하겠습니까. 그 다음으로 의심할만한 인물이 한사람 있긴 합니다만···.”
“누굽니까?”
“일본에서 같이 온 조창구의 친굽니다. 그 사람 부친은 지술(地術;풍수지리술)을 배우러 일본에 들어가 화투방을 전전하다 목숨을 잃었지요. 이번에 조선으로 나올 때 동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론 조창구 씨의 일정을 훤히 알고 있는 개인비서라고 생각하는 게 옳겠지요.”
“그 세 사람이 일본에서 함께 온 일행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그날 이곳에 오지 않았어요. 상전처럼 모시던 친구가 목숨을 잃었으니 자나 깨나 그곳에 붙어 있겠지요.”
“조창구 씨가 죽은 지금도 마찬가집니까?”
“그럼요, 조창구 씨만 모르는 사실이 이 바닥에 돌고 있었거든요. 하나꼬와 그 자가 은밀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걸 본 사람이 있으니까요. 아, 서양 영화에 그런 게 있다지 않습니까. 화장실에서 년놈들이 개처럼 엉겨 붙어 씩씩대는 장면 말입니다. 그걸 본 사람이 한둘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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