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날 - 천하를 훔칠 계략

안개가 자주 끼는 계절은 아니었지만 이날 따라 선화문(宣化門) 주위는 안개가 깔려 있었다. 궁으로 향하는 선화문 입구엔 농사꾼 차림의 사내와 시골 아낙 냄새를 물씬 풍기는 여인이 광주리 하나를 머리에 이고 들어서는 참이었다. 수문(守門)하는 장졸이 앞으로 나섰다.

“안에 든 건 뭔가?”

“떡이우.”

“떡?”

그때 선화문 안에서 무수리 하나가 달려 나왔다. 그녀는 광주리를 이고 온 아낙을 반색했다.

“아니 이제 오면 어떡허우? 우리 장소용 마마님이 그토록 드시고 싶어 하시는데. 자, 어서 들어와요.”

아낙이 광주리를 머리에 이자 그와 동시에 무수리의 품에서 노리개 등속이 한웅큼 장졸의 옆구리에 찔러졌다. 예전같으면 두말없이 챙겼을 것이지만 장졸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아낙을 가리켰다.

“그 광주리 내려 놓으시오!”

“예에?”

“내 말이 안 들리는가? 어서 광주리를 내려놓으래도!”

엉겁결에 광주리를 내려놓자 이번엔 뚜껑을 벗겼다. 곱게 싼 비단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다시 만지려 하자 무수리가 질겁했다.

“무엄하다! 어디에 손을 대는가! 이것은 장소용 마마가 드실 떡이다. 한갓 궁문을 지키는 천한 놈이 함부로 손을 댄다는 게 말이 되느냐! 어서 비켜라!”

무수리와는 달리 시골 아낙 차림의 여인은 사시나무마냥 몸을 떨었다. 바로 그 순간 사내는 칼을 뽑아 어깨 위로 치켜들었다.

“아니! 저, 저!”

수직으로 바람을 가르는 칼날이 광주리를 내려치는 순간, 퍽 소리와 함께 두 동강 났다.

“아악!”

여자의 비명 소리가 아침 공기를 흔들었다. 다시 한 번 장졸의 칼이 광주리를 내려치자 네 조각이 났다. 그 순간 장소용을 섬기던 무수리가 넘어지고 곤두박질치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시골 아낙 역시 한쪽 신발이 벗겨진 것도 모르고 궁장(宮墻)을 끼고 허겁지겁 도망쳤다. 장졸은 흥건히 젖은 붉은 비단을 젖히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건···, 갓 빠진 핏덩이다!”

영아에게 무참히 칼을 댄 장졸 역시 얼이 빠진 듯한 눈빛으로 광주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귀에는 조대비의 냉랭한 호통도 들려오지 않는 듯했다.

하루 전, 밤이 늦은 시각 함지박이나 광주리를 가져오는 자가 있으면 불문곡직 네 토막 내라는 명을 조대비에게 받았다. 저녁이나 아침일 거라는 귀띔도 있었다.

영아를 토막 낸 장졸은 사헌부로 끌려가 다음날 방면되었다. 이내 사건내막이 드러났다.

<···소용 장씨는 전하의 총애를 받은 설희(雪姬)라는 처녀가 받은 반지(環)에 연연하여 거짓으로 회임하였음을 궁인들에게 알렸다. 그런 다음 이내관을 회유하여 그 반지를 얻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오라비를 이용해 살해하고, 대신 가짜 반지를 은장이 노인 최씨에게 만들게 한 후 살해하였다.

장소용이 이렇게 한 것은 상감의 총애를 받은 날짜에 맞춰 회임하였다 소문을 내고 갓 낳은 사내 아이를 궁으로 데려와 천하를 훔칠 계획을 짜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은장이 노인이 남긴 단서를 해석하여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었으니 이것은 열성조가 돌보심일 것이다.>

예로부터 궁인들은 상감의 총애를 받으면 그 날짜가 새겨진 은반지를 받았다. 반지를 얻지 못하자 장소용은 오라비를 시켜 광나루 인근에 사는 은장이 노인을 이용해 반지를 만들었으나 최노인은 ‘배월붕반(配月朋半)’이란 단서를 남긴다. 이것은 사내 아이를 궁으로 데려올 날짜가 ‘기유월(配月己;酉月) 15일(朋半)’이라는 뜻이다.

경위서가 올라가고 내금위 별감이 장소용 처소에 갔을 때 이미 그녀는 독약을 마시고 절명한 뒤였다. 이날 어쭙잖은 소문이 돌았다. 모든 일은 문숙의가 꾸미고 그것이 들통 나자 장소용을 독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장소용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한 것인지 이날 정오부터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그 빗발을 대비전에서 설희가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작년 가을이 오기 전, 자신이 이공수 내관 집에 몸을 의탁했을 때 상감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녀는 상감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시로써 화답하여 받아들였다. 먼저 상감이 시를 지었다.

나이 열여섯으로 보이는 그대 뉘집 딸인가(二八誰家女)

품위 있고 날씬하여 곱기도 해라(嬋娟得自然)

그대에게 주인이라 부를 사람 없거든(君無王上點)

내가 그대 주인(夫)됨이 어떠하리오(我爲出頭天)

다음은 설희가 화답의 시를 지었다.

이 나라 제일가는 설희라 하는데(九州第一雪)

오늘밤 그대 위에 활짝 피어 보이리(今宵爲君開)

이 꽃의 참뜻 알고 싶거든(慾知花眞意)

삼경에 달빛 밟고 찾아오소서(三更踏月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