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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국화야, 국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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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국화야, 국화야!
2011-08-02     프린트스크랩

산굽이를 껴 돌아서면 흐르듯 나앉은 암반 아래 산지기 노인의 낡은 모옥(茅屋)이 있었다. 어린시절 성묘 길엔 으레 부친의 손에 이끌려 오르내리던 길이어서 쉰을 한참이나 넘긴 지금, 좁고 가는 길을 따라 마음은 추억의 모서릴 아련히 떠올리게 한다.

교통사고로 처자를 빼앗기고 강씨 선산에 들어온 후 문중에서 보내준 곡물로 생계의 일단을 구하는 처지지만 노인의 크고 깊은 두 눈에 밴 아슴하고 비밀스런 우수는 어린 나에겐 무척 신비로웠다.

 

아마 30여년쯤 저쪽이었을 것이다. 학생운동이다 데모다 하여 앉은 자릴 메우지 못하고 떠돌았을 때 얼마간 노인과 기식(寄食)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11월이었을 것이다.

가을밤의 정한(情恨)이 이가 시리도록 서리되어 내리는 밤, 소나무 가지를 엮어 맨 평상(平床) 위에 조그만 단지 하나를 놓고 노인은 나를 손짓해 불렀다.

 

“감국(甘菊)이라고 들어 봤나?

 

“국화 말인가요?

 

“황국(黃菊)이라고도 하지. 봄의 매화를 매만지던 손끝이, 모란의 화사함에 깃들다 가을이 오면 청명한 자연을 맘껏 흠향한 오상고절의 꽃 국화를 만나네. 설상화(舌狀花)라고 하던가···.

 

별자리를 찾는 시선이 허공에 매달리다 오뇌를 빗살무늬 토기처럼 여리게 빚은 것 같은 이마의 주름을 가녀리게 훔치던 노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간 모옥 주위는 온통 국화 일색이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여길 찾는 손()이 없었지. 사냥꾼이 쏘아대는 불새 때문에 산이 새 소릴 잃어버렸어. 부질없다 생각하면서도 한 움큼의 국화 씨를 적막강산에 뿌려뒀는데 자네가 날 찾듯 오늘밤도 찾아 왔구먼.

 

세속을 벗어난 거사처럼 노인은 얼굴 가득 단아로움을 띄고 나에게 한 잔 감국주를 권했다.

 

“이백(李白)은 한 잔 술이 큰 길로 통하고 한 말 술이 자연으로 통한다는데,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 같은 사람들에겐 어울리지 않은 말이지.

 

쫓긴다. 무엇에 쫓기는 것일까? 나의 문학이 생선의 내장처럼 부식되고, 나의 건강이 아는 듯 모르는 듯 역류에 발을 담그고, 배꼽 아래 한 뼘쯤 되는 곳에 달랑대는 나의 잠지를 내려다 볼 쨤도 없는 시간을 나는 왜 사랑해 왔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마음의 여유라는 게 뭔가? 그런 게 없는 건 예나 제나 마찬가진데 가늠할 수 없는 노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림판에 공명하는 건 무슨 연유일까? 노인이 문득 이백(李白)의 ‘산중대작(山中對酌)’을 읊조린다.

 

두 사람이 대작 하노라면 산에는 꽃이 피누나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내가 취해 잠들려 하니 그대는 돌아가시라

내일 아침 생각이 있으면 거문고를 안고 오시라

兩人對酌山花開

一杯一杯復一杯

我醉欲眼君且去

明朝有意抱琴來

 

달 밝은 밤엔 좋은 안주가 없다 해도 감국주를 펼치면 그것만으로 좋다는 노인이었다.

 

“온 산에 국화 향기 차고 손 가까이 한 단지 술이 있으니 바둑이나 한수 두어봄세.

 

노인과의 바둑은 세 판이면 끝난다. 한 번 더 두어보자고 해도 막무가내로 고갤 젖는다. 투박한 잔 속의 남은 술을 비우던 노인의 중얼거림이 들려오는 것 같다.

 

“세상이 변했어. 아니 빠르게 변하고 있어. 부끄러움을 모르고 그것을 낡은 훈장처럼 자랑스러워하는 자들도 많아졌어. 이젠 미쳐가는 거야. 주색에 미치고 땅 투기에 미치고 스스로의 거짓말에 미치고 자식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부정과 편법을 자랑하는 이 세상이 미친 거야. 슬픈 일이네, 참으로 슬픈 일이네.

 

해마다 가을이 오면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때는 육자배기와 굿거리장단에 흥그러워졌을 노인의 목소리가 애잔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올해의 상강(霜降)에 갈 수 있으려나.

그날 노인의 묘소에 들려, 국화가 널브러진 늦은 밤 육자배기 장단에 맞춰, 나의 ‘산중신곡(山中新曲)’의 피리 솜씰 들려줘야겠다. 깊이 잠든 노인의 혼령이 깨어나 덩더꿍 덩더꿍 자진머리 가락에 꺼떡쇠 춤이라도 흥겨이 출 것이다.

 

“아, 국화야, 국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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