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김치

9월 10일, 전 날 밤 몇 번의 통증 공격으로 설친 잠을 점심을 먹고 나서 한 시간 가량의 낮잠으로 보충하였다. 정말 얼마 만에 맛 본 꿀잠인가? 머리가 구름을 몰아붙인 파아란 하늘처럼 개운하다. 이젠 지루한 장마처럼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같은 두통이
끝이려나보다.

컴퓨터를 켜고 바둑을 두었다. 아직도 5단의 레테르는 붙어 있고 레이팅 그라프도
6단선 바로 밑에서 움직이고 있다. 두통기간에도 바둑 전적만큼은 별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이상스러웠다.

첫판을 무난하게 이기고 둘째판도 유리하게 되어가는 4시쯤 갑자기 커서가 움직이지를
않는다. 몇 번의 시도를 해보니 커서는 움직이는데 노란 바둑판의 십자로에 바둑돌이
놓여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놓여지는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는다.
잠금장치가 고정된 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기분이었다.

정전이 된 것이었다. 전등이건 TV건 모두 먹통이 되었고 집안은 침울한 정적에 쌓이고
만다, 이곳에선 가끔 이런 일이 발생하지만 그때마다 갑자기 공격을 하는 두통의
침입을 맞을 때와 같은 황당한 기분을 맞보고 만다. 소파에 누어 천정에 매달려있는
큼직한 선풍기의 고정된 날개 사이사이의 음영이나 바라본다. 아- 아까운 바둑......
한 점 젖히고 반대편에서 대마의 머리를 누르면 상대는 혼란에 빠지게 될
터인데.......           
 

30분이 지나도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슬그머니 졸음이 찾아와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오후 늦으막한 땡볕이 눈이 부실 정도로 마당과 그곳으로부터
연결되어 마을 정문으로 통한 도로를  짓누르고 있다. 가로수와 잔디밭은 아직도 낮잠에 취해 있고 인적 하나 없는 마을은 고요한 정물이었다.

관리사무소 문이 열려있었다.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는 조그만 실내는 아마 찜통일
것이다. 새로 채용된 중국인 경리 아가씨가 문에 기대어 서서 이따금씩 찾아오는
정문으로부터의 골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Good afternoon, Mr. Lee, power out!"

"Good afternoon, When okay?"

"I don't know."

그녀는 이상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빤히 나를 처다 보았다.  관리 사무소는 재빨리
정전이 된 이유와 언제쯤 고쳐질 것인가를 파악하여 주민들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 물음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하긴 이곳 관리사무소는 그런 의무
같은 것은 없는 지도 모른다. 각 집으로 연결되는 인터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유선 전화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가구가 몇 집도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처럼
발효음식물을 보관하는 냉장고가 각 집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몇 집에 소유하고 있는
냉장고는 겨우 음료수 정도를 보관하고 있으니 이곳의 정전은 ‘강 건너 불’ 정도의
문제일 것이다. 

"전화를 해봐요?“

마지못해 그녀는 책상으로 돌아가 전화를 돌린다.

“아, 예. 오케이, 탱큐”

“-----”

“ 미스터 리, 시나이 변전소에 문제가 생겼는데 앞으로 한 시간 정도면 임시조치를
취 할 수 있답니다.”

집으로 돌아와 한 시간 반을 기다려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김치냉장고에 있는
김치들은 물론 냉장고에 있는 음식물들이 걱정이 되었다. 가정부 리아에게 가능한 한
이들 문을 열지 말 것을 당부했다.

문득 "엉클 장" 식당이 걱정이 되었다. 대형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음식물들이 신선도를
잃거나 상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미리 얼음이라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전화를 걸어보았다. 아들 전화가 되질 않는다. 여주인 전화를 해보니 집에서 전화를 받았다.

“아, 집에는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았는데요,  가계는 30분 쯤 뒤에 들어왔다고 아들
한테서 전화가 왔었네요.”  

상가의 전선은 다른 선인 모양이다. 상가의 문제는 해결된 셈이었다.

전에 한 통 사다놓은 양초를 찾아보았다. 서랍 안에 3분의 1쯤 남은 토막이 겨우 하나
남아 있을 뿐이었다. 차를 몰고 반달푸트라 상점으로 달려가 다시 한 통을 사왔다.
시간이 30분이 또 지났다. 한 시간이면 임시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전기회사의  말은
믿을 바가 못 되었다. 문제는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는 가, 이었다. 거기에 따라
김치냉장고와  냉장고 속의 음식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답이 나오는 것이다.

한 달 전에 며느리로부터 부쳐온 두 종류의 갓 김치가 김치 냉장고에 쌓여 있다.
두 종류라고 하였는데 실은 여수의 어느 한 집에서 만든 것인데 이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싱가포르 친구 집을 경유하여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레이시아 POS(한국의
우체국)를 이용하여 직접 집으로 배달되어온 각기 10kg의 꾸러미로써 경로만 달리
하여 온 두 꾸러미를 뜻한다.
 

통상 도착 일정이 3일 정도이지만 혹시 그 동안에 공휴일이나 토요일 일요일이 끼면
4-5일이 걸리기 때문에 월요일 오후에 광명시 우체국에서 똑 같이 송부를 하였다고
했다. 사실 한 쪽으로 전량을 다 부칠 수도 있었겠지만  어느 한 나라에서 20kg을
받는다면 혹 관세를 물지 않을까 염려되어 나누어 부친 것인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해버렸다.

화요일 오후 며느리로부터 카톡으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두 꾸러미 다 말레이시아
POS와 싱가포르 우체국에 각각 정히 배달되었다는 확인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수요일 오전 싱가포르 친구한테서 “잘 받아서 말레이시아 국경을 넘고 있다”는 전화가
왔고 오후 한시 점심을 먹기 전에 도착하여 우선 한 포를 뜯어 그날 점심은 갓 김치
비빔밥으로 포식을 하였었다.

밑둥을 잘라내 기다랗게 늘어진 잎줄기들이 한가닥 한가닥씩 분리되면 그중 하나를
둘둘말아 밥 위에 얹고 한 숫갈 듬뿍  입 안에 넣어 야무지게 씹어먹으면 톡 쏘면서도
알싸하게 퍼지는 고국의 향기, 거기에 적당히 속 양념으로 들어간 파 내음과 마늘 젓갈
고추가루 등이 한데 어울리니 이 나라 대표음식이라는 양고기 바베큐라도 어찌
비교가 될 것인가?
 

이 맛은 四季節이 뚜렷한 대한민국의 地氣  태백산맥을 넘고 들어온 대륙성 바람과
점점히 밖힌 다도해의 섬들을 돌아 찾아온 해풍의 만남 그리고 자갈밭을 일구며
정성스럽게 가꾸어 온 농민의 부지런함이 한데 어우러진 맛이기 때문일 것이다.   

두 포를 더 뜯어 각각 1kg씩 나누어 이웃 네 집에 선물을 하였더니  “한국에서도 맛보기
어려운 싱싱한 돌산 갓 김치”를 뜻하지 않게 선물 받은 이웃들의 환환 웃음이 담과
담을 넘나들었다. 
     

-또 다른 한 꾸러미가 오면 김치를 좋아하는 다른 이웃들에게도 선물을 하여야지.

나는 해년마다 구정과 추석이 되면 최소 여섯 집의 이웃에게 과일 상자를 돌려왔다.
그러나 답례를 보낸 사람은 드물었다.  앞집의 탄이나 한집 건너의 양은 가끔 조그마한
과자 상자나 바나나 꾸러미를 들고 왔지만 다른 집에서는 지난 6 년 동안 무엇 하나
건네받은  적은 없다. 그러나 나는 내가 여유가 있는 한 명절 때 이웃들에게 계속
내 성의를 보여줄 심산이다. 엊그제 추석에도 갓 김치 외에 한 세트에 30링깃(환화
약 8000원)하는 찻잔 상자를 6개 준비하였음은 물론이다.     

목요일 금요일에도 말레이시아 POS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갓 김치의 신선도에 걱정이
쌓여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동안 비가 계속 내려 날씨가 무덥진 않았지만 한낮의
온도가 섭씨 30도 이하로 내려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며느리에게 한국 우체국에
문의를 해보라고 채근을 하였었다. 혹시 통관물품으로 구분되어 말레이시아 세관 창고로
들어가지나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도 일어났다.

금요일 저녁 며느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금요일 오후 1300시 배달 차   집에  들렸으나   수취인 부재로 송달 실패  POS. 

국제적인 거짓말도 이쯤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목요일부터 눈이 빠지라고 소포만 기다리고 있던 집에 1300시에 도착하니 수취인이 없었다니... 혼자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정문의 경비들도 비상상태에 있었거늘.   200m도 않 된 거리의 경비실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확인된 바는 역시 금요일 하루 종일 POS는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세수 비누 몇 개와 남성 화장품 몇 종류를  한 꾸러미로
하여 부친 적이 있었는데 3일 째 되던 날 시간을 명시한 내용에 수취인 부재라는
메시지를 POS가 한국 우체국에 보냈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아침에 운동을 하느라고
잠시 집을 비운 일도 있었고 조금 늦게 도착한다 해도 걱정이 되지 않는 물건이라
명시된 시간대에는 분명히 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넘어갔었다.  물건은
그 이튿날 늦게 도착하였지만.

갓 김치는 일요일 정오쯤 도착하였다. 통상 일요일은 공휴일이라서 배달을 안 한다고
하여 생각지도 않았었는데 초인종이 울렸고 POS라고 로고가 찍힌 포장차가 집 앞에
멈추어 섰다. 크게 반갑지도 않았었다. 김치는 이미 식초가 되어 있을 터이니까.

-금요일 날 온 적이 있느냐? 

-나는 모른다.

영어는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은 직원이 재차 말레이어 물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수령증에 서명을 받아갔다.

갓김치는 짐작대로 식초에 절어놓은 푸성귀처럼 시디신 내음을 풍기고 있어 선물은커녕
나 역시 김치로 먹기에도 곤란할 것 같아 차후 김치찌개로나 쓸 요량으로 김치냉장고에
보관 중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언제 고쳐질지도 모르는 정전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망고나무 뒤뜰에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할 때 나는 아직은 괜찮은 집안에 촛불을 몇 개
세워놓았다. 조급증이 일어나 김치 냉장고를 열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뚜껑을 열자
약간의 냉기는 올라왔지만 이내 사라졌고 밑바닥에 서리 대신 물이 고여 있는 게 보였다. 
두 종류의 갓김치 통은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냉장고 뚜껑을 그냥 닫아버렸다. 마치
위로의 말조차 해줄 수 없는 불치병 환자를 대하는 것 같아서.

너는 그만 시들어 가고 마는가? 아득한 옛날 삼 천 명의 동남동녀가 불로장생초를 찾으러
찾아왔던 대한민국 땅에서 태어나 이역만리 열대의 밥상에 꽃을 피우려 했건만.

사시사철 계절의 순환으로 다져진 땅,  눈보라와 비구름으로 세상의 선과 악을 주관하는
하늘 그리고 항아리의 둥그런 공간속에서 수많은 대화로 이루어진 발효의 기운. - 너의
그 톡 쏘면서도 입안 가득히 퍼지는 향기의 의미를 알려주려 했건만.

우편과 통신의 조약을 맺어놓고 그 세부사항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는 이 나라 우체국과
전력이 남아돌아가도 변전소의 부족을 이용자의 인내로 무시해버리는 전력국의 행정은
애꿎은 너의 신선함만 빼앗아가고 마는구나.     

그러나 이들도 머지않은 장래에 시간의 약속은 인간세상의 가장 큰 계율이며 하늘과
대화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