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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주임이 찬돌을 처음 만난 것은 일 년 전 작년 여름의 일이었다. 부천에서 볼일을 보고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중에 역곡 남부 역 건너편에 있는 역곡 기원을 발견하고는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랴’ 하는 생각에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기원으로 들어가 원장에게 자신의 기력을 1급이라고 소개한 뒤에 텅 빈 기원에 홀로 앉아 신문을 보면서 적당한 상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찬돌이 기원 안으로 들어왔고 원장은 찬돌을 그에게로 보냈다. 그리고 그 때 찬돌은 그의 앞에 앉자마자 대뜸 “프로세요?” 하고 물었다.

백주임은 평소 스스로를 프로 1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서고 프로 1급이라고 알린 적은 없었으며 프로 1급이냐는 질문을 들은 적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프로 1급’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같은 1급이라 할지라도 강 1급이 있고 약한 1급이 있는데, 가끔은 강 1급을 쉽게 때려잡는 1급들도 있었고 그들은 보통 ‘꾼’으로 통하는 사람들 중에 많았다. 그리고 은연중에 그들을 지칭해서 프로 1급이라고 부르는 표현이 있었던 것이다.

백 주임은 꾼은 아니었지만 어디에서든 강 1급을 자신하는 사람들과 만나서 어지간하면 지는 경우가 없었다. 그래서 그 때까지 그는 스스로를 프로 1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처음 보는 어떤 젊은 친구가 천연덕스럽게 프로 1급이냐고 물어왔고, 백주임은 익숙치 않은 질문이라서 대충 아니라도 대답했다. 그러자 찬돌의 다음 태도가 더욱 가관이었다.

“속기 가능하시죠? 두 점 깔으세요.”

다시 언급하지만 백주임은 유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웬만해선 그는 프로 1급 맞다고 정정한 뒤에 바둑을 맞두었을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찬돌의 거침없는 태도가 신기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괘씸하게 느껴지기도 하여 그는 말없이 흑돌이 담긴 통을 앞에 가져다 놓은 뒤 흑돌 두 점을 화점에 교차시켜 놓았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백주임은 찬돌과 바둑을 두어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백 주임은 안 사장의 백돌이 들여다본 곳을 막아야 할 곳에서 손을 옮겨 우변의 백 포위망을 째고 나가자고하는 곳으로 손길을 향했다. 그리고 그가 흑돌을 내려놓는 순간 주위에서 탄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숨을 죽이고 관전하던 구경꾼들이 노골적으로 아쉬움을 드러낼 정도였으니 백 주임이 방금 놓은 착점은 속수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때 안 사장의 교만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한 수 더 놓는다고 살 수 있을 것 같나?”

그러고는 안 사장은 바로 백 돌을 집어 흑이 들여다보는 곳을 막고 있었다. 그 순간 백 주임은 왜 자신이 찬돌을 이길 수 없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한 듯했다. 그랬다. 찬돌은 상대방의 바둑을 두는 성향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고, 그러한 찬돌의 경우엔 누군가와 바둑을 계속해서 두면 둘 수록 더욱 유리해지는 것이었다.

백 주임의 귀에선 찬돌이 신이 나서 다음 주문을 쏟아내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백 주임도 이미 그 다음 수순은 잘 알고 있었다.

“됐어. 이제 백이 치중한 곳을 막고 백이 젖히면 호구되는 자리에 한 점을 집어넣어. 그리고 단수치면 내려서고. 알지?”

‘딱’ ‘딱’ ‘딱’ 흑백 간에 확신에 찬 손놀림이 지속되고 있었다. 분명히 둘 중 한 쪽은 리드미컬한 진행을 끊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게 될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백의 단수를 허용한 흑돌이 1선으로 내려서는 순간 안 사장의 손길이 딱 멈추었다.

“어? 살았네!”

“또 등장했어. 일선에 내려빠지면서 7궁이 되는 모양이야!”

구경꾼들이 탄성을 넘어서서 노골적인 해설을 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자 안 사장이 짜증스런 눈길로 돌아보았고, 구경꾼들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안 사장은 짜증을 가라앉히려는 듯 자책을 하였다.

“우라질. 두 번이나 같은 수법을 못 알아차리고.”

그리고 안 사장은 선수(先手)라고 생각되는 곳을 젖히면서 상대방의 심리를 교란시키기 위한 말 한 마디를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집 차이는 대차야!”

하지만 안 사장이 착점한 곳은 끝내기로는 큰 곳이지만 사활과는 관계가 없는 곳이었다. 우변의 흑 진영 전체를 잡기 위해 결행된 앞선 수순이 없었다면 방금의 그곳은 흑이 받아 두었을 게 분명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대차라고?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군!’ 하고 생각하며 백 주임은 찬돌의 주문을 따르고 있었다.

“좋아. 좋아. 어딘지 알지? 상중앙이야.”

찬돌이 말하는 곳은 아까 흑이 백의 치중을 허용하면서까지 상중앙의 백 진영을 삭감하려고 흑돌 하나를 놓았던 곳 근처였다. 그리고 백 주임의 새로 착수한 흑돌이 삭감을 목적으로 하였던 아까의 흑돌과 눈목(目)자 모양으로 어우러지는 순간 백의 튼튼했던 세력은 다 지워짐과 동시에 대마가 포위당하는 형국으로 변하고 있었다.

“에엑. 되려 백 대마가 몰렸네.”

“뭐야? 백이 후수 한 집밖에 없잖아.”

안 사장은 구경꾼들의 입방정을 응징할 생각도 못할 정도로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딱히 안 사장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는 구체화 된 생각은 아니었지만 지금 안 사장의 심정은 다음의 설명과 대동소이하였다. ‘바둑이란 정말 묘한 것이다. 백 대마가 흑 진영을 공격하고 있을 때는 아무 것도 아닌 수로 보이던 후방의 흑 돌 하나가 백의 공격이 무산된 뒤에는 칼날이 되어 폐부를 찔러 오니 말이다.’

안 사장은 어느 새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테이블 옆에 재떨이로 눌러두었던 수표 다발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대국 중에 여간해서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는 타입인 백 주임이 무심코 올려다보는 순간 안 사장의 그러한 모습이 발견되었다.

‘오백 만원이면 상가 임대료 받은 거 전부인데...... 젠장. 백주임 저 자식 언제부터 저렇게 수가 날카로워진 거야?’

안 사장의 그와 같은 생각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백 주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1번 모니터에 보이는 바둑판은 아까 흑 돌이 마지막으로 놓인 뒤로 계속 같은 모습이었다. 찬돌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떠들어 대고 있었다.

“크하하하. 걸려들었군. 또 한 건 했어. 안 사장이 의심이 많아서 피곤하긴 하지만 역시 왕 호구야!! 형. 정리할 수 있지? 대마 못 잡더라도 몰고 다니다보면 중앙 백 집이 몽땅 흑집으로 변하면서 열 집 이상 남을 거야. 그러니까 무조건 공격하는 돌이 뚫리지만 않게 하면 돼.”

찬돌은 말을 마치고 헤드셋을 아예 벗어버렸다. 사실 백 주임의 실력이면 안 사장 정도는 선으로도 쉽게 제압할 수 있기에 어느 정도는 믿고 있었다. 하지만 백 주임은 엮는 능력이 부족했다. 불리한 바둑으로 이끈 뒤 역전 시키려고 했다가 정말 져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찬돌은 작전실을 정리할 요량으로 방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3번 모니터에 계단 밑에서 서성이는 사내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한 명을 건물 뒤로 가라고 하는 듯한 손짓을 해서 보내고는 다른 한 명을 데리고 계단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찬돌은 아까 벗어두었던 헤드셋을 다시 집어 들고는 소리쳤다.

“형! 짭새야! 튀어!”

그리고 찬돌은 방안의 물건을 모두 내버려둔 채 옥탑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옥상을 가로질러서 건물 뒤편이 내려다보이는 쪽으로 가서 아래를 쳐다보았다. 아래엔 기원의 내실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올 수 있는 곳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뒤에 아래에서 형사들이 우악스럽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백 주임은 끝내 내실 문을 열고 나오지 않고 있었다.

“어휴. 곰탱이. 베란다로 나오면 뛰어내릴 수 있다고 했는데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찬돌의 안타까워하는 탄성이 끝나기도 전에 건물 뒷골목 모퉁이에서 어떤 사내가 막 돌아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 일행과 떨어져서 밖으로 나갔던 한 명의 형사였다. 찬돌은 얼른 몸을 숨겼다. 그리고 백 주임은 베란다로 나온 뒤에 아래로 뛰어내렸다 해도 체포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찬돌 자신만이라도 빠져나가야 했다. 찬돌은 옥탑방과 계단이 있는 쪽으로 가야 옆 건물로 뛰어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다시 옥상을 가로질러 왔다. 그리고 그 순간 찬돌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심장이 철렁하는 느낌을 느껴야만 했다. 저만치에 아까까지만 해도 찬돌 혼자 있었던 옥탑방 안에 웬 여자가 서성이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까 찬돌이 모니터에서 보았던 그 여자였다. 여자는 찬돌이 놀란 채 멍하니 서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옥탑방 안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야구모자를 벗더니 그것을 부채처럼 흔들어서 얼굴을 향해 바람을 일으키며 처음 말을 뱉었다.

“야. 날도 더운데 왜 죄는 짓고 다녀서 사람 귀찮게 하냐.”

주변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하지만 모니터가 여러 대 켜 있는 방안보다 밖의 옥상이 좀 더 밝았다. 저 아래 교차로 쪽에 대형 빌딩 옥상에 설치된 광고탑이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찬돌은 여자의 정체가 짐작이 가기는 해도 일단 말하는 게 싸가지가 없다는 느낌부터 받았다. 그러나 여자가 옥상으로 나와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자 모든 게 용서가 되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정체가 밝혀지게 될 때 느껴야 할 실망감조차 염두에 없었다.

실제로 보니 그녀의 몸매는 아까 견적을 내었던 것보다 우수하였다. 무엇보다도 아까 모니터에서 내려다보던 각도로는 알 수 없었는데 그녀는 키가 늘씬했고 하체가 상체보다 길었다. 찬돌은 어두워진 공간에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눈의 동공이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쇼트 머리를 한 그녀는 목이 길었고 이목구비가 서구형인 게 드러나고 있었다. 딱 찬돌의 스타일이었고 찬돌은 모니터 속에서 잠시 스쳐 지나갔던 그녀를 직접 다시 볼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그리고 어느 새 그의 얼굴에는 수컷들 중에 유별나게 껄떡거리는 놈들만이 지닌 특유의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러자 찬돌의 표정을 발견한 정주리 형사는 두 번 째 말을 내뱉었다.

“미친 놈.”

사랑은 종족 보존의 본능에서 비롯된 인간만이 지닌 집착이다. 이성 간에 서로를 보기를 원하고 만질 수 있게 되기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위의 요건에 해당하며, 부모가 자식을 한 없이 걱정하는 이유도 종족 보존의 본능 때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말의 사랑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찾아서 직역하자면 ‘생각의 량’이라고 할 수 있으니 반드시 사랑에 대해 냉소적으로 규정할 이유는 없어진다. 얼핏 생각의 량이 많다는 것은 곧 집착과 다르지만은 않은 의미 같지만 인간만이 지닌 관계의 다양한 경로와 수많은 사연은 결코 본질이니 본능이니 하는 단조로운 표현 안에 가둬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쉽게 말해 남녀 간에도 의리가 존재하는 법이며 정이 쌓여가는 분량만큼 식어버린 사랑을 대신할 만한 에너지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은 가정 안에서 정상적인 감성의 소통을 체험하면서 성장한 사람이라야 가능하다.

찬돌은 이번만큼은 마음에 드는 계집애를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시작부터 엇갈리게 될 운명 정도는 얼마든지 이겨낼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만일 그녀가 형사이고 그가 그녀의 손에 체포된다면, 둘 사이의 간극은 교도소의 담장이 문제가 아닌 부조리라는 이름의 심연을 메우게 될 게 분명하였다.

주리는 찬돌이 달아날 생각은 않은 채 우두커니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상대가 현장에서 자수를 하려는 듯한 모션을 취하는 것도 아닌 게 분명했다. 하는 수 없이 주리는 먼저 본색을 보이기로 작심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뒷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냈다.

찬돌은 주리가 수갑을 꺼내자 목구멍 깊은 곳에서 구역질 비슷한 게 이는 걸 느껴야 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분노였고 자신의 운명에 대한 욕지거리에서 비롯된 배설 욕구였다.

“재수 없는 년.”

그것이 찬돌이 처음 그녀에게 고백한 속내였다. 그리고 주리는 그의 황당한 고백이 너무나 진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느꼈기 때문에 잠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고 하마터면 수갑을 떨어뜨릴 뻔 했다.

“뭐, 뭐라고 그랬냐? 너. 지금......”

찬돌은 주리 곁으로 다가가서는 그대로 지나쳐갔다. 그리고 옥상의 옥탑방 가건물 옆으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그 때까지도 주리는 찬돌이 너무나 태연히 걸어가고 있었기에 설마 달아나는 중이라고는 여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찬돌이 옥상 난간 위로 발을 걸치는 순간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찬돌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야. 거기 서!”

찬돌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난간 너머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이어 난간 건너편으로 찬돌의 모습이 꺼져버리듯이 사라져갔다. 주리가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찬돌이 옆 건물의 옥상으로 뛰어 넘어간 것인지 아니면 아래로 그대로 추락해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주리는 당연히 반사적으로 뛰어가서 확인해야 할 상황인데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그녀는 찬돌이 달아난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주리의 시선에 찬돌이 뛰어 넘어갔던 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리는 건너편 상황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난간 위로 뛰어 올랐다. 그녀는 어두운 허공 속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