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은 시간을 주체 못한다. 아침운동을 가지 않으니 늦잠을 자려해도 오히려 빨리 눈이 뜨인다. 오로바둑을 클릭하여 바둑을 한두 판 두어보지만 그 이상은 무리다. 요즈음 두통이 재발하여 하루 두 세 차례씩 공격을 받다보니 손발의 움직임이 느슨해진 것 같고 머리가 개운하지가 않다. 마치 희부연 안개가 시야를 가린 것 같다. 그런 상태에서 무엇인가에 집중하면 쉬이 피곤이 찾아오고 다시 두통이 찾아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해진다. 

KBS World를 틀어본다.  “슈퍼맨이 돌아 왔다.” 라는 프로그램인데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린다.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누가 무엇을 하기에 슈퍼맨인지 또는 이 프로그램이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를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어 언젠가부터 아예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기 일수였다. 

산업사회가 들어서면서 그렇지 않아도 입지가 좁아진 아빠의 세계. 하늘과 땅으로 비유되는 남자와 여자의 상징은 결코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는 신분의 의미는 아니었다. 하늘과 땅은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동등의 신분이었고 각자는 서로 존경하고 존경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단지 사회 풍토나 제도가 남아선호를 가져 왔을 뿐.

농본주의 사회에서는 남자는 밖에 나가서 일을 했고 여자는 집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각자의 의무와 권한을 가진다. 남자는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을 마련해야 하고 여자는 그 여건으로 살림을 살아야 한다. 남자가 나라를 위해 병역을 책임질 때 여자는 출산 육아 등을 책임진다.

서로는 상대의 책임을 존중해야 하는데 서로가 상대의 책임을 경시했을 때 문제가 생긴다.

KBS World가 남자로 하여금 여자들의 할 일을 경험하여 그 어려움을 이해하라고 이 프로그램을 편성했다면 그것은 이해가 간다. 뒤집어보면 여자의 일이 남자의 일에 비하여 훨씬 어렵다는 뜻일게다.  그렇다하더라도 할 말은 있다. 여자들에게도 병역체험을 시켜 남자들의 고충도 이해시켜야 균형이 맞는 것 아닌가?

남자와 여자는 신체구조상으로 쉬운 일과 어려운 일이 구별된다. 즉 거친 일은  여자들에게 어렵고 섬세한 일은 남자들에게 어렵다. 육아를 남자들에게 해보라고 하면 당연히 어려울 것이다. 아버지의 정겨움이 아무리 큰들 열 달 동안 숨쉬기를 같이 해왔고 출산의 고통을 경험한 모정에 비해 어찌 비교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전쟁을 여자들에게 해보라고 해보라. 전쟁이 일어나면 남자들은 무조건 죽음의 텃밭에서 죽지 않기 위해 죽여야 하는 고통을 당해야 한다. 지나간 세기까지 어느 나라나 남아선호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대를 잇고 씨족을 번성하게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국토를 방위하는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슬람교에서 일부다처주의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마 국방을 책임지는 인력이 보다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로의 어느 석학께서 군인은 100년에 한번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을 위해 필요한 인력이라고 하셨는데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핵무기 같은 최첨단 과학무기도 중요하지만 공멸하는 핵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어디까지나 죽지 않고 적이라고 칭하는 다른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우발적이거나 원한에 의한 것 외에는   아무리 잔인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복된 훈련을 하지 않고는 그리 쉽게 가능한 것이 아닐 것이다. 훈련을 했다 하더라도 여자 같은 감성의 소유자는 방아쇠를 당기지도 못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도 있다.  

베란다의 흔들의자에 몸을 눕혔다. 흑단 나무 가지들을 통으로 깎아 못 없이 조립한 것인데 등받이에 매화와 새들을 주재로 한  문인화에 자개를 입혀 제법 품위가 들어나 보이는 작품이다. 몇 년 전에 시내 골동품 가게에서 구해온 것인데 여러 방문객들이 너무나 많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시샘 때문인지 스키 플레이트 같은 받침대의 오른쪽 앞부분이 부러져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왼쪽이 건재한 덕분인지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한쪽 다리를 들고 있는 학의 모습처럼 오히려 예술품인 것 같아 계속 그대로 쓰고 있다.

하늘은 새털구름이 고기비늘처럼 덮여있다. 구름 사이에서 반쯤 얼굴을 내민 오후의 태양이 게스트 하우스 지붕위에 강력한 빛을 내쏟고 있을 뿐 마을은 일요일인데도 오히려 오수를 즐기는 숲속처럼 조용하다.

길 건너 앞집의 노처녀 홍이 삿갓을 쓰고 정원수들을 다듬고 있다가 손을 흔든다.  그녀는 시나이 공항 면세품점에서 관리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39세의 나이 탓인지 직장과 집을 핑퐁처럼 다닐뿐이었다. 얼굴도 반반한 편이고 휴일 날 보면 집안일이나 돕고 있는 요조숙녀 같은데 무엇이 한스러워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결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예요. 누가 데려가야지요.” 노처녀들의 변명은 한국이나 이곳이나 똑 같다.  나더러 한국 총각 한사람 소개시켜 달란다. 한국 총각? 하긴 요즈음 다문화 가족이라고 한국의 농촌 총각들 동남아시아의 여인들을 부인으로 맞이한 가정이 엄청 많더라만...... 그런데 말이야. 노처녀 문제는 나나 J나 자유로울 수가 없단다. 둘이 다 혼기 넘은 딸 녀석 땜에 너희 아버지와 똑같은 고민을 안고 있으니까.    
       

그녀의 친구가 한국인과 결혼한 지 15년이 넘었다고 한다. 일 년에 한 번씩 친정에 오는데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이곳 아울렛이나 싱가포르에서 파는 것과는 질이 다른 옷과 가방, 중학생인데도 숙녀 티가 나는 하얀 피부의 딸애, 그리고 여기서는 귀족들이나 대단한 부자 집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는 골프로 모녀가 거의 매일이다시피 방학기간동안의 시간을 보내는 여유로움 등등이 그녀뿐만이 아닌 그녀 친구들 모두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한국은 아시아의 여인들에게 환상의 나라이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허지만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을 거야. 서로 문화와 관습에 차이가 있는데....” 

“그래도 한국에서 아내는 생활비를 벌지 않아도 된다면서요? 남편이 모든 생활비의 책임을 지고 아내는 그것을 관리만 한다는데 세상에 그런 나라가 어디 있어요?”

그녀는 한국의 젊은 부부들이 내 집 마련과 애들 교육에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여튼 한국을 환상의 나라로 생각하는 것만큼은 고마울 뿐이다. 그녀의 초록색 샤스에 찍힌 큼직한 하얀 글씨는 “DREAM"이었다.

잠시 후에 그녀는 마당 청소를 시작한다.  그녀의 아버지 탄(陳)은 한 쪽 다리를 절뚝이는 장애인이면서도 공항택시를 몰고 다닌다. 그녀가 결혼을 안 하는 이유가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아버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탄은 고물 택시에서 7인승 승합차로 바꾸었다. 장애인에 맞는 운전석이 설치된 차량이었다. 싱가포르에서 일을 하고 있는 둘째딸 그리고 막둥이 외동아들이 모두 힘을 모아 구입하여주었다 한다.  

그녀의 마당은 차고지이다. 그녀는 마당 한쪽에 설치된 수도파이프에 고무호스를 달아 물을 뿌리며 마당 이곳저곳을 쓸어낸다. 차가 돌아오기 전까지 깨끗히 쓸어놓아야 한다. 

현관 문 앞에 세워져 있는 붉은 색 신대(神臺)를 닦을 때는 삿갓을 벗고 예를 갖춘 후에 시작한다. 그곳에는 천신(天神)이라고도 불리는 부처가 모셔져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기도를 드린다. 명절 때엔 축문을 사다가 향과 같이 불에 태워 하늘로 올려 보낸다.  그녀가 걸레질을 하다말고 힐끗 나를 처다 본다. 나는 두 손을 합장하여  인사하는 흉내를 내자 그녀가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는다.    

문득 어느 마을이 생각났다. 흔들의자에서 일어나 서재로 들어와 화선지를 벽에 붙인다.    검정 먹물을 묻힌 붓으로 네모진  바위의 형태를 그리고 그 위에 널찍한 또 하나의 바위를 얹혀놓은다.. 고인돌을 표현하고자 함이다. 그 옆에 선돌을 그린다. 하늘을 찌를 듯이 서있는 바위는 남자의 상징이다.

어찌하여 이 마을이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대학 다닐 때 농촌봉사활동을 하러 갔던 마을이었는데 20년이 지난 후 선산 가는 길에 들려보니 마을 대신 엄청난 넓이의 물이 들어차 있었다. 아스팔트가 덜 된 탓에 황톳물을 뒤집어쓰면서 고물차로 한 바퀴를 돌아보았는데 당시 150호도 넘었던 마을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고 그 위치마저 정확히 집을 수가 없었다. 다만 전에는 마을 앞에 따로 떨어져 자리하고 있었던 고인돌과 선돌이 뎀의 위쪽 가장자리에 나란히 서있는 것만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 자리는 마을 터가 아닌 것 같아 뎀을 공사하면서 누군가가 그 곳에 따로 옮겨 놓은 게 아닌가 싶었다.

하여튼 수몰되지 않고 남아있어 예전에 이 근처가 마을이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는 게  다행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마을은 내가 마을 소녀들에게 기초 영어를 가르치면서 가끔 한국의 현대시와 단편을 읽어주었던 곳이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던 산간마을의 공터에서 호롱불과 달빛을 받아가며.........

그해 여름은 몹시도 가물었었다.. 가파른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있는 능선 중턱까지 천수답이 즐비했던 마을은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매일 계곡물을 퍼 올리는 두레질을 하여야 했다. 봉사단 일행도 매일 웃옷을 벗어던지고 두레질을 도우는 한편 물고랑을 만들고 대나무 파이프를 연결하여 물길을 끌어올리는 작업을 하였었다.

또 한편으로 피 뽑기 작업을 하였는데  산골짜기 천수답에 왜 그리 피가많았는지? 색깔이 조금 더 푸른 잎사귀는 영락없는 피였다. 거의 팬티 하나만 걸치고 피 뽑기 작업을 하던 우리들의 피부는 날선 풀 잎사귀들에게 씻기고 긁히어 생채기 투성이였다.

덕분에 얼마가 지나자 황갈색으로 타들어가던 벼 잎사귀들이 생기를 되찾고 푸른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여름 뙤약볕이 머리 위에서 작열하는 논두렁에 앉아 코앞의 푸른 냄새를 맡으며 뿌듯한 보람을 느까는 반면 그 자리에서 보리밥에 얹혀 먹는 시큼한  무 물김치의 점심은 정말이지 꿀맛이었다. 어쩌다 막걸리도 나왔는데 그 맛 역시 그 후 다시는 느껴보지 못한 것 같았다.

점심을 이고 나온 마을 처녀들은 웃옷을 벗어던진 우리들로부터 서너 발짝 떨어져 앉아서 먹고 마시기에 정신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힐끗힐끗 훔쳐보고  있었다. 야학 때 그녀들의 장래 희망을 은근히 물어보았더니 대부분 “현모양처(賢母良妻)”였다.
                              

두 개의 바위 뒤에 깎아지른  절벽을 그렸다. 기억에 남아있는 모습을 그렸는데 그려놓고 보니 뎀 공사자가 왜 산을 깎아놓았는지 의문이 갔다. 아마 하류의 물막이  흙과 자갈들을 이곳에서 충당했나보다, 혹은 공사비를 늘리려고 수위하고는 어림없는 곳까지 파해쳐놓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늘을 그렸다. 두둥실 떠 있는 몇 개의 솜구름과 절벽 위로 퍼져 흐르는 안개구름은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평화를 상징한다,  호수는 하늘빛을 안고 잔잔히  흐르고 있다. 천수답이 즐비하고 현모양처를 희망하는 마을 처녀들의 꿈이 서려있는 밤나무골 마을의 이야기와 함께.......  

붓을 놓았다. 단숨에 그린 선돌과 고인돌 - 그들은 지난 세월의 한 마을이 희생하여 수 십 만 가구의 식수원이 되었음을 증명함과 동시에 이제는 호수의 수호신으로써 후대의 번성과 발전을 기원하고 있다.   
          

갑자기 골프장 쪽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굿 샷, 나이스 샷!” 그런데 그 발음하며 뒷 말들이 모두 한국식이요, 한국말이었다. 뒷 베란다에 나가 밖을 내다보았더니 티 박스를 빠져 나가면서 두런거리는 한국어들이 바람결에 묻혀온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골프장 손님의 대부분은 한국 사람들일 것이고 그 절반은 여자들일 터이니까. 추석맞이 골프 투어 해외 여행객들. 

아, 그러고 보니 내일이 추석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