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마마가 융명(戎明)을 전군의 처소에 들라했는데 피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전군께서도 그 점은 받아들여야지요.”

“마음이 통하지 않은 융명 낭주를 내 거처에 들이라는 말입니까. 정이라곤 한 톨도 없는 계집을 태후마마의 명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란 것입니까.”

“싫으신가요?”

“싫습니다. 어찌 사람으로서 아무 잘못도 없는 내자(內子)를 쫓아내고 진골정통이란 이유만으로 받아들인다면 월성의 뜻있는 사내들이 무어라 하겠습니까. 제 어미의 기세에 못 이긴 척 따라갔다지 않겠습니까.”

이번 일은 모든 걸 처음부터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했는지 진흥왕은 사도왕후가 하는 양을 지켜볼 뿐 다른 말은 없었다. 사실 그렇다. 며느리가 미워 내쫓았다는 데 신라의 제왕이라지만 끼어들어 노기를 가라앉혀 달랄 수 있는가.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왕후가 건넨 <음사(淫辭)>라는 책자를 심각하게 보는 척 하며 귀만 열어놓은 상태였다. 사도왕후가 다그치듯 찔러갔다.

“부부의 사랑이 뜨겁고 크다지만 태후마마의 노기가 하늘을 따 담을 지경인데 어쩌란 것입니까. 내가 대왕의 왕비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기회가 있다 한 것은 쉽지 않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일이 어렵더라도 전군이 한다 했으니 그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전군의 처소에 융명을 들여보낸 태후마마는 안심하고 있을 것이니 전군으로서는 가장 난처한 상황에 빠진 겁니다. 그렇지요?”

“예에, 왕후마마.”

“그러니 협상을 해야 합니다. 아니 협상을 유도하려면 전군이 죽어야 합니다.”

“예에, 내가 죽어요?”

“진짜로 죽으라는 게 아닙니다. 죽는 척 하라는 거지요. 이레 남짓 식음을 전폐하되 어느 누구든 전군이 누워있는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세요. 하루 이틀 가는 것은 그러려니 하겠지만 닷새가 넘으면 시비(侍婢)들 쫑알거림이 태후마마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평소에도 옥진궁주를 미워했는데 그녀가 세상을 뜬 후 손녀딸 미실까지 미워해 쫓아냈다는 소문이 돌지 않겠습니까.”

“그래서요?”

“게다가 진종 전군의 딸 융명(戎明)을 불러들인 게 미실을 쫓아내기 위한 방책이라 알려지면 태후마마 처지가 온전하게 보일리 없겠지요. 왕족과 귀족들도 지나친 처사라고 수군거리지 않겠소. 게다가 전군께서도 여러 날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면 유달리 정이 많은 태후마마께선 방법을 찾으려 허둥대겠지요.”

“내가 닷새 넘게 굶을 수가 있을까요?”

“이보세요 세종전군. 미실은 아무 죄 없이 쫓겨났습니다. 그 사람을 불러올리는 일인데 죽기를 각오하고 이레 남짓 굶으라는데 그게 어렵습니까. 태후마마는 대왕이 어릴 때 섭정 자리에 올라 수렴청정했어요. 그렇다보니 상대가 어떤 수작을 부리는지 훤히 알아봅니다. 굳이 소문을 내지 않아도 전군의 행동은 머리털 하나 숨길 게 없이 태후마마에게 알려져요. 그러니 짧은 생각에 허기를 면하고자 야참을 준비시키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배고픔이 오더라도 쫓겨난 사람을 위해 이를 악물고 참으세요. 먹는 물도 마시지 마세요. 갈증을 면하려 물을 마시면 허기 때문에 많이 마시게 돼 오히려 얼굴이 붓습니다. 한 모금의 물이라도 남들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입에 넣고 오랫동안 씹어 먹어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그렇게 해야 남달리 세종 전군을 생각하는 지소태후의 의심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세종 전군이 아랫배에 힘을 주고 결심을 한 채 물러가자 진흥왕은 <음사(淫辭)>라는 책자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문을 열었다.

“중원에선 목욕탕에서 갓 올라온 여인들이 별미(別味)라고 써 있습니다. 왕후는 어찌 생각하시오?”

“신첩을 그런 자리에 부르는 제왕이 없으니 어찌 알겠습니까. 월성의 사내들은 나이 열넷의 홍상미판(鴻潒未判)만 좋아하지 다른 덴 관심이 없잖습니까. 허리가 가늘고 발이 작은 계집을 한 손에 안고 애완동물 먹이 주듯 희롱하길 좋아합니다. 태후마마가 왕족과 대신들의 첩으로 훈련시키는 금단전(金丹殿)의 처녀들도 한결같이 허리가 가늘은 세요미인(細腰美人)이란 소문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미인에 대한 평가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수(隋)나라 이전 중원은 발이 작고 허리가 가늘은 미인을 으뜸으로 친 게 사실이다. 전한(前漢)의 성제(成帝)는 비연(飛燕)과 합덕(合德)이란 자매를 총애했었다. 그 총애가 얼마나 지극하고 요란했던지 <비연외전(飛燕外傳)>에 소설로 표현되어 후세에 전한다.

성제가 이들 두 자매를 총애한 것을 ‘탕개주경(湯開酒莖)’이라 했다. 여인이 목욕탕에서 발그레 달궈진 몸으로 나타나면 그 어지러운 모습에 술의 뿌리가 일어선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진흥왕은 책을 읽으며 스스로의 몸이 끓어오르는 유쾌한 기미를 느꼈다. 대왕 역시 사도왕후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실에서 발가벗은 채 나오기를 상상으로 기대한 것이다.

▲ 융명(戎明) ; 진종 전군의 딸로 세종 전군의 차비(次妃)

▲ 탕개주경(湯開酒莖) ; 중원의 사내들이 가장 으뜸으로 여기는 색사로 목욕을 끝내고 나오는 여인을 사랑하는 일.

▲ 방사를 하면서 옥 부엉이를 놓아두는 것은 잠을 자지 않고 지켜준다는 믿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