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회문시(回文詩)

한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문(權門)에서 책사(策士) 노릇하던 민호(閔鎬) 대감은 쉰이 넘어가자 출사하는 것보다 사냥을 즐기며 기담이설을 쫓는 날들이 많아졌다.

어느 때인가 비가 몹시 내리던 날 집을 찾아온 여인이 자신의 본색을 밝히며 집안에 우환이 들 것을 미리 알려주며 경고했었다. 직접 대감에게 전한 게 아니라 부인 최여인에게 들려준 말이었다.

“집안에 우환이 있을 것이니 경거망동을 삼가야 합니다. 바깥어른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사냥으로 소일한다는 소문이 인근 삼십 리 안팎에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지금부터라도 사냥을 중지하고 공덕을 쌓아 다가오는 불행을 막아야 합니다.”

혼겁할 내용이라 최여인으로서는 당연히 그것을 피해 나갈 방도를 물었다. 필경은 무속(巫俗)에 관한 일에 종사할 것으로 생각된 여인은 천문전(天門錢;엽전)을 던져 떨어진 모양새를 보고 탄식을 터뜨렸다.

“내가 아무리 말을 한 대도 아니 들을 것 같으니, 마님께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사냥을 중지하라 하십시오. 이 댁의 운은  길흉이 반반입니다.”

‘길흉이 반반’이란 얘긴 항용 할 수 있는 말이어서 최부인은 심각하게 듣지 않았다. 하루건너 남편과 잠자리를 하게 되었을 때, 집안의 우환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했으나 남편은 당치않은 일이라고 허드레 기침을 못마땅하게 뽑아냈다.

“자꾸만 그런 얘길 하시면 내가 이곳에 못 들어오겠습니다. 내 나이 쉰 하납니다. 사냥을 해야 앞으로 몇 해나 할 것 같습니까. 고작 한두 햅니다. 그 동안 권문에 의지한 덕으로 큰 아들 지후(閔智厚)는 글 잘하는 학사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였고, 큰 아이도 정겹게 지내고 있질 않소. 둘째는 나이 열다섯으로 다니는 서당에서 준재(俊才)라는 말이 날 정도니 이만 하면 집안이며 자식 농사는 잘 지은 것 아니오.

지금 이 나이에 방안 퉁소 마냥 집안에 틀어박혀 하인 놈들과 투닥거리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예전처럼 권문에 빌붙어 세도의 곁가지를 잡고 위태롭게 춤이라도 춰 볼까요?”

민호 대감이 큰 소리 떵떵치며 못마땅한 듯 부인을 노려보던 게 벌써 6개월 전이었다. 아들은 대과에 삼등으로 입격해 집안의 명예를 살렸는데 삼현육각 울리고 어사화 꽂은 채 집으로 오던 길에 말이 놀라 날뛴 바람에 말발굽에 채어 목숨을 잃었다. 머리 좋고 인물 좋은 자식이 비명횡사하자 민호 대감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냥을 했어도 내가 했구, 짐승을 쏴 죽였어도 내가 한 일이야! 한데, 죄 없는 큰 아이를 왜 데려 가느냐 말이야!”

아무리 호통을 치고 큰소리를 내도 그것이 소용없다는 것을알고 있는 민대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의 여인이 찾아와 첨자첩(籤子帖;글자가 적힌 수첩)을 펼치고 부인에게 글자 한 자를 고르게 했다. 과연 이 집에 흉한 기운이 사라졌는지를 알아볼 요량이었다.

최여인은 여러 글자 가운데 ‘범(范)’자를 가리켰다.

“어찌하여 부인께선 이 글자를 가리켰습니까?”

“글쎄, 마음이 자꾸만 그쪽으로 가네. 왠지 그 글자가 내게 해당되는 것 같아.”

여인은 잠시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좋은가?”

“마님, 범(范)은 죽을 사(死)의 반쪽(匕)과 활(活)의 반쪽(氵) 그리고 반(半)들의 십(十)을 합한 글잡니다. ‘반쯤 죽은 것이나 산 것’이나 이래저래 똑같은 운숩니다. 부디 적선을 하십시오. 덕을 쌓아야 집안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정적을 내치기 위해 지략을 쌓던 인물이고 보니 자신이 사는 길만 찾을 줄 알았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은 생각 밖이었다. 사냥 하는 것이 운수에 장해가 된다 하자 장안에서 구성지게 얘길 잘하는 사내들을 불러들여 그들의 한담을 들었다.

마음에 들면 몇 푼의 수고비를 건네며 소일거리 삼아 지내는 게 벌써 두 달이 가까워졌다. 처음엔 우리나라의 역사를 비롯하여 괴담이나 기속(奇俗) 같은 것을 즐겨 들었는데, 차츰 남녀 간의 비사(秘事)로 옮겨갔다.

그렇다보니 민대감의 사랑채엔 은근짭잘한 얘길 구성지게 풀어헤치는 위인들이 즐비하게 찾아들어 줄을 섰고 그들은 단 한 차례 일지라도 혀끝을 놀려 민대감의 궁금증을 채워주었다.

일곱인가 여덟인가 되는 얘기꾼들이 한 사람으로 줄어든 것은 민대감이 그의 얘기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이었다. 김씨 성을 쓴다 했으나 얘기를 할 때 사용하는 그의 아호는 ‘화자허(花子虛)’였다.

“대감마님, 오늘은 중원의 기이한 풍속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중원에는 호색문학을 내세울 때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만, 그 책에는 대체로 은유적인 표현이 짙다는 데 시선을 모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모(母)를 비롯하여 문(門)이나 빈(牝), 묘(妙)나 마(魔) 등은 한결같이 여인의 음패(陰貝)를 만들어낸 상형어라 할 수 있습니다.”

민대감이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런 얘기보다 다른 얘길 듣고 싶다는 투였다.

“오늘은 ‘아호(雅號)’에 대해 얘길 해보게. 아호라는 게 그 사람의 품격을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얘기는 순식간에 ‘아호’ 쪽으로 바뀌었다. 음란서생 화자허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대감마님, 아호를 얘기하는 것은 먼저 중원의 호색문학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거 좋지.”

“호색문학에는 그 나름의 성적인 아호가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궁 안이나, 선비, 장사꾼 등등으로 나뉘는데 대개 전하는 책들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금병매(金甁梅)라는 것은 금련을 비롯하여 이병아와 춘매에서 이름자를 따왔고, 충화자(冲和子)는 돌진하여 화합을 이루는 놈이라는 사내의 양물에 대한 은유이며, 그런가하면 눈이 하나 뿐인 척안녀는 눈이 하나 밖에 없으므로 성적으로 대단한 기교가 있을 것으로 추단합니다. 이땐 반드시 발이 작아야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방술에 능한 여인은 모름지기 발이 작아야 제격이라는 것은 모두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민호 대감으로서는 뭐가 좋고 그른지를 분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동안 자네를 쭉 봐 왔는데 성의가 그만해 유독 내 집 출입을 허락했네. 마음에 담은 얘기 보따리가 비게 되면 그때 말하시게. 그리하면 내가 생각할 것이 있네.”

달리 생각한다는 것은 길게 볼 것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일이야 그때 가서 생각할 것이고 당장은 입안에 거미줄 칠 게 없다는 점에서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물러나왔다.

마루를 내려와 섬돌에 서서 심호흡을 길게 몰아쉰 후 잠깐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사랑채로 들어오기 전 중문으로 빠지는 문 어림에서 이집의 큰 며느리가 잠시 자신을 만나고 가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홀로 된 여인이 외간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를 생각하며 화자허는 중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