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관아에서 죽은 자의 몸을 검안하고 있으니 닷새 남짓이면 연락이 올 겁니다. 그때 주검이 닥치면 놀랄 것이라 생각하여 그곳 사또께서 미리 연락하신 것입니다.”

“어찌된 연유인지 찬찬히 말하시게.”

“이 댁 서방님께선 과시에 응할 생각이 없으셨나 봅니다. 처음 며칠은 그 지역의 이름난 기생들을 품에 안고 기름진 음식으로 몇 날을 보내신 후 사고가 난 그날엔 장터의 건달들과 수군거리더랍니다. 그것은 평범한 방법이 아닌 사기를 치는 수법이었습니다.”

“사기라니, 무슨 말인가?”

“마님, 서방님께서 주사위 놀이를 하셨는데, 본시 주사위에는 하나에서 여섯까지 점이 찍혀 있습니다. 그것을 굴려 높은 숫자로 할 것인지, 낮은 숫자로 할 것인지로 내기를 하는데 서방님이 지니신 것은 짝수로만 된 주사위였습니다. 처음엔 그것으로 많은 액수를 땄습니다만, 사람들이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주사위가 짝수로 된 것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해서···, 소란이 일어나고 서방님께서···.”

“알았네.”

김씨는 문갑에 있는 몇 푼을 꺼내 그 사람에게 준 후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 집안의 일이니 다른 곳엔 발설 말게. 내가 알아서 조용히 처리할 것이야.”

사내는 나가려다 돌아섰다.

“아참, 그리고 이건 서방님이 돌아가시기 전 작은 마님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서방님께선 다른 사람에겐 전하지 말고 작은 마님에게만 전하라고 했거든요.”

“이리 주게.”

“예에?”

“내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 집안 일이니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며느리가 돌아오면 사고를 얘기하고 내가 줄 것이니 그리 알라 그 말이네.”

“아, 예에.”

사내는 붉은 천으로 싼 물건을 김씨에게 건네고 물러갔다. 그가 사라지자 보자기를 펴니 거기엔 쥘부채가 들어있었다. 그저 평범한 모양새였는데 ‘행시(行屍)’ ‘주육(走肉)’, ‘의가(衣架)’, ‘반통(飯筒)’이라 쓰여 있었다.
사람이 살아 있다 해도 그것이 어찌 산 것이겠느냐는 것으로, 사람은 걸어다니는 시체요 달음질치는 고깃덩이며, 옷을 걸어놓는 횃대고, 밥 담는 통이라 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아들과 며느리가 사전에 무언가를 약속한 단어 같았다. 그러다보니 울컥 울화가 일어났다. 아들 하나 뿐인 집안에 이젠 며느리와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는 절망감이었다.

셋째 날 - 엽전(葉錢)의 양면성

보진제(寶眞齊)라는 한약방의 오주부(吳注簿)가 급한 연락을 받은 것은 이날 오후였다. 용인 어디에서 살다 산청까지 흘러왔는데 아내와 자식이 흉한의 손에 살해되자 아무도 모르는 이곳까지 흘러들었다는 게 소문의 전말이었다. 나이는 마흔을 넘었다는 말도 있지만 워낙 기골이 훤칠한 데다 미목이 수려해 고작 삼십 어림으로 보일 정도였다.
이곳저곳 김씨 부인의 아픈 부위에 침을 꽂고 잠시 여담을 나누던 중 오주부는 품안에서 조그만 봉투 하나를 꺼내놓았다. 죽었다고 전갈이 온 박충원이 쓴 자인서(自認書)였다.

“그 동안 몇 번이나 마님을 찾아오려 했습니다만, 서방님께서 이번 과시(科試)를 치를 때까지 만이라도 참아달라 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들리는 소문엔 서방님이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간 게 아니고 산청 땅 소곡이라는 곳에 사는 기생에게 빠졌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해서 마님께 이걸 보여드립니다.”

“뭔가?”

“차용증섭니다. 그 동안 서방님이 저의 집에 찾아와 이런 저런 일로 가져간 돈이 백미 여든  섬입니다. 이건 서방님께서 쓰신 자인서구요. 마님, 어찌하시겠습니까? 관에 발고해 쟁송(爭訟)을 일으킬까요?”

“그거야 자네 마음대로 할 일이나, 무엇을 어찌했기에 그토록 많은 빚을 졌는가?”

“얘기를 하면 사연은 짧지 않습니다. 서방님과 이놈의 인연은 참으로 질깁니다. 저 역시 도박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판에 스무 살 피 끓는 나이 땐 오갈 곳이 없는 형편이었어요.”

얘기를 듣다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도박판에서 사기를 치다 골병을 당한 남편이 단 한 번 큰 돈을 땄다고 했었다. 백미 2백 섬에 해당되는 돈이었는데 조금만 남겨달라는 상대방의 청을 거절하고 기생집으로 달려간 게 화근이었다. 간밤에 넘칠 듯 전대를 채웠던 어음과 동전들이 하룻밤 사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날 난리를 치다 부랑배에게 뭇매를 맞고 반송장이 되어 달구지에 실려 왔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김씨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오주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집안을 쑥밭으로 만든 것은 바로 주사위였어요. 짝수로만 되어 있는 주사위를 던져 난장판에서 나를 속인 그 자가 나중에 크게 화를 입었다는 얘길 들었지만,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세상은 돌고 도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저러나 마님, 지금 마님의 몸은 화가 극도로 차올라 약발이 받질 않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시고 좋은 생각을 하십시오.”

사내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마님, 제가 얘기 한 토막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며칠 전 한 젊은이가 나를 찾아와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어요. 어찌 우느냐 물으니 엽전 하나를 내놓고 그러는 게 아니겠어요. 자기에게 절친한 친구가 있는데 어느날 시회를 나갔다가 아름다운 처녀를 만났답니다.
그후 세 사람은 자주 어울렸는데 이젠 혼일할 적령기가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두 남자가 처녀에게 청혼했는데, 상대를 정하기 어려웠던지 처녀는 엽전을 주어 던지게 했답니다. 앞면이 나오면 김씨 성을 쓰는 사내에게, 뒷면이 나오면 이씨 성을 쓰는 사내에게 시집을 가겠다 한 것이지요. 엽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는 바람에 처녀는 김씨 성을 쓰는 사내와 혼인을 했답니다.”

“그래서요?”

“그 후 김씨 성을 쓰는 친구가 병으로 죽음을 맞이할 때 유언을 한 모양입니다. 아들이 하나 있으니 자기의 친구 이선비와 혼인하면 잘 키울 거라 한 거지요. 때마침 이선비 역시 친구의 소식을 들었던 터라 그 집에 왔다가 자신과 재혼해 달라고 한 겁니다. 그리하면 부인과 아이를 잘 보살피겠다 한 거지요. 부인은 잠시 생각하고 나서 엽전을 던지게 했습니다. 앞면이 나오면 혼인은 할 수 없고 뒷면이 나오면 뜻에 따르겠다 했는데···.”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군요.”

“그렇습니다, 마님.”

김씨는 몸을 일으키며 속내를 털어 놓았다.

“하루 전에 아들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소, 오주부. 그 동안 홀로 된 몸으로 살림을 지탱해 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그대도 알 것이오. 한데, 아들이 죽기 전 며느리에게 쥘부채를 남겼다고 보내왔지 뭔가. 그걸 보자 울컥 투정이 일어났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