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에서 바둑을 둡니다.

60대 후반의 중늙은이가 사막의 모래알만큼이나 널려있는 시간의 무료함을 달래봅니다.

초침의 재깍거림은 빨리도 움직이는데 아무도 없는 집에서 외로움과 싸우는 하루하루는

지척거리기만 합니다.

너무도 숨 가쁘게 달려온 탓입니다. 언제나 허덕이는 경주마처럼…….

누군들 달리지 않았겠습니까, 만은 허기지고 병든 몸을 이끌고 가족 고국과 떨어져야할

만큼 만신창이가 되면 불계패를 선언해야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패가 하나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가정 의학 상담을 하던 박사님도 속리산 암자의 도인도 모두 원인도 찾지

못한 체 “불계”라고 선언하셨던 한 판이 패 걸이를 찾아 말레이시아로 왔더니

기사회생을 하였습니다.

이곳의 중국인 의사 왈 “당신의 사주가 이곳의 음양오행과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하더군요.

그는 중국 철학에 심취해있었습니다.

해가 한두 번 바뀌니 간신히 두 집을 만든 대마가 머리를 들고 욕심을 부립니다.

예전의 건강을 되찾아 이곳에서 무엇인가를 해보겠다고…….그러나 어디 그게 쉬운 일입니까? 매일 한 움큼의 알약을 입에 털어 넣고 혈압계 혈당 계와 씨름을 하면서 하늘이 열리자말자 내리쬐는 폭염을 피해 팜 나무 그늘을 돌아 걷기 운동을 하더라도, 오만가지 잡념들로

가득찬 머리는 순발력이 떨어졌고 팔 다리의 근육은 느슨해질 대로 느슨해졌는데.

의사의 조언을 받아 취미활동이나 하기로 하였습니다. 천리안 수준의 인터넷을 주문하고

12시간 걸려 오로바둑을 다운로드 받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다른 게임은 잘 되지 않는데

바둑은 그런대로 속도를 맞추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곳도 엄청난 통신의 발달이

이루어져 거의 고국에서 두는 것처럼 이상이 없게 되었습니다. 나의 심신도 간혹 무리를

해도 상관없을 만큼 좋아졌습니다,

아침은 멀리 떨어진 모스크(이슬람 사원)의 기도문 소리와 함께 열립니다. 지평선을 이룬 숲의 벌판이 아직 하품도 하지 않는 시간에 몽크(수도승)들의 기도문 소리는 낭랑하게 울려 퍼지며 하늘을 엽니다. 애절한 바람을 기구하는 것인지 인간의 원죄를 속죄하는 것이지 또는 다른 무엇인가를 애원하는지도 모를 주문은 산사의 염불소리와 비슷합니다.  목탁소리가 나지 않은 점만이 산사와 다릅니다.. 어둠에 쌓인 사방은 숙연해집니다.

컴퓨터를 엽니다. 파워버튼을 누르면 모니터에서 이제 여섯 살 난 손주 놈의 해맑은 웃음이 반깁니다. 아들이 새 컴퓨터를 보낼 때 표지판으로 넣어준 사진입니다. 오로바둑은 몇 개 되지 않는 사이트 표시판의 위쪽에서 클릭됩니다. 말레이시아라는 대화명이 오른편 대기실 멘 위쪽에 나타납니다. 얼마 전 6단까지 올라가기는 갔었는데 바로 5단으로 내려와 버렸고 언제 다시 4단으로 내려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대진 운이 좋을 때가 있더군요. 상대가 아무런 말도 없이 퇴장을 하기도 하고 일부러 불계패를 클릭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우연한 승수가 쌓여 상승세를 타면 레이팅 화살표가 막 올라가 부담스런 급수까지 올라갑니다. 그럴 때는 그렇지 않아도 실력이 부족한데 자신감마저 결여되어 번지점프를 해버리고 말더군요. 그래서 되도록 승부에 관심을 두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한 국면 한 국면 정성을 다해보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지요.

15분 대국만을 고집합니다. 가끔은 10분에 30초 초읽기 3회 대국도 하지만 초읽기의 초침소리가 귀를 따갑게 해서 지기가 일수입니다. 마우스 조작이 서투르고 수읽기가 예전과는 하루하루 다르기 때문입니다. 15분에 초읽기 30초 3번 대국도 간신히 버텨냅니다. 어쩌다 20분 대국신청이 들어오면 얼마나 반가운지……. 사실 시간에 쫓겨 착수를 못하다가 져버리면 사기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신세대의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푸념)

새벽바둑은 하루의 운세보기입니다. 딱히 할 일도 없는 사람이 무슨 운세보기냐고 하겠지만 혹시 압니까? 고국에서 반가운 친구라도 느닷없이 찾아올지……. 하여튼 이기면 일진이 좋을 것 같고 지면 가능한 한 외출을 삼가거나 운전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침 식사를 하고나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는 운세타령.

그 보다는 외국에서 태극기 문양만 봐도 반갑듯이 고국어로 인사하는 것도 반갑고 클릭을 할 때마다 울리는 바둑돌 음향도 정겨워 오지도 않는 메일 창을 열기보다는 차라리 오로바둑을 멘 먼저 클릭합니다. 대화창에서 별다른 문자들이 오가지 않아도 바둑판에 놓이는 돌의 흐름이 바로 나 자신과의 대화입니다. 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무수하게 추억을 남긴 이야기들이 반상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인연과 이별 그리고 사건들…….19로 361의 접점들에서.

몽크들의 코란 낭송이 끝이 나면 사위는 다시 적막 고요. 그러나 바둑돌 놓이는 소리는 계속하여 창밖으로 흘러나갑니다, 마치 적도의 뜨거운 태양처럼 모든 이들로부터 잊히고 외면당한 중늙은이가 대신 말레이시아의 아침을 열어 보겠노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