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태후가 화를 삭이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걸 설약사는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볼 뿐 희망적인 말은 보태지 않았다. 이제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태후고 보니 자신의 권도(權刀)를 빼앗긴 아쉬움이 가슴 한복판에 응어리져 몇 겹이나 파문을 그려냈다. 당신의 아들 진흥왕이 요망한 미실을 후궁으로 앉힐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게 원화(源花)가 되고 새주(璽主)가 돼 권세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는가.

아드님 진흥왕이 미운 게 아니었다. 고것들 대원신통의 부스러기들이 미운 것이다. 고양이가 급히 쥐를 쫓으면 어찌 되는가. 나를 잡아드시오 하는가? 아니다. 어차피 죽을 바엔 일전불사(一戰不辭)를 외치며 기회를 노릴 것이다. 일단 설약사를 믿었으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던 댕견 주인놈은 나타나지 않고 달갑잖은 소식만 전해졌다. 백제군과 대치해 있는 변경에서 6세 풍류주 세종 전군을 미실이 ‘원화’의 신분으로 호출한 것이다.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를 모르는 세종 전군이었지만 월성에 당도해 보니 믿기지 않은 말들이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전군마마, 미실이 요망한 수로 원화가 되고 새주가 됐습니다. 전군마마를 만나시면 풍류주 자리를 빼앗으려 들겁니다.”

“···.”

“마마!”

“그 자린 그 사람이 내게 준 게 아닐세. 대왕마마가 나에게 준 것인데 어찌 미실이 원한단 말인가.”

그러나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미실은 자신이 원화가 된 것을 먼저 끄집어냈다.

“전군마마는 어떤 생각이십니까. 변방에 나가 병사들과 생활하니 우울한 마음이 다소나마 트입니까? 월성에 있으면 잡다히 신경 쓰는 게 많아 내 전군마마를 뵙자 했습니다. 모든 일은 다 알고 계실 것이니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지요.”

“말씀하세요.”

“내가 왕비마마처럼 진골정통이 아닌지라 한때는 섬기던 지아비를 굶어죽게 한 죄가 큽니다. 권세 있는 자들은 그게 대수냐 하겠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원통한 심정을 알 수 없지요. 한때는 그 분의 며느리가 되어 월성에 있었습니다만 나를 쫓아내지 못해 안간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안···하오.”

“오호호호호! 공치사 듣자고 한 말이 아닙니다. 있는 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전군마마야 쇤네를 끔찍이 아껴주셨지 쇤네에게 서운하게 대한 건 태후마마셨습니다. 쇤네는 그랬습니다. 나는 몸 파는 상녀(商女)는 아니지만 조그만한 힘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

“전군마마, 내  마음이 어쩔 것 같습니까. 지금은 대왕을 섬기지만 한때 전군마마를 섬겼으니 잔정이라도 있으리라 보십니까? 서운한 건 다 버리고 즐거운 기억만 있으리라 보십니까?”

“미안하오.”

“오호호호! 미안하다니오, 그 무슨 말씀입니까. 진골정통의 피를 받은 왕가의 자제분께서 하찮은 쇤네에게 미안하다니오!”

“지난 얘긴 하지 말고 원하는 걸 말하시오. 이젠 원화가 되고 왕후마마와 맞먹는 실권이 있으니 원하는 게 있을 것 아니오.”

“쇤네의 청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들어주리다. 말씀하세요.”

“그럼 원화로서 말하겠어요.”

“?···.”

“태후마마께서 준정이 사고 치자 원화를 폐기하고 화랑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화랑도를 육성시킨다기보다 당신의 세를 불리기 위한 방편이었어요. 태후께서 가까이 한 장수에게 병권(兵權)이 있음을 기화로 치맛폭으로 감싸 내 사람을 만들었잖습니까.”

“···.”

“그건 도리로 보아서도 합당치 않고 논리적으로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태후마마의 처지가 이상하게 되어가자 그런 말을 했지요. 신국(神國)을 건설한다고요. 신국이 무엇입니까. 권세를 잡기 위해 힘있는 자를 색(色)으로 엮는 것 아닙니까?”

더 이상 듣기가 거북했는지 세종 전군은 미실의 말을 끊었다. 태후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장수들을 끌어들인 증거가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힘 있는 이사부(異斯夫) 장수를 치맛폭으로 감싼 덕에 세종 전군이 태어났다.

그것은 비밀이랄 것도 없었다. 월성의 모든 남녀가 다 아는 현실이었다. 그것을 굳이 들출 이유가 무언가? 원하는 것만 말하면 되지 않는가. 세종 전군의 낯이 이지러지는 걸 보며 미실은 한 걸음 물러났다.

“전군마마께서 풍류주 자리에 오르신 지 고작 한 달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그만두라는 건 아닙니다. 올해 남아있는 기간 동안만 그 자리에 있어 달란 것이지요. 그렇게 해야 병부(兵部)에서 보더라도 이상이 없다 여길 것이니 한해가 다 가는 섣달에 풍류주를 쇤네에게 넘기십시오.”

“나는 학문을 좋아했지 병권은 머리카락 한 올 만큼도 욕심이 없습니다. 언제든 풍류주를 가져가시오.”

세종 전군은 벌떡 일어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고맙습니다, 서방님.”

‘서방님?’

그 말이 의외였던지 전군은 한동안 서 있는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상녀(商女) ; 몸 파는 여자

▲이사부(異斯夫) ; 세종 전군의 부친

▲오행을 나타내는 도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