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의 기록에 의하면 미실은 아이를 두 번째 가진 때부터 책을 저술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700권에 해당하는 양이다. 남녀의 성행위를 다룬 <색사(色史)>에서부터 중원과 삼한의 미묘한 역사는 말할 것 없고 잊히기 쉬운 문화유산까지 다뤘다.

내용 중엔 중원의 역사를 통렬하게 다루는 것도 있고 대국의 숭배사상에 젖은 이들의 시각으로 볼 땐 지나침이 있어 그들을 무조건 믿고 따르는 사대주의의 썩은 유학자(儒學者)에 의해 그녀의 진심은 존재감까지 훼손되고 만다. 그러나 이 무렵은 초창기였다.

설원랑이 협실로 들어가자 미실은 중원의 여인들에 대해 생각해 봤다. 자신이 할머니 손에서 자랄 때 중원엔 극성스럽게 사람의 길흉화복을 살피는 법술이 유행했다. 궁합(宮合)이란 것도 당시에 처음 들은 말이었다.

“얘야 중국이란 나라, 그 나라가 생기기 이전에 대국의 너른 벌판엔 은(殷)나라가 있었다. 그곳의 문화는 천축(天竺)과 마찬가지로 높은 오락과 남녀의 유희가 발달해 나랏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도 아깝게 생각하던 그런 세월이었다. 너는 그런 나라를 생각해 보지 않았느냐.”

정녕 그런 나라가 있었다면 어떤 나라였을까. 당시엔 듣고 지나쳤지만 이렇게 뱃속에 아이가 들어차니 그 모든 게 긍금했다. 중국의 ‘4대기서’를 어떤 학자는 수호전, 삼국지연의, 서유기, 금병매라지만 사람에 따라선 금병매 대신 <봉신방(封神榜)>을 집어넣는다.

서문경의 엽색행각을 다룬 <금병매>는 명나라 때의 문학이지만 방술(房術)의 격이 너무 밑바닥이라 <봉신방>으로 바꾼 것 같다. 이 책의 타이틀 제목은 <무왕벌주(武王伐紂)>다. 중국인들이 이가 시리도록 몸서리치는 주왕(紂王)은 어떤 인물인가. 얼마나 한이 깊었으면 ‘주(紂)’ 자를 아예 사전에서 없애 버렸을까. 미실의 궁금증은 그 옛날을 향해 달려간다.

주왕(紂王)은 기원전 12세기 70년대인 상은왕조(商殷王朝) 제31대 제왕 자수신(子受辛)이다. 힘은 맨손으로 범을 잡을 만큼 용력(勇力)이 빼어났는데 그에겐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중국인들이 진저리치는 하왕조(夏王朝)의 사이계(姒履癸)가 있는데 훗날 그에게 ‘폭군’이란 조롱거리로 걸왕(桀王)이라 했는데 사이계가 사랑하는 여인이 시매희(施妹喜)였다.

그가 등극한 역사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54년간 보위에 있었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었으리라. 그는 술(酒)을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사문명의 14대 후손이었다. 하(夏)라는 문짝을 단 사문명이 일어난 지 4백년이 흐른 기원전 19세기 80년대, 좀더 접근하면 기원전 1819년에 사이계가 등극했다.

긴 세월 보위에 있으면서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보좌에 오른 지 34년이 지난 기원전 1786년에 많은 군사를 이끌고 산동성 몽음현에 자리한 유시부락(有施部落)을 공격했다는 점이다.

기록연대가 확실하지 않은 시대에는 부락명칭 위에 대개 ‘유(有)’자를 붙였는데 ‘유’는 실질적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굳이 품사를 붙인다면 일종의 어조사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시부락은 시부락과 같은 말이다.

시부락은 하왕조에서 밀어닥친 수많은 군사들에 맞서 싸울 능력이 없어 멸망이냐, 굴종이냐를 놓고 중신들 회의가 그치지 않다가 시부락의 추장은 마침내 굴복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하왕조에 화평을 요구하는 대신 그들의 수중에 있는 소나 양, 마필, 미녀 등을 바쳤다. 이러한 공물 중에 시부락 추장의 여동생도 있었는데 그녀 이름은 희(喜)였다. 마땅히 사람들은 시희(施喜)라고 불러야 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매희(妹喜)라 불렀다. 무슨 이유냐 하면 그것은 추장은 귀족에 속하며, 귀족의 성은 백성들이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존귀한 성이었기 때문이다.

귀족이었지만 공물로 바쳐졌기에 시매희는 불쌍한 여자였다. 당연히 그녀에겐 인권이 없었고 한갓 포로에 불과했다. 종족의 생존을 위해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부모곁을 떠나 소나 말처럼 적의 손에 바쳐진 공물이었다.

흥미로운 건 당시 하나라의 궁엔 많은 미인들이 있었다. 능히 3천명이나 됐다는데 어찌된 셈인지 사이계는 공물로 걷어들인 시매희를 보는 순간 다른 여인들을 멀리하고 오로지 그녀만을 총애한 것이다.

총애를 받기 시작하면서 시매희의 취미도 달라졌다. 사이계가 그녀를 무릎에 앉히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반면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비단 찢는 걸 좋아했다. 그녀의 취미를 알게 된 사이계는 나라의 창고에서 비단을 내오게 하여 궁녀로 하여금 비단찢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직물계통은 귀한 데다 가격이 만만찮아 서민들로선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문제는 제왕의 부담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은 백성을 기만하기 위한 전시용이고 직접적인 고난은 어질고 약한 백성이라는 점이다. 백성들이 정성들여 짠 비단을 심심풀이 여흥으로 쫙쫙 찢어댔으니 그게 가슴 아픈 일이지 무슨 오락이겠는가. 어느 시대나 처음 시작하기가 어렵지 일단 끈이 풀리면 두서없이 일을 저지르는 게 세상사다.

시매희의 취미를 아는 사이계는 이번엔 좀더 획기적인 발상을 내놓았다. 백성들의 토목기술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기 위해 거대한 못을 만들고 거기에 술을 채웠다. 술 연못이라 부르는 주지(酒池)다.

▲색사(色史) ; 색에 대한 기록

▲봉신방 ; 중국의 4대기서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