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개주경(湯開酒莖)’. 왜 이런 말을 사용한 것일까. 온천수(溫泉水)에 몸이 익은 여인의 몸은 수밀도(水蜜桃)다. 한 입 콱 베어물면 좋을 만큼 싱싱하고 선정적이다. 훗날 양귀비(楊貴妃)를 화청지에 집어넣고 현종은 목욕하는 그녀 모습을 보며 ‘탕개주경’이라 했던 것처럼 욕조에서 나온 여인은 은밀한 게 있다는 느낌이 강한 모습이다.

미인을 옆에 끼고 술을 마시고 싶어진 것일까? 진흥왕은 책자 속에 숨은 즐거움을 눈으로 확인하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여름이 가까운 하늘엔 곳곳에 구름의 행렬이 보기에 좋았다.

신라에선 두드러지게 발이 작은 여인을 선호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신 행렬이 중원을 다녀오면 보지 못한  물건이 메뚜기처럼 튀어나와 구경하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달포 전엔 수(隋)나라를 다녀온 병부(兵部)의 관원이 그런 얘길 했었다.

“대왕마마, 지금 수나라는 이웃나라를 공격하려 형제의 의를 강제로 맺는다 하옵니다.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군신지간(君臣之間)을 맺으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보아 머지않은 날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보이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전쟁이라니?”

“고구려가 신하로서 조공(朝貢) 하라는 것은 명장(名將)과 효장(驍將)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라도 고구려를 들쑤셔야 긴장할 게 아니겠습니까. 돌아오는 길에 진(陳)나라에 간 스님을 만났는데 천하가 소란스러워도 여전히 진숙보(陳叔寶)는 미인들을 궁정에 모아 잔치에 여념없다 하옵니다.”

사신의 보고는 만약을 위해 군비(軍備)를 강화하고 미인들을 가까이 하는 게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진흥왕으로선 전연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제 사내로서 시들은 힘을 빳빳하게 만들었으니 은근하고 짭짤한 묘미는 지금부터라는 생각이었다. <음사(淫辭)>란 책자에도 그런 말이 있잖은가.

‘무풍불기랑(無風不起浪).’

바람이 없으면 파도가 일어나지 않는다. 사내가 여인과 은밀하게 노는 게 ‘바람피운다’고 떠든다. 바람을 피울 땐 파도의 움직임처럼 겹으로 2층을 쌓고 요란을 떤다. 한차례 폭풍이 몰아치듯 일렁이는 파도는 사그라지지 않는 수파(水波)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현녀경(玄女經)>엔 ‘장강(長江)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치는 모습을 순수추선(順水推船)이라 했던가.

물거품을 만드는 바다처럼 하늘은 구름을 만들어내고 바람이 불어와 그것들을 자꾸만 서쪽으로 쓸어가 버린다. 무심히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진흥왕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양 사도왕후는 입을 열었다.

“낮에 태후마마가 남당(南堂)에 들르셨다지요. 진종 전군의 자식을 병부에 넣어 달라 했다지요?”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신첩이라고 목석이겠습니까. 흘러다니는 소문은 듣고 있지요. 진종 전군의 아들이 가야 정벌에 출정 중이니 돌아오는 대로 소사(小舍) 자리 하나 주라는 건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겠지요.”

“그것까지 아셨습니까.”

“마마, 태후마마가 왕궁에 금단전(金丹殿)을 만든 건 젊은 계집들의 향음(香淫)으로 중신들을 손에 넣을 계획이었습니다. 미실에 의해 계획이 차질이 생기자 이젠 병권이나마 손에 넣으려 안간힘입니다.”

“그래서요?”

“맹독(猛毒)을 가진 독물은 서두르지 않고 기회가 오길 기다리지요. 절대 서둘지 않습니다. 자신의 독 이빨의 용도를 잘 아니까요. 그런 걸 보면 태후마마는 아직 독이 오르지 않은 모양입니다, 서두르는 건 믿음이 가는 물건이 적기 때문입니다. 마마. 신첩이 이런 말을 하는 건 태후마마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그건 무슨 이윱니까?”

“왕실의 화평은 상대의 허물을 따지고 짓눌러선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욱이 태후께선 이사부 장군 사이에서 출생한 세종 전군을 끔찍이 총애하니 우선은 그를 중직에 올리고 태후의 청을 가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왕후께 무슨 득이 있습니까.”

“신첩은 마마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 무한한 행복을 느낍니다. 왕실이 소란스러워 중신들의 이맛살을 찌뿌리게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요. 세(勢)를 잃은 태후마마에게 병부의 끈을 쥐어주는 것도 괜찮겠지요. 마마께선 그것을 섣불리 결정해선 안 되지요.”

진흥왕은 매듭이 풀릴 것 같은 얘기가 자꾸만 꼬리를 말아감자 아예 왕후에게 방책을 물고 늘어졌다.

“왕후의 고충과 일의 형편에 대해 웬만큼은 압니다. 궁안 일이라면 나보다 왕후가 더 아는 것도 이해합니다. 그러니 좋은 생각이 있으시면 말씀해 보세요. 내 왕후의 의견을 따르리다.”

“친정(親政) 체제에 들어섰으니 우선은 제왕의 언어를 쓰셔야 합니다. 태후마마가 그렇게나 꿈꾼 신국(神國)의 완성을 위해서지요. 이전엔 마마께서도 기(氣)가 약해 대왕의 잠자리 시중에 들어온 여인들의 웃음거리를 샀으나 지금은 여느 사내와 다름없는 몸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이참에 태후마마의 청을 일부라도 들어주되 그 대신 태후마마가 밀교의 수법자 연화사(蓮花師)에게 일러 받은 비급(秘笈)을 달라 하십시오.”

그 말에 진흥왕은 깜짝 놀랐다. 남당을 찾아온 지소태후는 어떤 생각에선지 그런 말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주상, 나에게 힘을 주셔야 합니다. 이제 실권이 없는 왕실의 암호랑이지만 세상 이목이 거슬리는 것은 나이 탓만이 아닙니다. 주상이 나의 뜻을 받아들여 진종전군의 자식에게 소사(小舍) 자리를 주고 세종 전군에게 병부의 작은 권한이라도 준다면 어미로서 그 고마움을 어찌 마음자리에만 담아두겠소. 주상이 남도(南桃)에서 연회를 열 수 있는 비방을 일러 주겠소.”

▲ 탕개주경(湯開酒莖) ; 욕탕에서 금방 나온 미인을 가리킴

▲ 소사(小舍) ; 지금의 소대장 직급

▲ 남당(南堂) ; 진흥왕이 정무를 보는 곳

▲ 옥대(玉帶) ; 왕이 입는 조복의 옥대 앞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