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두 가지 기쁨(牙婆)

‘육파(六婆)’의 첫 번째는 ‘아파(牙婆)’다. <철경록>의 저자는 이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여러 직업을 꼽았으나, 작자가 주장하는 첫 번째 인물은 잡다한 물건을 함 속에 가지고 다니는 ‘방물장수’를 의미했다.
흥미로운 건 ‘아파’의 ‘아(牙)’는 두 개의 모양이 맞물린 형태지만 송곳니처럼 불쑥 튀어나온 돌출된 어금니를 뜻하기도 한다.

첫째 날 - 초승달(新月)이라는 여인

서대문구 현저동과 홍제동, 봉원동 일대에 걸쳐있는 고개를 무악재라 부른다. 이 고개를 길마재라 하는 것은 산의 모양이 길마(짐을 싣기 위해 소 등에 안장처럼 얹는 도구)와 같이 생겼기 때문인데 한자로는 안산(鞍山)이다.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가이자 예언가인 남사고(南師古)는 이 산을 풀어 예언했다.

<···서울의 동쪽에 낙산(駱山)이 있고 서쪽에 안산이 있으니 이것은 말과 말안장이 같이 있지 않고 서로 대치되어 있는 형국이다. 이로 인해 조정의 신하(임금이 타는 말로 비유)가 당파를 지어 동 · 서로 나뉘는데 동쪽 낙산의 낙(駱) 자는 곧 각마(各馬)가 되므로 동인은 갈라지게 되고 서쪽 안산의 안(鞍) 자는 혁안(革安)이 되므로 서인은 혁명을 일으킨 후 안전하게 된다>

과연 그의 글자 풀이대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으며, 서인은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후 정권을 잡고 안정했다. 동인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로써 그의 집이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이며, 서인은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로 집이 정릉방(경서)이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었다.

어쨌거나 이곳 무악재는 조선 성종 때 명나라 사신이 고개를 넘어온 뒤, ‘하늘이 천길의 한 관문을 지어서 한 군사가 일천의 군사를 당할만하다’고 칭송한 천연의 요새였다.

무악재를 넘어 도성으로 향하는 곳에 창연한 고옥(古屋) 한 채가 있었는데, 이 지방 사람의 말로는 그 옛날 점을 잘 치던 홍계관과 인연 있는 자의 집이라고도 했고, 또 어떤 이는 그에게서 점법을 배운 뒤 집안을 일으킨 어느 복술가(卜術家;점쟁이)의 처소라 했다. 그러나 안팎으로 출입하는 사람 모습을 볼 수 없던 탓에 소문만 무성하게 가지를 치며 세월의 강물 따라 흘러오고 있었다.

햇기운이 많이 남아있는 초가을에 접어든 어느 날, 서생 차림의 젊은 선비 하나가 말을 달려오더니 화색이 밝은 낯으로 품속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 펼쳐들었다. 쓰여 있는 글자는 ‘득자(得子)’였다. ‘자식을 얻었다’는 뜻이다. 잘 해야 스물 두서넛으로 보이는 이 선비가 명과학(命課學)에 임시직원으로 일하게 된 이수병(李秀秉)이었다.

그가 다른 과를 멀리하고 유난히 관상감의 명과학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조상이 남긴 유훈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 이천서(李釧黍)는 한때 을사오적으로 이름을 날린 이완용의 명운을 보아준 대가로 이곳 무악재 인근에 지었던 이완용의 별저를 얻게 된 것이 지금까지 살게 된 사연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이완용의 쇄락과 함께 목숨을 잃었고 덩그마니 큰 집에 외아들 이수병이 노모와 지내왔다. 한 해 전, 노모가 세상을 떠나자 이집을 빈번히 출입하던 방물장수 아낙이 어디에서 혼처를 가져왔다.

“도련님, 내가 방물장수를 하며 한양을 이 잡듯 뒤졌지만 그만한 분은 없습니다. 도련님이 약관이시니 잘 모르겄지만, 그 분은 고전무용을 비롯하여 신식 무용까지 뛰어나게 잘 춘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오죽했으면 그 분들의 부모가 딸 아이 이름은 ‘두 발로 선 꽃’이라 했겠어요.”

“두 발로 선 꽃이라?”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도련님은 그 분에 대해 처음 듣는 말이지요? 이름이 병화(竝花)에요. 성은 서씨구요. 내가 매파는 아니지만 한쪽이 작은 이 눈으로 계집애들 구석(몸) 살피는 것은 일가견이 있질 않습니까. 돌아가신 마님께서 소인을 만날 때마다 며느리감을 부탁하여 앉으나 서나 도련님 짝을 찾아나섰지 뭡니까.”

“그래서 어찌 됐는가?”

“찾았지요. 아암, 찾았고 말고요! 도련님, 꽃 중의 꽃은 어디 있는질 아십니까? 바로 무도(舞蹈;무용)하는 계집입니다. 덩실덩실 춤을 추거나 빙글빙글 춤을 추거나 일단 몸을 움직여 춤을 추면 이녁의 몸에 숨어 있는 조그만 장난꾸러기 녀석이 눈을 뜹니다.”

“장난꾸러기라니?”

“에헤헤헤헤, 다른 게 아니라 상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죠. 문자깨나 쓰는 사람들은 그것을 음향(淫香)이란 못된 말로 표현합니다만, 나이든 처자가 아름다운 냄새를 풍겨 짝을 찾는 것은 이를테면 꽃 사이를 날고 있는 벌이나 나비와 같은 것이지요.
내가 쓸데없이 도련님의 마음을 싱숭생숭 헤집어놓은 것은, 그만큼 그 아가씨 몸이 대단하다는 것입지요. 얼굴을 비롯하여 마음 씀씀이가 다시없고 또한 무도를 하는 아가씨가 발이 여간 작아 초승달(新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지 뭡니까.”

이 당시 장안의 선비들은 이상한 취미에 귀를 기울였다. 일본의 기녀(妓女)가 부산에 상륙한 후 도성으로 올라와 번화가 곳곳에 둥지를 만들어 조선의 청년들을 끌어들였는데 이른바 ‘종달새(ひばり) 클럽’이었다.
본래 체신이 작고 보잘것없는 게 일본 여인이었지만 이 클럽에 있는 처녀들은 한결같이 연약하고 약해 보였다. 그러한 탓에 힘깨나 쓰는 조선의 사내들은 연약한 그녀들을 안아 보려 있는 돈 없는 재물을 챙겨 찾아들었다. 건달들은 이들을 ‘초승달’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