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이지만 내게도 비밀은 있었답니다. 아마 이십 년은 족히 될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산청 땅에 들어와 하룻밤 쉴 곳을 찾는데 박초시란 분이 갑자기 몸에 변고가 생겨 의원을 찾는다지 않습니까. 시생이 그 분의 병을 치료해 주었는데 내게 그런 말을 했어요. 자신이 하룻밤 여인을 품었는데,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뭘 숨기겠느냐고요. 박초시가 자신이 지닌 쥘부채를 주더라구요. 어느 때인가 사연을 알게 되면 하늘이 돕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글쎄요···, 자세한 내막이 쓰여 있질 않고 비익조(比翼鳥) 반쪽만 그려져 있더라고요.”

김씨는 어디 한번 그 부채를 보자 하여 오주부가 내민 물건을 받아들고 감회에 젖는 듯했다. 한 동안 부채를 만지다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가 보네. 감춰도 좋을 일이 이렇듯 나타는지 모르겠네. 내가 시집온 지 얼마 안 돼 하루하루 생활하는 게 어려워 방물장수 아낙이 마련해준 방법을 사용했는데 그래야만 시댁 어머님을 봉양할 수 있는 곡식을 얻을 수 있었다네. 해서 두 눈 질끈 감고 치마끈을 풀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방물장수 아낙이 개미 눈물만큼 내놓고 재물을 들고튀었지 뭔가.

박초시 그 분이 말하기를 다음날 비익조가 그려진 부채를 들고 누구라도 찾아가면 하룻밤 안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약조를 하라지 뭔가. 내가 요조숙녀는 아니나 어려울 때 한 약속이니 그것을 지켜야 할 생각은 있으니···, 오늘은 자식의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으니 내일 밤 다시 오게.”

“그러지요. 어차피 마님의 병은 심화(心火)가 들끓으니 하루아침에 나을 건 아닙니다. 내일은 초저녁부터 이 황촉을 켜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오주부는 오동통하게 생긴 누런 초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넷째 날 - 밤 말은 쥐가 듣는다

김씨는 해가 떨어지자 윗켠에 황촉을 켜고 보료위에 누웠다. 자신이 이곳 박씨 일문에 시집 와 알게 모르게 치마끈을 푼 게 몇 번인가를 마음속으로 헤아렸다.

박초시와 일을 치룬 후 비가 몹시 내리는 어느날 밤, 방물장수 곰보 아낙이 찾아왔다. 미움보다 반가움이 왈칵 일어났다.

“그래, 자넨 어디에 머무는가?”

“마님, 시생의 처지가 궁핍해 지난날 마님께 불손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오늘은 죗값을 치르려 들렀습니다. 마님이 어찌 처신하든 쇤네는 서운해 하지 않겠습니다.”

“그 일은 됐네. 한데, 무슨 일인가?”

“얼마 전 박초시 그 양반을 만났습니다. 마님과 인연을 만든 뒤 무슨 일인지 시름시름 앓더니 지금은 병색이 완연해졌습니다. 그 양반 능히 여든 섬 지기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물려줄 사람이 없으니 만사휴의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이 댁 서방님께서 박초시와 너무 닮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해서 쇤네도 서방님 얼굴을 유심히 보았더니 그런 느낌이 다분했어요. 마님, 서방님이 그 분의 피를 받았지요?”

아항, 요것이었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났지만 박씨는 꾸욱 참았다. 그러나 시치미를 뚝 떼고 능청을 떨었다.

“그거야 집안의 비밀이니 함부로 발설하겠는가.”

“마님, 쇤네가 어제 그 분을 뵙고 약조를 얻었지 뭡니까. 만약 서방님이 그 분의 피를 받았다면 평생 모은 재물을 서방님께 드린다 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면 이 집안도 하루아침에 펴는 게 아니겠습니까.”

“글쎄···.”

“박초시 말은 마님을 만나 자신과의 인연으로 자식이 생겼는지를 직접 듣고 싶어 합니다. 만약 그 분의 짐작이 맞는다면 그날로 모든 문서를 줄 것이며 자신이 죽은 날을 기점으로 제사만 지내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마님, 이번 일이 이뤄지면 쇤네에게도 한 밑천 떼어 주겠지요?”

“떼어주다 말다!”

일은 은밀히 진행되었다. 박초시는 오랜 중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달 보름께에 눈을 감았고, 그날따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물이 불어난 저수지 근처를 지나던 방물장수 아낙이 발을 헛디뎠는지 다음날 사체로 떠올랐다. 목격자가 없는 데다 날씨가 워낙 사나워 실족으로 처리하는 데 이상이 없었다. 까마득한 그때의 일이 왜 생각나는지 알 수 없었다.

밤이 점점 깊어졌다. 한 사내가 재빨리 담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서더니 박씨 일문의 며느리가 있는 별당 쪽으로 다가갔다. 잠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불 꺼진 방문이 사르르 열리며 빨리듯 사내는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러한 침입자의 모습을 어두운 그늘 속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오주부였다. 그는 대문을 들어서는 즉시 그림자 하나가 별당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깨달았다. 호기심이 스프링처럼 일어나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한 채 창문에 귀를 대고 방안 동정을 살폈다.

도란도란 나누는 얘기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아양을 떠는 여인의 코맹맹이 소리와 이내 숨이 탁 막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건드렸는지 모르지만 여인은 금방 숨넘어가는 소리를 지르며 사내의 몸놀림에 보조를 맞추었다. 그것은 도무지 참고 들어줄 수 없는 욕망의 향연이었다.

오주부는 급히 안채로 걸음을 향했다. 방안에는 자신이 피우게 한 황촉이 타들어가는 매캐한 훈향이 문을 열자 왈칵 밀려들었다. 보료에 비스듬히 누운 김씨의 얼굴은 발그레 익은 채 들어오는 사내의 위아래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어떠십니까, 마님?”

“왠지 자네 오기만 기다려지네. 자네가 막힌 경혈을 풀어준다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그럼 가까이 오게. 자네 솜씨가 어떤지 내가 한 번 봐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