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은 득달같이 월지궁의 사도왕후에게 전해졌다. 세종 전군의 부인이니 태후에겐 미실도 며느리다. 미색이 뛰어나 아들이 반한 상태였기에 태후는 그녀를 이용해 왕실을 거머쥐려는 미인계(美人計)를 생각했었다. 아랫도리가 단단한 중신들을 움직이려면 무엇보다 미색이 빼어나야했다. 사내들이 그렇잖은가. 제 꼴상은 생각지 못하고 그저 인물이 반반한 여인에게 개침을 흘리는 게 신라 귀족이며 중신들이다.
신라 사내들은 정묘년(丁卯年)이나 정묘월(丁卯月) · 정묘일(丁卯日)에 움직이는 걸 싫어한다. ‘정묘’라는 글자가 주는 의미 때문으로, 정(丁)이란 날카로운 못이나 송곳과 음이 같은 정(釘)이다. 사내의 힘을 나타내는 난(卵)은 고환을 의미한다. 송곳을 사용해 알을 터뜨리면 난(卵)은 어느새 묘(卯)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정묘년이나 정묘월, 또는 정묘일엔 사내를 충동시키는 일을 삼가는 게 서라벌 풍속이었다.
진흥왕이 조루(早漏)로 모든 일에 즐거움을 잃었을 때 지소태후는 군(軍)의 총사령관 이사부 장군과 비장(裨將)들을 색으로 엮어 수렴청정의 기간을 연장해 왔었다. 자신의 치정기간(治政期間)을 더욱 늘일 생각이 있었기에 남도(南桃)의 연회를 열 때에도 태후의 뇌리 속엔 지워지지 않은 음모의 줄기가 살아 있었다.
‘세(勢)라는 건 힘이야. 어정쩡한 치세 기간엔 단숨에 밀어붙이는 힘만이 살아남지. 그래서 강노지말(强弩之末)이란 말이 있잖은가. 강한 활도 그 마지막엔 스스로 세를 잃고 힘없이 떨어지듯이 정치의 세도 마찬가지야. 앞으로도 이사부 장군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나의 세도 힘을 잃겠지.’
지소태후는 일단 사다함을 불러올려 미실과 다시 맺게 하고 그 틈을 노려 요망한 죄상을 덧씌워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 확인하듯 장애물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차질이 온 것이다. 왕권이 회복되어 조정의 주요자리가 왕의 측근들로 짜여졌으니 중신들을 움직여 자신의 치세를 늘이는 건 쉽지 않게 된 것이다.
‘흐음, 당분간은 삐꺽대겠지. 실권이 주상에게 넘어갔으니 내가 바로 움직이는 건 옳지 않아. 당분간 왕실의 흐름을 주시하며 핑계거리를 찾는 거야. 가만, 그러는 게 좋겠어. 주상이 사내의 힘을 찾았으니 금단진전(金丹眞殿)에 있는 상음(上淫)의 계집을 이용하는 게 좋겠어. 진종전군(眞宗殿君)의 딸 융명(戎明)이 있잖은가. 그 아이를 만나보고 색사의 기본을 닦았으면 세종의 정실부인으로 삼아야겠어.’
이런 줄도 모르고 이제나 저제나 미실이 나오기만을 기다린 세종 전군은 태후 전각의 시비로부터 미실이 쪽문으로 쫓겨났다는 말에 몹시 놀라 허둥댔다. 마음속 불안처럼 태후의 노기는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고 이젠 어느 누구도 고약한 상황을 원만하게 돌릴 수는 없어 보였다. 자신과 사랑을 나누던 처소에도 미실이 보이지 않자 세종 전군은 태후전(太后殿)으로 달려갔다.
“어마마마, 화를 가라앉히세요. 그 사람은 아이까지 회임한 무거운 몸입니다. 그런 사람을 짐짝처럼 함부로 다루고 있으니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내가 그 아일 짐짝처럼 다뤄요?”
“그렇잖습니까. 아무리 그 사람이 어머니처럼 진골정통이 아니라 해도 지금은 태후마마의 며느립니다.”
“그래서요, 전군은 내가 그 아이에게 사정이라도 하라는 겁니까?”
“아니, 어마마마!”
“이것 보세요 전군. 사람은 누구나 아쉽게 지나간 것은 잊지 못합니다. 티벳의 고승 연화사(蓮花師)에게 많은 금백을 주고 전군을 위해 마련한 비방이 ‘옥벽’입니다. 그런데 그 요망한 것이 그걸 왕후에게 갖다줘요? 더구나 비밀의궤까지 손가락질해 삼련옥벽을 자기가 받구요? 나는 주상도 미덥지 않습니다. 제왕의 씨라지만 어려서부터 늘상 병골이었어요. 내가 선대왕과 정이 남달라 주상을 낳았습니까? 아닙니다. 정이 없었어요. 어쩌다 주상이 태중(胎中)에 들어온 탓에 내가 왕실에 머물렀지만 나는 주상보단 전군을 더 가까이 생각해요. 그걸 모른단 말입니까?”
“알고 있습니다.”
“내가 주상을 세워 요망한 옥진궁주를 몰아내고 왕업을 단단히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내 아드님에게 걸었던 희망이 있어섭니다. 그러나 그게 부질없다는 건 주상의 몸이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그 희망을 전군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어 아예 신라를 신국(神國)으로 자처한 겁니다. 지금 전군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미실 그 계집에게 혼백을 빼앗겼습니까? 그래서 요망한 것이 궁을 나가면 무슨 사단이라도 낼듯 뛰어온 게 아닙니까. 그렇잖소?”
“아닙니다, 마마.”
“전군도 내게 섭섭한 게 있을 겁니다. 한동안 정붙이고 살았던 계집이니 어찌 생각나지 않겠소. 잊으세요, 잊어야 합니다. 그 계집을 궁에서 쫓아내지 않는 한 왕실은 끝없는 분란 속에 휩싸입니다. 아시겠소, 전군?”
“어마마마, 그럴 순 없습니다. 그 사람과 나는 죽어서도 같이 묻히자는 약조를 했습니다. 어마마마는 비익조(比翼鳥)의 전설을 모르십니까?”
“오호호호호, 비익조라···. 고작 어린애 장난같은 비익조였습니까. 이보세요, 전군. 음유시인(吟遊詩人)들이 왕궁에 들어와 그런 새를 노래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새는 날개가 하나라지요. 그렇기에 날기 위해선 암수(雌雄)가 지닌 하나씩의 날개를 합쳐야 한다구요. 그래서 신라의 젊은이들도 그런 시를 열망합니까. 그렇지만 전군, 생각해 보세요. 그게 얼마나 비합리적인가를. 나는 이 참에 평생을 함께할 연리지(連理枝)같은 계집을 전군에게 엮으려 하오. 그런 줄 알고 돌아가세요.”
△금단진전(金丹眞殿) : 지소태후가 월성의 내명부에 만든 색공을 드릴 수 있는 여인을 훈련하는 기관. 왕족이나 귀족의 여식은 상음(上淫)이라 하였고 평민의 여식은 하음(下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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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
靈山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