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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승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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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승부사
2011-07-21     프린트스크랩


()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어떤 일에 지나치게 빠져 병이 되는 것으로, 이를테면 실제적인 경험은 없으면서 오로지 책 속에 진리가 있다는 식으로 주야장창 책만 읽는 걸 서벽(書癖), 학문은 멀리하고 오로지 술과 기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걸 주벽(酒癖), 손버릇이 나빠 남의 물건 자꾸 훔치는 걸 도벽(盜癖), 집안일은 멀리하고 하루종일 바둑이나 장기 두는 사람을 기벽(棋癖)이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벽’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고 그저 못된 버릇쯤으로 여긴다. 못된 버릇, 그게 ‘벽’이다.

일년에 2천 병의 두꺼비를 잡는 나에게 아는 이들은 내 이름 대신 ‘흔들릴 때마다 한 잔’이라거나 그냥 ‘한 잔’이라는 말로 불러대기 일쑤였다. 그냥 점잖게 부르는 게 아니라 약간은 비비꼬인 어투로 ‘어이 한 잔’하거나 아랫사람을 대하듯 겨우 스물이나 됐을까 싶은 기생족제비 같은 놈이 그냥 ‘야, 깡소주’하고 불러대기 일쑤였다.

 

처음에야 얼마나 울화가 치밀었는지 모르지만 사실 그런 말을 들어도 싸다고 위로 삼았다. 장안 제일의 요정 향운각(香雲閣)에서 얼쩡얼쩡 곳곳을 기웃대며 ‘어이 천원만 주소’ 하거나 모처럼 고스톱 판이라도 벌어지면 1분 간격으로 들려 개평을 뜯는 위인이 나였으니 그런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보니 내가 나타나면 ‘해방 이후 가장 재미없는 판이 벌어졌다’거나 ‘10년 내에 염병이 돌 것’이란 말이 하늬바람처럼 수군수군 떠다녔다.

그만큼 나는 그들에겐 참으로 밥맛없는 싸가지였다. 그렇다 해도 이곳에 오면 밥 주지, 용돈 생기지, 심심풀이 쐬주에 삼겹살 생기니 굳이 남의 눈치 볼 필요는 없었다.

 

사실 향운각은 요정이지만 장안 건달들만 문지방을 넘는 곳은 아니었다. 내가 건달들 보려 이곳에 온 건 아닌 것처럼 이곳에 있는 녹야원(鹿野園) 이란 VIP()에서 심심찮게 중요한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바로 바둑이나 장기 모양을 주최측에서 만들어 그것을 풀어내는 묘수풀이가 정답자에게 상품을 주기 때문에 예쁘장한 여류기사들의 모습도 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대박이었다.

 

향운각 여주인이 어떤 기사의 팬클럽인지 모르지만 그녀는 서른도 안 된 나이에 명인 칭호를 받는 서봉수와 국수칭호를 받는 조훈현을 초청해 기념대국을 벌인다는 소문이 장안의 화제로 향운각 이름을 날렸다.

3류 유곽에 불과한 향운각이 장안의 화제가 된 바람에 나 역시 닷새 전부터 이곳에 진을 치고 만만한 플랑크톤을 찾아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내가 이층에 있는 한 방을 들여다보자 턱밑 수염이 반 자()는 넉넉한 노인이 나를 손짓해 불렀다.

 

“어찌 그러십니까?

 

“향운각의 주인이 초청기사 대국료로 돈 내놓은 걸 아는가?

 

“모르는데요.

 

“자네가 이곳에 어찌 왔든 글자 한 자 써 보게. 내가 자네의 운수를 봐 드림세.

 

당연히 공짜라는 생각에 ‘촉()’ 자를 쓰고 몇 번이나 들여다보다 내려놓았다. 노인이 풀이를 내놓았다.

 

“자넨 자책하지 마시게. 무엇이 그리했는지 모르나 자네가 촉() 자를 쓰며 몇 번이나 망설였는데 글자를 쪼개 살피는 파자법상(破字法上)으론 ‘빛 없는 촛불’이란 것인데···, 촛불이 빛()을 잃으면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네. 자넨 스스로를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여긴 어찌 왔는가?

 

“이곳에 온 건 제 마음에 둔 예쁘장한 여류기사가 이곳에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여기에 글자 한 자 써 보시오.

 

나는 잠깐 망설이다 ‘벌()’ 자를 썼다. 그러자 노인은 얼굴을 환히 펴며 목소릴 낮췄다.

 

“이 글자()는 질이 좋은 비단()을 지략()을 써서 중간에 깎아먹는다(剝削)는 뜻이 있네. 그렇다 보니 라()와 계()와 박()과 삭()을 합하면 벌()이 되지. 해서, 자네가 마음에 둔 여류기사의 마음을 얻으려면 이렇게 하는 것이···.

 

노인은 더욱 목소릴 낮추어 ‘비단 중간을 지략으로 깎아먹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나는 노인의 충고대로 대국이 열리는 다음날 정오에 녹야원으로 향했다.

이미 그곳엔 아침 일찍부터 아마추어 패거리들의 바둑이 끝나고 복기가 한참이었다. 어수선한 소란 속에 서명인과 조국수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저희끼리 소곤거리며 ‘조훈현이 세다’ ‘서봉수가 세다’는 입씨름으로 싸울 듯 열을 올렸다. 누군가가 좌중에 나서 ‘세기의 대결이 향운각에서 열립니다!’라고 소리쳐 박수갈채를 받자 나는 노인의 귀띔처럼 때를 놓치지 않고 거만하게 낄낄거렸다.

 

“호랑이가 없는 곳에선 토끼가 왕이오. 안 그렇습니까?

 

좌중의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자 한국기원에서 나온 관계자가 점잖게 나무랐다.

 

“바둑을 그렇게 잘 두십니까. 그렇다면 프로에 응모하시던지 전국대회에 나가보시지요.

 

“어중이떠중이가 다 있는데 언제 그들과 바둑 둔단 말입니까. 아마추어든 프로든 그들을 깨끗이 청소해 줘야 나설 마음이 생기지요.

 

저만치에서 듣고 있던 조훈현이 불쾌한 듯 다가왔다.

 

“선생이 그렇게 바둑을 잘 둔다면 어디 한 번 두어봅시다. 만약 선생이 진다면 어찌하겠소?

 

“것보다는, 우선 조국수님이 서명인과 바둑을 두어 이긴 분과 내가 겨루겠습니다. 가만, 그리되면 자존심 문제가 생기나요?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내가 조국수와 서명인을 동시에 상대하면그것도 다면기로 말입니다. 내가 지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만 두 분이 지면 기념대국 상금을 제게 주십시오.

 

자존심이 상했던지 두 기사는 어느 한쪽만 이겨도 승리한 것으로 한다고 선언하고 바둑을 두었다. 그러나 다섯 수도 지나기 전 두 사람은 패배를 자인했다.

그것은 내가 두 기사의 바둑 두는 수법을 흉내냈기 때문이다. 처음에 조국수의 착점을 흉내 내 서명인의 바둑에 뒀다가 서명인이 착점한 것을 조국수에게 뒀으니 어느 한쪽이 내게 패할 건 이미 결론이 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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