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정을 부리는 동륜태자를 달래는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사도왕후가 태자에게 그런 약속을 했으니 이제 와 되물릴 수도 없었다. 그게 미실이란 특별한 여자인 경운 더욱 그러했다. 방법은 역시 그녀가 내놓았다.

“태자마마, 쇤네가 대왕을 뫼신 것은 여기 계신 왕비마마와 왕실의 평안을 위해섭니다. 태후께서 진골정통임을 내세워 대원신통인 왕후마마를 쫓아내려 계책을 꾸몄기에 쇤네도 죽기를 각오하고 대항하는 편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태자 저하께선 이해할 수 없다 하오나 왕후마마가 쫓겨나시면 저하의 입지도 곤궁해 지옵니다.”

“···.”

“그걸 막기 위해 쇤네가 대왕마마를 뫼시게 됐습니다만 그런다고 모든 일이 다 끝난 건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소.”

“그럴 겁니다. 쇤네가 대왕마마께 말씀드렸으나 처음엔 대왕께서도 월성의 상황을 믿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준정의 장난으로 남모공주가 목숨을 잃자 지소태후는 원화를 폐하고 화랑을 육성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권도(權刀)가 태후마마께 돌아가 대왕의 연치 서른둘인 데도 별다른 실권이 없습니다. 그 이윤 화랑이란 집단의 풍류주가 세종 전군이기 때문입니다. 저하께서도 알다시피 그 분은 태후마마가 이사부(異斯夫) 장군을 가까이 해 얻으신 전군(殿君)마마십니다. 겉으론 모든 왕권을 대왕마마께 뺐겼다고 하나 화랑의 풍류주가 그 분 자식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되겠지요.”

“그래서 나 보고 아뭇소리 말고 물러나라는 겁니까?”

“아닙니다, 저하. 저도 저하를 몹시 은애합니다.”

태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입에 발린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실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표정이 크게 변했다.

“저하, 지금 제 뱃속엔 저하의 씨가 자라고 있습니다.”

“뭐요?”

“새로운 생명이 잉태됐는데 왜 대왕마마를 따르냐고 하겠지만 쇤네가 대왕을 움직이지 않으면 저는 물론 저하의 어머니 왕비마마께서 궁에서 쫓겨나거나 곤욕을 치르옵니다. 쇤네는 우선 그것부터 막아내 아이가 편안히 자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할까 합니다.”

상황이 바뀌자 태자는 자신이 해야 할 방법을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인지에 대해 미실이 이미 준비해놓고 있었다.

“쇤네가 대왕마마를 뫼시게 됐습니다만, 가까이엔 태자 저하가 계십니다. 저하께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시어 만호공주를 안심시켜야 합니다. 그리해야 태후마마가 다른 계책을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미실 낭주가 부왕을 섬기면 나와 만나긴 어려울 게 아니오?”

“그렇지요, 어렵겠지요. 그러나 양쪽 손가락을 펼쳐 서너 번은 저하를 뫼실 수 있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 보명궁에 준비할 물건이 있습니다.”

“뭐요?”

“갭니다. 주인의 말에 복종 잘하는 개를 한 마리 키워 외부인이 엿보는 걸 차단시켜야 합니다. 쇤네는 그것을 준비하라 일러뒀습니다. 아마 10여 일이면 당도하리라 봅니다.”

동륜태자는 비로소 안도하는 눈치였다. 미실이 보명궁에서 개를 키운다는 건 외부인이 들어오는 걸 막으려는 의도지만 달리 생각하면 자신과 비밀스런 사랑놀이를 즐기려는 것으로도 이해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태자!”

“예에, 어마마마.”

“이제 오해가 풀렸습니까. 나는 궁에 있으며 한시도 안심한 적이 없습니다. 편안하다는 게 사치스런 말이지요. 왕실에 들어와 아드님을 셋이나 생산했지만 태후께선 내가 대원신통이란 이유로 쫓아내려 했습니다. 어느 왕실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소.”

“···.”

“태후께서 자신의 힘을 키워 치세(治世)를 늘이고자 움직이는 것을 나와 미실 낭주가 먼저 알았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태자 얼굴도 보지 못할 뻔했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그런 이유로 이런 일이 생겼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예에, 어마마마.”

“또한 이곳 보명궁은 태후마마의 눈길이 가장 많이 와 닿는 곳입니다. 한마디 말이나 몸 한 번 잘못 움직여도 어느 틈에 태후의 촉수들이 접수합니다. 그러니 이곳을 출입하는 일 역시 각별히 날을 정해 출입하도록 하세요.”

“예에, 어마마마.”

“오늘은 이곳에 있어도 됩니다. 멀리 수(隋)나라에서 사신이 당도해 천보노(千步弩) 만드는 기술자를 보내달라는데 어찌 답을 한지 궁금합니다. 정작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거란 말이 떠도는데 그게 사실인 모양입니다. 이보세요, 태자. 이젠 <무경칠서(武經七書)>를 가까이 두어 병략을 공부해야지요. 여인은 바람이며 달과 같습니다. 멀리 떨어져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가까이 하면 실망하기 마련입니다. 이제라도 학문에 진일보하세요.”

▲전군(殿君) ; 아버지의 씨가 다른 형제

▲천보노(千步弩) ; 천 걸음이나 나가는 신라의 활

▲무경칠서(武經七書) ; 병략을 다룬 일곱 가지 책

▲황금옥대 ; 임금의 옥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