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그리고 대개의 사람은 세월의 세례를 받아 어른이 된다. 그런가하면 불운한 이들은 나이를 먹어서도 어른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누군들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다만 지나간 세월을 돌아볼 줄 알고 생각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리라.

 바둑을 잘 둔 다는 것은 곧 ‘머리가 있다’ ‘생각을 할 줄 안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바둑은  도(道)’라고 하는 과장된 표현도 있지마는 현대에 이르러 소년 기사들의 무서운 약진은 그러한 미사여구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도’를 깨우쳐서 강함에 이르렀다기보다는 기본적인 원리를 정확하게 습득하였기 때문에 남들보다 일찍 한 발 앞서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오랜 세월을 바둑을 두었음에도 일반인들은 아마추어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는 훈련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마추어의 바둑은 행복하다. 정해진 일정과 훈련의 결과로 인해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일도 의미가 있지만 그저 산 자체를 즐기는 일도 가치가 있다.

 바둑을 즐기는 일은 개인의 품격을 높일 수 있는 고상한 취미이지만 바둑을 잘 둘 수 있다고 해서 인생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애기가’라는 이름의 바둑 마니아들이 바둑에 빠져서 인생을 허비한 경우가 허다하며 바둑은 고수인데 삶의 태도는 하수인 사람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문제는 바둑이라는 거울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으면 족하건만 거울이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허영을 채워줄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으로 거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세월을 허비하는 일이다.

 NS 사의 회장 소더버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찬돌에게도 세월은 비켜가지 않았다. 그의 나이 이제 스물일곱. 소더버그 회장을 만난 지 16년이 지난 후였으며 소더버그라는 인물의 존재를 완전히 잊기에 충분한 세월이었다. 찬돌은 자신이 한 때 세계적인 IT기업인 NS 사의 총수와 어울린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잊은 채 고작 CCTV 장비를 조작하면서 과학 기술의 발전에 대해 감탄하고 있었다.

“띠바랄. 정말 세상 많이 좋아졌어. 예전 같으면 얼굴이 팔려서 벌써 은퇴를 했을 텐데, 이렇게 장비를 이용해서 계속 작업을 할 수 있다니 말야.”

옥탑방 안에 다른 가구는 없었고 찬돌이 앉아 있는 의자 하나와 회의 테이블 그리고 그 위에 컴퓨터와 세 대의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1번 모니터에 비치고 있는 바둑판 이미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찬돌의 눈빛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집착이 가득했다. 심지어 찬돌은 혀로 입술을 적시며 입맛까지 다시는 중이었다. 찬돌은 마우스를 움직여서 2번 모니터에 보이는 제어창의 플러스 버튼을 클릭하였다. 그러자 1번 모니터에 보이는 바둑판이 좀 더 가깝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점이 흐려져 버려서 마이너스 버튼을 눌러 다시 바둑판이 멀어지게 할 수밖에 없었다. 찬돌이 그러고 있는 동안 3번 모니터에 무언가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었다. 찬돌이 얼른 삐딱해 있던 자세를 바로 잡으며 3번 모니터를 들여다보니 2층에서 상가 현관 쪽으로 나 있는 계단에 웬 야구모자를 쓴 여자가 올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백 미터 미인이라는 말도 있지만 대개의 남자는 예쁜 여자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재주를 지녔기 마련이다. 찬돌은 야구모자를 쓴 여자의 얼굴을 점수 매기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재빠르게 몸매를 견적내고 있었다. 화면 속의 여자는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긴팔 소매의 셔츠를 펑퍼짐하게 입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중요한 걸 놓칠 찬돌이 아니었다.

“야리한데. 가슴도 있고.”

스물일곱 살 찬돌의 여성관이 한 번에 드러나는 말이었다. 모니터 속의 여자는 계단을 거의 다 올라와서 화면 밖으로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여자의 등과 엉덩이가 보이는 찰라의 순간 능숙한 카메라맨이 셔터를 누르듯 찬돌은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이어 찬돌은 입맛을 한 번 다신 뒤에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그가 무언가를 억지로 참을 때 나타나는 습관이었다. 찬돌은 미련이 컸던지 옥탑방의 문 쪽을 내다보다가 다시 모니터 쪽을 바라보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는 머리를 흔들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작전 망칠일 있냐. 박찬돌. 집중하자. 집중.”

잠시 뒤에 찬돌은 진지해진 표정으로 1번 모니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바둑판 상단 쪽에서 뚱뚱한 사내의 손이 나와서 흑돌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러자 찬돌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헤드셋을 집어 들고는 소릴 질러댔다.

“어이구. 등신 같은 형님아. 그런데서 젖히면 어떻게 하냐. 늘어야지. 끊겨가지고 변 쪽 다 잡히면 형이 책임질래?”

하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뚱뚱한 사내의 손은 이미 돌을 내려놓았고 찬돌의 말이 들리기라도 하는 듯 바둑판 위에서 손을 치우지 못하고 어물쩍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찬돌이 다시 성화를 했다.

“얼른 손 치워. 눈치 챌라.”

모니터에 보이는 뚱뚱한 사내의 손이 이번엔 뜨거운 냄비라도 만진 양 얼른 치워지고 있었다. 찬돌은 얼굴을 자신의 손에 묻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헤드셋을 머리에 정확하게 착용하면서 진지한 투로 말을 이어갔다.

“형. 지금부터는 내가 둘 게. 그리고 차라리 잘 됐어. 바둑이 불리해야지 호구들이 눈치를 못 채지.”

그 때 모니터에는 아래쪽으로부터 깡마른 사내의 손이 나타나서 백돌을 바둑판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찬돌이 말한 대로 흑돌이 젖힌 곳을 백돌이 끊어가고 있었다.

 서울의 신림동에는 난곡이라는 동네가 있다. 난곡은 정식 지명은 아니며 주로 신림 10동 인근의 관악산 자락의 마을을 가리킨다. 난곡의 뜻은 글자 그대로 난초가 피는 계곡이라는 의미인데 그 이름만으로도 난향이 떠오르게 하는 정취가 담겨 있다. 그러나 지금 그곳에선 난초는 구경도 할 수 없고 산만큼 높은 아파트들이 산비탈에 기대어 꼿꼿이 서 있을 뿐이다.

 영명빌딩은 남부순환로의 난곡 사거리에서 마을 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나오는 교차로 인근에 있었다. 이름도 웃기는 독산동 20미터 도로 쪽으로 난 언덕길 중간에 있는 허름한 상가 건물들 중 하나였다. 3층 건물의 1층에는 약국과 옷가게가 나란히 영업 중이었고 두 점포 모두 초저녁부터 간판불과 실내등을 켜고 있었지만 드나드는 사람은 없었다. 건물의 3층에는 오래전에 망한 한의원이 폐업하여 빈 채로 있었고 옥상에는 현재 찬돌이 작전실로 쓰고 있는 옥탑방이 보였다. 그리고 건물의 2층에는 기원이 있었다. 간판은 따로 달지 않았으나 창문에 버젓이 ‘원조 한국 기원’ 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왕십리에 있는 한국 기원 관계자들의 입장에서는 부디 이곳의 원장 이름이 김원조 쯤 되기를 바랄 따름이겠으나 원장의 이름은 김만복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문가의 카운터에 앉아서 망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정확하게는 망이라고도 할 것도 없이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릴 것 같으면 ‘돈 치워!’ 하고 소리나 쳐볼 요량이었다.

 기원 안에는 단골손님들로 구성된 한 무리가 모여 앉아 내기바둑을 두는 중이었다. 인근에 상가 건물 두 채를 소유하고 있는 안 사장과 가산동에 있는 콜라 회사에 다닌다는 백 주임이 오늘의 주인공들이었다. 안 사장은 나이들고 말랐는데 백 주임은 젊고 뚱뚱했다. 안 사장은 시종일관 바둑돌을 힘차게 바둑판 위로 내려치면서 구경꾼들의 흥을 돋우었지만 백 주임은 계속해서 계집애마냥 돌을 놓는 모습을 반복하였다.

 바둑판 위에는 흑백의 돌들이 뒤섞인 채 100여 개 정도가 놓여 있었다. 옆의 빈 좌석에 엉덩이를 대충 걸치고 앉아서 구경하던 안경잡이 조 사장과 땀이 많은 서 사장의 표정이 점점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쩔그럭 쩔그럭 소리를 내며 바둑통 안에 백돌들을 어루만지던 안 사장의 손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안 사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것도 모른 채 백 주임은 바둑판 위에 머리를 처박기라도 할 듯 상체를 잔뜩 기울이고 바둑판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백 주임의 얼굴은 자신이 방금 전에 내려놓은 흑돌의 의미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 때 안 사장이 검지와 장지 사이에 백돌을 하나 끼워서 집어 들고는 힘차게 우변 쪽을 때렸다. 이어 바둑판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백돌을 장지로 지그시 누른 채 원하는 위치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 사장의 손끝이 돌에서 떨어지는 순간 백주임의 입에선 절로 비명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 ”

바둑판 위의 상황 즉 국면은 이러했다. 백 주임이 보는 시선에 우상귀 쪽에서 우변 쪽으로 진영을 이루고 있는 흑돌들이 주위를 둘러 싼 백돌들에게 완전히 갇힌 모습이었다. 그리고 흑의 진영은 충분히 넓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두 집이 나기는 쉽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방금 안 사장이 놓은 백 돌은 흑 진영의 한가운데에 유일하게 두 집을 낼 수 있는 모양의 급소에 위치해 있었다. 더구나 그곳은 다시 한 번 더 백 돌을 놓으면 흑 진영이 이등분 되면서 한 쪽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는 요처였다.

 백 주임이 진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자 안 사장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그 순간 백 주임이 곁눈질을 해서 테이블 귀퉁이에 재떨이로 눌러 놓아둔 수표 뭉치를 흘끔거리고 있는 모습이 안 사장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안 사장은 이제 흐흐흐 소리까지 내면서 얼굴 전체로 미소가 번지는 걸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드 위에 가로 세로 줄을 잔뜩 그어 놓고 그 교차점 위에 돌을 놓아 영역을 다투는 바둑이라는 게임의 기본 원리는 한 사람이 한 번씩만 돌을 놓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다른 보드게임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바둑은 이 기본 원리를 구체화 하면서 성립된다. 

 바둑은 돌을 많이 놓든 적게 놓든 돌들의 연결을 이용해 선을 그려서 영토를 나누는 게임이다. 그리고 영토의 경계를 이루는 돌들은 적에게 둘러싸이면 아웃 처리가 되고 만다. 물론 아웃 처리된 그 빈 자리는 상대방의 영토가 된다. 문제는 자신의 영토 안에 두 개 이상의 구역을 나누는 게 가능한가 아닌가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개의 보드게임이 지닌 원리이자 바둑의 기본 원리인 ‘한 번에 하나씩’이라는 원칙에 구속받기 때문이다. 즉 흑이 큰 영토를 만들었는데 백이 그 안에 들어와서 중간 크기의 영토를 만들어 버리면 원래의 그곳은 흑의 영토가 아닌 백의 영토가 된다. 그럼 흑은 다시 백의 영토 안에 뛰어들어 작은 크기의 영토를 만들어서 흑의 영토를 없애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진영에 뛰어들어서 나의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게 끝없이 가능하냐면 그렇지 않다. 결국에는 하나 아니면 두 개의 공간만 남게 된다.

 하나의 공간을 이루고 있는 상대의 돌들을 나의 돌들이 빈틈이 없이 둘러쌀 수 있었다면 그곳 하나의 공간에 나의 돌을 놓으면서 상대방의 돌들을 몽땅 아웃시킬 수가 있는 게 바둑의 규칙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두 개의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면 한 사람이 한 번씩 돌을 놓을 수 있다는 원칙으로 인해 그 한 곳에 나의 돌을 올려놓아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적에게 둘러싸여진 돌은 바로 아웃되도록 한 규칙 속에다가 자신의 돌을 스스로 집어넣은 격이니 바로 아웃 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둑에선 영토를 두 개로 분할 가능케 하면서 상대보다 큰 영토를 그리는 게 중요하다.

 백주임의 우변 흑 진영은 아무리 보아도 눈(영토의 분할을 가능케 하는 꺾이는 지점)이 날 만한 자리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필요한 그 지점엔 안 사장이 방금 올려놓은 백돌이 놓여 있었다. 백 주임은 찬돌이 왜 그 중요한 곳을 무시하고 다른 곳에 돌을 놓으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이전에 놓았던 흑돌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돌들이 뒤엉켜 싸우는 곳과는 상관없는 중앙의 넓은 공간에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다 할 만한 자리였다. 물론 그 곳은 중요한 곳이었다. 자칫 그곳을 간과하였다가는 백에게 중앙의 큰 집을 허용할 수도 있을 만한 자리였다. 하지만 바둑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큰 곳과 급한 곳을 구별할 줄 알고 급한 곳을 먼저 둘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흑돌이 놓여 있는 곳은 큰 곳이지만 백돌이 놓여 있는 곳은 급한 곳이었다.

 잠시 생각을 갈무리하던, 아니 생각을 갈무리하는 척을 했던 백 주임이 바둑통에서 흑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일단은 뛰어 들어온 백 돌이 흑 진영을 이분하지 못하게끔 틀어막아야 할 곳으로 돌을 향했다. 그 순간, 벽력같은 찬돌의 목소리가 백 주임의 귀 속 깊이 꼽혀 있는 리시버에서 울렸다.

“아냐! 우변의 백 진영을 먼저 들여다봐야 해!”

당연한 곳인줄로만 알고 돌을 놓으려던 백주임의 손이 바둑판 위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백 주임은 눈동자만을 돌려 찬돌이 말한 자리를 보았다. 그곳은 백이 막지 않으면 흑이 뚫고 나갈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뚫고 나간다 할지라도 저만치 앞에는 또다른 백의 세력이 기다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국 탈출에 성공한다 하여도 뒤 쪽의 흑돌이 여섯 개나 잘려져 나간다면 그것은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받아주지 않으면 끝장인데......’

백 주임은 찬돌이 말한 곳보다 원래 자신이 보았던 자리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러한 백주임의 생각을 읽고 있기라도 하는 듯 찬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안 사장은 받게 되어 있어. 우변을 먼저 놔!”

둥글둥글한 외모에 걸맞게 백주임은 유한 성격이었다. 그의 본명은 백 씨도 아닌 다른 이름이지만 일단은 백 주임이라 부르기로 한다. 아무튼 지금 그는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까 백 주임 자신이 늘어야 할 곳을 젖히는 바람에 상황이 급박해지기는 했지만 그 후로 찬돌이 요구하는 수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칫 대마 전체가 잡힐 위험의 소지가 있는 수를 착점하길 찬돌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