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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난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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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난센스
2011-08-16     프린트스크랩


국립미술관 앞자리엔 언제나 그가 앉아 있었다
. 항상 사람들이 붐빌 것으로 예상돼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자리였지만 화구(畵具)를 펼치고 인물 데생 한 편을 일금 3천원으로 그려주었을 때야 사람들은,

, 맞아! 여긴 길거리 화가가 들어찰 자리였어.’


비로소 깨달은 듯 모두들 고갤 주억거렸다
. 사람들은 잊고 있었지만 그 자린 그가 앉았기 때문에 산다는 표정이었다.


대자연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 아무리 좋은 산과 아름다운 호수나 바다가 있다 해도 그것은 그림 속의 풍경일 뿐이다. 스산하기 때문이다.


그곳에 사람이 있으면 경치는 살아난다
. 역동(力動)하기 때문이다. 왜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빚었기 때문이다. 흙으로 빚은 인간을 하나님이 펼친 대자연 속에 한자릴 차지하게 하면 테이프가 다시 되감겨 아름다운 소릴 내듯 되살아난다.


그래서 그가 앉았기에 자리가 살아난다고 믿은 것이다
. 그런 사람 중 나이 지긋한 영감님이 그의 성을 물었다. 신통하게 자신을 그려준 솜씨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자넨 성이 뭔가?”


성이라니오.”


이름씨 말이야. 김씨, 이씨, 박씨 하는···.”


, 그 성씨요. 전 고갑(高哥)니다.”


고가? 높을 고구먼.”


노인이 여기까지만 물은 건 자신을 그린 스케치 부분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무료해서 해본 말이었다
.


자신의 얼굴을 또르르 감아 건네자 노인은 구겨진 천원권 석 장을 던지고 느적느적 걸어가 버렸다
. 그림 그리는 걸 이제껏 구경하던 단발머리 여학생이 묻는다.


아저씨, 이름은 뭐예요?”


이름? 그런 거 없는데···. 이제까지 써본 적 없어.”


단발머리가 다가붙었다
.


그럼 로 하세요 아저씨. 좋을 호. , 높은 게 좋다는 고호. 외국화가 이름에도 반 고흐가 있잖아요. 우리나라 이름엔 란 말을 쓰지 않으니 가 좋아요. 높은 게 좋다는 고호. 궁합이 딱 맞죠?”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 자신이 스케치한 그림 하단에 염소 똥만한 이니셜을 그려 놓았다
. 그게 고호였다. 그날 이후 그의 이름은 알게 모르게 고호로 통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사내
, 고호는 비록 이곳에서 인물 데생을 하지만 딱 하루에 다섯 사람뿐이다.


다섯 사람을 그리면 화구를 걷고 묵상에 잠기거나 품속에 깊이 넣어둔 메모지를 꺼내 글씨가 닿도록 읽고 또 읽는 것이었다
. 곁눈질로 살펴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
당신의 메모를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당신이 그린 내 얼굴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당신의 열정이 사실이라면, 정녕 당신이 나에게 청혼하려면 10만원권 화폐 도안 응모에 최우수작으로 당선돼야 합니다. 그것도 이번 응모에 말입니다.>


너무 짧은 기간이지 않느냐 하지만 처녀 나이가 시집갈 때가 됐기 때문이란 점에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


그가 자신의 생각에 흐트러짐이 오면 찾아가는 곳이 육상궁 영역이다
. 비록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지만 근처를 서성대면서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는 게 그에겐 휴식일 수 있었다.


이곳 가까이 냉천정이 있었다
. 효성이 극진한 영조가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가련한 어머닐 위해 묘()를 세웠다. 다시 말해 냉천정은 육상궁의 재실(齋室)인 셈이다.


영조는 이 집에서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며 제사준비를 했다
. 그래서 전해오는 얘기가 많다. 나는 그곳 가까이에서 만난 고호에게 그 얘길 들려주었다.


이 건물엔 영조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같은 책을 보면, ‘영조49년에 영조의 초상화 2벌과 초본 1벌을 봉안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곳엔 세 벌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었네.”


우연히 그를 만난 것이지만 조선 임금의 초상화에 대해 들려줬다
. 조선 임금의 초상화는 일제강점기에 분실되고 또 육이오 때 타버리고 이렇게 저렇게 없어졌으니 얼마 남지 않았다. 유달리 영조의 것만 남아있는 건 이렇게 가외(加外)로 봉안된 곳이 있기 때문이란 설명에 고호는 고갤 끄떡였다.


그가 놀란 것은 나의 다음 말을 듣고 나면서였다
.


이보시게. 영조의 어진(御眞)을 매일 접하고 사는 걸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내가 아는 바론, 천원짜리 지폐에 나와 있는 퇴계 이황의 얼굴이 이에 관련되네. 도안을 할 때 퇴계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한 화가가 영조 얼굴을 바탕으로 적당히 변형시켜 그렸다는 소문이 있네.”


예에?”


어디 그뿐인가, 만원권의 세종 초상과 오천원권의 율곡 초상도 가짜지.”


그게···.”


나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웃기는 일이잖아. 전 세계에 가짜로 만든 초상화를 가지고 돈을 만든 나란 우리밖엔 없을 거니까.”


도안을 누가 했는지 고호가 물었다
. 나의 답변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만원권은 고 김기창 화백이, 오천원권은 이유태 화백이, 천원권은 이종성 화백이 그렸지. 이들은 어진 마지막 화가였던 김은호 화백에게 수학했거든. 전통 영정기법을 전수받은 몇 안되는 인물인 셈이지. 그들 세 명이 모이면 우리들은 만육천원이다고 우스갯소릴 했다고 전하네.”


그 말을 끝으로 헤어졌다
. 그가 이곳에 온 건 우연이지만 세상은 묘한 쪽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일제시대에 독립군들을 잡아 혹독하게 죽이고 일제에 빌붙어 재산을 축적했던 자들이 보수를 자청하며 친일파들을 비호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얼마전 오만원권에 허난설헌 초상화를 올리고
10만원권에 김구를 올리려 했지만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오만원권은 시행됐지만 김구의 10만원권은 중지된 것이다.


고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 지금은 때가 아니지만 언젠가 좋은 시기가 오면 자신의 그림이 힘을 얻을 것이라 믿었다.


어린이 책에서도 봤지 않은가
. 거짓말 하는 나라에서 진실을 말하면 그 역시 정신병자가 된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고. 그렇기에 고호는 입을 앙다물고 10만원권 화폐에 김구 초상화를 도안할 계획을 하나하나 다져올렸다.


이윽고 정권이 바뀌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다 죽음을 맞이한 김구 선생이
10만원권 화폐의 도안으로 선택되자 고호는 그동안 준비했던 걸 당당히 응모해 최우수작을 거머쥐었다.


소식을 들은 여인이 한달음에 달려와 그를 축하하고 혼인을 승낙하자 더할 나위없는 기쁨에 들떠 세차게 끌어안았다
.


~!”


그가 눈을 떴을 때는 팔레트 물감 옆
, 페트병을 반으로 토막낸 물통의 물이 세차게 끌어안은 바람에 상의와 얼굴에 튀어 범벅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세상은 바뀌지 않은 그대로였다.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김구 선생을 도안할 날이 올 거야. 그 날이···. 그 날을 위해 나는 지금부터 준비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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