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엽전(葉錢)

참으로 허망한 일이었다. 그토록 영특한 아들이 과장(科場)으로 향하던 길에 객사했다는 소식은 집안을 진흙탕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이 열여섯에 시집 와 다음 해 아들을 낳았으니 자식이 스물 하나라 해도 김씨(金氏) 부인의 나이는 마흔이 채 못 된 상태였다. 쇄락한 집안이어도 한때는 조선 팔도를 쩌렁하게 흔들었던 안동 김문이니 비록 여자라 해도 보고 들은 바가 있어 대가 샜다. 이곳 박씨(朴氏) 문중에 시집 와 가진 거라곤 귀 떨어진 쪽박 몇 개뿐인 살림을 이십여 년 만에  산청 땅에 백석지기 살림으로 늘려놓았으니 현모양처라는 말이 무색치 않았다.

남편 박주서(朴周緖)는 하는 일 없이 바쁜 위인으로 해만 뜨면 장돌뱅이처럼 돌아다녔다. 꽃 같은 색시가 집에 있는 데도 무엇이 그리 궁금하고 찾아야 할 일이 많은지 식전부터 부지런히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쪽 귀가 먼 시어머니는 하루 종일 군것질에만 관심이 있어 고구마 삶은 것만 주어도 그것을 먹느라 정신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갓 시집 온 색시가 무슨 일을 얼마나 해 남편과 시어머니를 먹여 살릴 것인가. 그런데도 김씨 며느리는 별다른 불평없이 손바닥만한 채마밭을 일구고 품앗이 일을 하여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도무지 희망 없는 짓이었으나 새색시는 식구들을 위해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던 남편이 도박판을 기웃거리다 흠씬 얻어맞고 반송장이 되어 업혀온 것이다. 그렇다보니 집안은 불구덩이를 지렛대를 들쑤신 듯 소란스러웠다.

첫째 날 - 그 옛날의 은밀한 흔적들

소란은 당장 다음날부터 일어났다. 그래도 품을 팔고 먹을 것이 있어야 모닥숨이나마 내쉴 터인데 남편은 운신이 어려운 데다 입만 살아 소리소리 고함치는 게 일과였다. 게다가 정신없는 시어머니는 먹을 걸 주지 않는다고 투정만 늘어놓으니 김씨로서는 세상 살아갈 희망이 없었다. 하루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방물장수 곰보 아낙에게 하소연했다.

“이게 세상 사는 것인지 어떤 건지 알 수가 없네. 남편은 반 병신 되어 소리소리 고함만 지르고 시어머니는 걸신들린 듯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으니 차라리 한 많은 이 세상 미련 없이 떠나고 싶네.”

“그래도 그런 것이 아닙지요. 사는 사람은 살 때까지 살아야해요. 저기 새댁, 내가 사는 방법을 하나 가져올까?”

“사는 방법이라니오.”

“이리 사나 저리 사나 이 세상 사는 것은 마찬가지요. 그러니 내가 방법을 마련해 올 테니 눈 딱 감고 기다리슈.”

방물장수 곰보 아낙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사흘간이나 소식이 없더니 나흘째 되는 날 나타나 목소리를 깔았다.

“새댁은 인물이 반반하니 눈 딱 감고 치마 한번 올려요. 상대는 근동에서 행세깨나 하는 박초시라오. 서른셋에 상처하여 혼자 사는 몸이라니 넌지시 운을 뗐더니 후꾼 몸이 달아 애걸복걸 합디다. 이참에 새댁이 잘 처리하면 내가 좋은 일을 만들어 주리다.”

이날 김씨 새댁은 쌀 다섯 되를 받고 방물장수 뒤를 새가슴을 한 채 따라나섰다. 이윽고 약속 장소인 어느 집 앞에 이르러 곰보 아낙이 소곤거렸다.

“바로 저 집이우. 밖에서 낮게 기침 하면 방안의 불이 꺼질 거유. 그러면 가만 가만 들어가 사내 품에 안기면 되우. 이런 말 하니까 좀 그렇긴 한데, 새댁도 오랜만에 남자 냄새 맡아 좋을 거우.”

금방 오호호호! 웃을 것 같은 곰보 아낙을 뒤로 하고 김씨 부인은 방문 앞에 이르러 낮게 헛기침을 뿌렸다. 그러자 방안의 불이 꺼지며 사르르 방문이 열렸다. 아귀처럼 시커먼 어둠속으로 새색시는 빨려 들어갔다.

이 날 새댁은 사내의 무한한 힘을 느끼고 또 느꼈다. 연약한 남편의 힘과는 전연 다른 땀냄새와 거친 호흡이 어우러진 마치 황소 같은 사내의 몸놀림을 체험했다. 사내는 잠시도 틈을 주지 않았다. 해시(亥時;저녁 11시경) 어림에 시작한 놀이는 인시(寅時;새벽 5시경)가 되어도 그칠 줄 몰랐다. 자신의 몸 안에 들어온 뜨겁고 묵직한 것이 서둘러 나가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것은 쓸데없는 기우였다. 사내는 지치지 않은 용력으로 닭이 두 번이나 울 때까지 몸놀림을 그치지 않았다.

“이제 그만···, 가야···해요.”

겨우 그 말을 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도 사내는 한식경 쯤 더 방아를 찧고서 푸우 푸 단숨을 몰아쉬며 힘차게 알을 까고 배에서 내려왔다. 사내가 호흡을 추슬렀다.

“언제 다시 오겠소?”

“다시 오다니오?”

“나는 이녁을 세 번 만나고 싶다 하여 쌀 서른 가마를 주었네. 자네에게 얼마나 갔는지 모르지만···.”

“닷되요!”

순간 사내는 어이가 없는지 말이 없더니 입맛을 쓰게 다셨다.

“그럼 이렇게 하세. 자네도 손해났으니 나도 양보하겠네. 내가 자네에게 쥘부채를 하나 주겠네. 그 부채엔 남녀 간의 운우(雲雨)를 나타내는 비익조(比翼鳥)라는 새가 각기 반토막씩 그려져 있네. 어느 땐가 내가 그 부채를 들고 찾아갈 것이니 그걸 보면 나를 받아 주게. 설혹 내가 못 가면 다른 사람이 간다 해도 받아주어야 하네. 싫으면 지금 말하게. 나는 자네를 괴롭힐 생각은 없네.”

날이 훤히 밝아오는 참이라 싫고 말고가 없었다. 허드렛 약속일지라도 일단 그러마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둘째 날 - 짝수로만 되어 있는 주사위

왜 그때 생각이 떠올랐는지 몰랐다. 남편은 욕창까지 등에 피더니 두어 달 고생하다 세상을 떴고, 시어머니는 반 년이나 더 살았다. 이웃집에서 가져온 찰떡을 며느리 오기 전에 먹을 양으로 단숨에 꿀꺽 삼키다 기도가 막혀 세상을 떴다.

이제 천하에 혈혈단신이라 생각했는데 하늘도 무심치 않아 뱃속에 생명체가 꿈틀거렸다. 열 달 배앓이를 하여 세상에 태어난 것은 사내였다. 나라에 충성하라는 뜻으로 이름을 충원(忠元)이라 지었다. 박충원.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는 말이 맞는 모양으로 어쩌면 하는 짓이 제 애비와 똑 같았다. 책을 읽는 것보다 모이기만 하면 한담(閑談)이나 주절거려 과시에 대한 싹수는 멀어 보였다. 그래도 나이가 스물 하나가 되었을 때 이씨 집안의 규수를 데려와 혼례라는 것을 치러주었다.

“이젠 장가를 갔으니 너도 어른이다. 과시가 한 달 앞으로 다가 왔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시험을 치겠느냐?”

“그럼요, 쳐야지요!”

박충원은 넉넉하게 용체를 마련하여 조금 일찍 길을 떠났다. 아들이 과거를 보러 떠난 지 일주일인가 되었을 때였다. 며느리가 잠시 마실을 나갔을 때 급한 전갈이 전해졌다. 이 댁의 아들 충원이라는 젊은이가 산청을 벗어난 소곡(小谷)이란 장터에서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