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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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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16 회
2011-08-12 오전 9:39 조회 4057추천 2   프린트스크랩
▲ 그들, 현실에 안주하고 만 선지자들.

                                                            16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한 행동은  그분을 광대는 아니더라도 부흥회의 연사 정도로 여기는 태도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여태 그분이 말한 내용들과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분이 천국을 묘사한 표현의 만 분의 일이라도 흉내 낼 수 있기를 바라며 내가 정리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공유하는 모든 역사를 그분 앞에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아들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한 일에 일관성을 유지하길 원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들의 암흑기 때에 동방으로 가서 세상에 비추게 될 빛을 미리 예시하기는 했지만,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할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는 히브리인들 가운데에서 사람의 역사가 기록되어가길 원했을 테죠. 당신은 그의 의견에 찬성하기는 했으나, 히브리인들이 받게 될 고통을 마음 아파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의 지위를 버리고 땅으로 내려가 형틀에 매달려 죽기까지 치열한 그의 의지에 거부권을 행사할 이유는 찾을 수 없었을 테죠.

  이 시점에서 ‘부활’이라는 의미와, ‘천사’나 ‘마귀’와 같은 의미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그것은 기록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막연한 믿음을 확산시키고 맹신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종교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형식에 갇히고, 실재하지 않는 미지의 대상에 사로잡히는지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먼저 유대인들의 잘못 중의 하나는 조로아스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 부활이나 종말과 같은 말조차 알지 못했던 그들이 선민사상이라는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일입니다. 물론 그들은 그들이 빼앗은 땅을 다시 빼앗길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고민을 피할 수는 없었을 테죠. 그렇지만 그들은 그들의 손끝에서 기록된 여호와의 태도가 경건한 이방인에 대해 늘 호의적이었다는 진실만큼은 외면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이라는 가나안 지방 살렘 왕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증손자의 증손자들의 시대에는 가나안과 살렘 성이 타락하여 멸망의 대상이 되었지요. 그렇지만 히브리인들은 멜기세덱의 후손인 아도니세덱을 죽이기 전에, 그들의 신 앞에 나가 정말로 멜기세덱의 후손도 죽이기를 원하는지 다시 물어보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신 여호와는 결코 세상에 대하여 멸망의 신이거나 파멸의 신이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유대인들은 언제나 살육을 명하는 여호와의 말에 순종하는 태도를 취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제멋대로 하기 일쑤였군요. 그들은 차라리 처음부터 여호와의 명령 앞에서 반론을 제기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정결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이방의 여자들을 모두 죽이라는 것은 납득이 되지만, 말 못하는 아이들과 갓 태어난 영아들까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당당하게 그들의 신 앞에 나서서 말할 줄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멜기세덱 외에도 여호와는 발람과 소통하였으며, 욥과 소통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니느웨의 멸망을 염원하던 요나를 꾸짖으며,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하는 마음을 고귀하게 보았지요. 그리고 여호와는 이방 여인들이던 라합과 룻을 통해 다윗으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이르는 계보에 혼혈을 의도하였다는 사실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밖에도 기록에 의하면 여호와는 앗수르와 바벨론과 두로를 이스라엘과 함께 ‘내 딸’이라는 표현을 써서 불렀음을 우리 유대인들은 의식 가운데서 애써 부정하고 있었군요.

  이처럼 본질을 왜곡하는 ‘선민의식’과 같은 생각들이야말로 당신과 아들의 존귀함에 반대하는 태도이며, 육체를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게 하는 멸망의 결정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시대의 끝 지점에 이른 가운데 부활, 천사, 사탄, 영혼과 같은 개념들을 바로 이해하고 바로 말할 수 있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는 중요할 것 같군요. 다시 말해서 알고 있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자존의식의 태도일 것입니다.

  여호와는 비록 열등의식을 지닌 신처럼 행세한 이름이지만, ‘너희는 장부처럼 허리띠를 띠고 내 앞에 서라.’ 하며 모든 시대에 걸쳐서 요구하였을 만큼 그는 그의 백성들이 올바르기를 바랐음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의 아들은 선악의 나무라는 역할을 수행하며 세상이라는 연극무대에 섰을 뿐 본질적으로 존귀함을 잃은 적은 없었습니다.

  당신은 수 천 년에 걸쳐서 사람들의 속에 있는 당신의 영을 땅 위에서 진동시켜 사람들의 생각이 커가기를 도왔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짐승들과 다를 바 없는 원시적인 수준을 벗어나는 일조차 쉽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몇 번이나 놀랐을 겁니다. 사람들은 그리스에서 태동하였던 민주주의를 땅 속에 묻어둔 채 2천 년 가까이 허송세월을 하다가 북아메리카와 프랑스에서 간신히 그것을 발굴해 낼 정도였으니까요. 

  만일 당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모든 생명들을 돕지 않았다면, 당신의 아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몇 백 개의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켰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존귀함을 스스로 언급하게 되면 세상에 만연한 열등의식을 부추기게 될까봐 지금까지 침묵하였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거듭난 아들의 업적만을 도와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아들과 당신이 세상을 향해 말하고자 하는 진리가 모든 시대에서 왜곡되고 변질되는 일은 무덤 속의 곰팡이처럼 번져만 갔겠죠.”

  


  나는 그분을 직접 응시하는 듯한 안쓰러운 눈길로 박물관의 안내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제 뻬레쉬트의 중반부를 지나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을 소개한 뒤 요셉의 어린 시절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진행되고 있을 빛의 변형이 어떠한 형태일까 나는 다시 궁금해졌다. 그러한 궁금증은 신비 현상에 대한 기대를 갖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일탈 욕구와 닿아 있을 게 틀림없었다. 역시 열등의식이었다.

  나는 가슴을 펴고, 가다가 체험하고 있을 신비 현상보다는 그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나의 이성을 더 사랑하기로 했다. 역시 그분은 가다의 음성을 통해 나의 귓가에 들려지는 그분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

  가다는 다시 입을 열어 이야기를 이어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다는 뭔가 말을 시작하려다 말고 잠깐 웃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아마 그분이 내가 그녀를 질투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 같았다. 그녀는 약간 피곤해 보였지만 힘을 내며 말하기 시작했다.

  “잘 말해주었네. 데이비드. 그대의 말대로 우리는 오랜 시간을 인내해야 했어. 그런 측면에서 부활이라는 개념은 어느 날 사람들 사이에서 저절로 생겼다고 말할 수 있겠지. 여기서 저절로 생긴다는 표현은 내가 사람들의 생각을 도와왔던 일들을 무시하고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진실이 진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아무렴 어떨까.

  아무튼 부활을 처음 말하기 시작한 게 히브리 족속 유대인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야. 페르시아에서 처음 생겨난 부활이라는 개념이 지니는 정신적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잘 거야. 그렇다면 그들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그들 마음속에서 선민의식을 지우려고 노력하는 일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아야 해.

  천사에 대해서는 유대 예언서의 기록자들이 그룹이나 스랍이라고 묘사한 환상 가운데서 본 형상에서만 날개를 묘사하고 있어. 그 밖에는 대부분 천사라고 번역되는 신의 사자들에 대한 묘사로서 언제나 ‘그 사람’이거나 신의 사자라는 뜻의 ‘말라크’라는 표현으로 천사를 지칭하고 있지. 따라서 천국에 날개 달린 천사들이 날아다니고 있다고 믿는 걸 넘어서 사람들에게 허황된 교훈을 가르치는 태도는 옳지 않음을 알아야 해. 사람들이 날개 달린 천사의 이미지 앞에서 얼마나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될지 왜 모른단 말인가.

  악마나 마귀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기 때문에 오해가 끊이지 않고 있어. 예언서에서는 심지어 바벨론 제국과 두로 왕국을 사탄으로 묘사하고 있을 정도야. 사람들이 사탄의 본명이라고 알고 있는 루시퍼란 이름은 바벨론을 사탄으로 묘사할 때 등장한 샛별에 대한 표현에 다름 아니지. 그리고 정작 ‘악마’나 ‘마귀’가 아닌 ‘대적자’나 ‘참소자’의 의미를 지닌 사탄이라는 일반적인 명칭은 욥이라는 동방 의인의 이야기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어. 또한 이 욥이 페르시아 사람일 수 있으며, 페르시아에서 선악 사상과 천사와 악마와 같은 이야기들이 처음 유행했다는 사실은 모두들 외면하고 있다는 점을 돌아봐야 해.

  나의 아들이 예수라는 이름으로서 불완전한 사람의 육신을 취하고 땅 위에 머물던 당시, 그가 천국과 지옥이라는 표현과 사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진실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야. 그는 동시대에 불교와 유교 사상이 동방에서 퍼져나가고, 헬레니즘 문화와 철학이 서방에서 태동하기 시작하는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영적인 성취가 이루어져야 할 것을 알았어.

  그는 동과 서의 중심에 위치한 예루살렘에서 지상에서 가장 고귀한 자존의식을 나타냈던 거야. 그리고 마침내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운 종교의 형태로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신을 믿게 된 마당에 저 유명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영접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그는 알고 보니 동과 서의 중심에서 지상에서 가장 고귀한 자존의식을 나타낸 존재였다고 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별로였다. 그를 둘러싼 신화적인 사건들은 신이 벌인 일이라면 짜증나는 일이었고, 사람들이 꾸며낸 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신의 아들이 세상으로 내려와 인류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죽었다는 것은 누구에게 적용되더라도 지나치게 자의적이었다. 적어도 신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더구나 그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뒤 승천하였는데, 그 후 세상에 죄악이 가득 차기까지 기다렸다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내려온다니. 그건 제멋대로이다 못해 자아도취 증세가 심각한 환자가 아니고서야 생각할 수 없는 태도였다.

  중요한 것은 심판이나 구원이 아니었다. 세상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면 사람들의 성욕 지수와 분노지수와 아이큐 지수와 식습관에 따른 삶의 방식과 같은 것들을 처음부터 잘못 설계한 이유부터 밝혀야 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소나 양처럼 풀을 먹고 살도록 설계만 되었더라도 많은 것이 바뀌었을 터였다.

  세상에 대해서 무언가 말을 내고 설명을 하려고 한다면 화두를 제대로 결정해야 했다. 적어도 심판이니 구원이니 하는 것은 신의 머리에서 비롯된 발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볼 때 지금 내게 찾아와 합리적인 화법을 지속하고 있는 그분은 차원이 달랐다. 그분이야말로 정말 신이 아닌 다른 존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분은 어느 특정한 종교를 지지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모르긴 해도 그분이라면 종교 다원주의적인 결말조차 넘어서는 결론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으리라. 그것은 그 때까지의 나의 확신이었다.

  


  나는 마침내 그분 앞에서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나는 그분께 차분한 목소리로 한 가지를 지적했다. 그것은 그분의 아들이 감당했을 고독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분의 아들은 심판이니 구원이니 하는 낮은 개념으로부터 빚어질 모든 오욕까지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람은 말을 할 수 있는 짐승으로서 태어났다. 사람은 말을 바로 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짐승을 죽이고 영을 소유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열등의식의 형태로 드러나는 짐승의 영을 자기 안에서 제하여 버리는 날을 맞이할 때, 영원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그분의 아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 사람들이 제단 앞에서 짐승을 죽이고 피를 흘리는 일의 엄중함을 깨닫도록 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말의 진화 단계에 이르지 못한 가운데 지혜를 알지 못하던 고대인들은 열등의식이라고도 불리고 ‘악’이라고도 불리는 짐승의 실체를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분의 아들은 희생을 하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당신은 처음부터 그가 짝사랑을 시작하려는 걸 알고 있었군요. 그는 외로웠을 겁니다. 나는 당신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면, 당신들이 징그러운 존재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존의식이라는 건 대체 어떤 겁니까? 그건 외로움마저도 극복하게 되는 무한한 힘인가요? 아니면 자존의식 자체가 사랑입니까? 영의 밀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또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거죠?”

  그분은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대답을 했다. 나는 그분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그분이 그와 같이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는 일을 반복해서 접하자니 마음이 평안해졌다.

  “데이비드. 다시 말하지만 나는 내가 어미 영이고, 내 아들이 새끼 영이라는 식의 평가를 좋아하지 않아. 그런 관점에서 과거 콘스탄티누스가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열어 삼위일체 이론이 옳다고 결론을 내 버린 일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어. 그 미련한 고대 유럽인들이 성령이란 사람의 외부에서 찾아오는 게 아니라 사람의 속에 처음부터 존재해 있었다는 걸 알 리 없었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데이비드. 그대가 우리를 징그럽게 생각한다면 그게 옳을지도 몰라. ‘여호와의 증인’ 운영 센터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브룩클린에 있는 걸 알 거야. 그들은 삼위일체 이론을 치를 떨며 싫어하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예수보다는 여호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어. 하지만 진실은 그들의 바람과는 반대야.

  영적인 차원에서 나와 내 아들과 사람들 속에 있는 성령은 일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어. 물론 우리 모두는 물질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삼위일체 따위는 애초에 불가능한 표현일지도 모를 일이야. 그리고 말했다시피 나의 아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혐오하다 못해 사탄 마귀라고 부르며 부정해 버렸어. 그렇다면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탄의 증인이 되어버린 셈이니 코미디가 따로 없군.

  데이비드. 영의 밀도가 높아진다는 것이 무어냐는 물음은 핵심을 찌른 질문이야. 1세기쯤 전에 찰스 테이즈 러셀이 그리스도교의 폐단을 참다못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게 되었을 때, 그가 주목하였던 부분도 바로 ‘영’이라는 대상이었어. 그가 판단했던 것처럼 영의 밀도를 높이는 일이 열을 내어서 장시간 기도를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지. 하지만 종교 회복운동과 같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야.

  마틴 루터가 반박문을 작성하여 가톨릭의 폐단을 지적하고 나선 후 그가 느꼈을 죽음에 대한 공포는 외로움과 비견할 만 해. 하지만 찰스 테이즈 러셀이 기존 교단의 통념과 맞서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려든 행위와 그 후 그의 행보에 있어서 외로움이나 공포와 같은 치열함과 관련지어 생각하기는 어려울 거야. 그런가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떠했나? 그들은 유대교도들과 로마 권력자들 앞에서 목숨을 걸고 믿는 바를 전하였고, 실제로 대부분 목숨을 잃었지.” 

  그분은 지금 어떤 가치 지상주의와 관련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분은 루터의 개혁은 위험을 감수하였으므로 가치가 있고, 러셀의 개혁은 비교적 쉬웠으므로 가치가 떨어진다는 설명을 하려는 게 아닐 것이었다. 나는 주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력을 높였다.

  “나의 아들의 치열함과 그의 제자들의 치열함과 루터의 치열함이 갖는 의미를 아직 모르겠나, 데이비드? 이미 말했지 않은가. 영이라는 것은 상대적이며 심화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이야.”

  순간 나의 머릿속에는 섬광이 지나가는 듯한 작용이 일고 있었다. 놀라운 일은 그 섬광 속에 이미지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미지는 반짝이는 듯했다. 그렇지만 작은 보석이나 허공의 빛 같은 건 아니었다. 나는 그 이미지와 영의 속성에 관한 고민을 함께 떠올린 뒤 마침내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었다.

  그것은 거울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분이 그분의 아들을 창조한 뒤에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다고 말했던 게 기억났다. 그때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낀 건 그분의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복수의 형태로 존재해야 하고, 그들이 불완전함과 실패를 겪어야 할 것을 그분에게 가르쳐준 건 실체를 지니고 있었던 그분의 아들이었다. 그랬다. 그때 치열함이라는 표현이 처음 사용되었다.

  나는 그분에게 비로소 그분과 그분의 아들을 존경하게 된 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아! 나는 전에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하는 표현을 바이블에서 읽었을 때 비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렇지가 않군요. 소멸될 수도 있고 생성될 수도 있는 게 영이며,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것은 스스로 얻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군요.”

  그분은 나의 깨달음을 기뻐해주었다.

  “맞네. 언어와 대화와 영이 다르지 않으며, 그것은 상대적이면서 심화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 열등의식과 자존의식은 그러한 영의 실체라고 할 수 있어. 두려움이니 외로움이니 하는 것들은 영의 그림자일 뿐이야. 믿음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 역시 자존의식의 그림자일 뿐이지.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여호와의 증인들이 자랑하는 일치성은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오히려 걸림돌인 셈이야.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접한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체적인 평가를 가볍게 여겨선 안 돼.”

  나는 이때 탄성을 저질렀다. 그것은 내가 그분을 기쁘게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성과였다.

  “맙소사! 나를 제외한 나머지 60억은 모두 나의 거울이었군요.”

  “할렐루야! 데이비드! 아까까지만 해도 나는 그대가 곰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네. 하지만 이제 안심이군.”

  “하하. 이럴 수가! 당신의 아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난 여태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그는 너무나 놀랍습니다.”

  “그가 얼마나 멋진지 이제라도 알아보았다니 다행이군. 하긴 그가 광야에서 40일을 쫄쫄 굶고 있었을 때,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누렸던 영광과 존귀함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견디기 위해 애쓰던 모습은 나만 제대로 볼 수 있었지.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한 기록을 읽고는 그에게 어떤 악한 존재가 찾아와서 세 가지 유혹을 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건 내 아들이 제자들에게 말해준 비유였어.

  그는 세상으로 나가 수많은 영들과 부딪히며 좌절해야 할 것을 알았기에 사막에서 먼저 자신과 싸워야 할 필요가 있었어. 그에게 가장 큰 유혹은 세상의 왕으로 지내던 여호와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어. 하지만 그는 멋지게 이겨냈지.”

  “맞습니다. 그는 너무나 멋진 존재입니다. 그에겐 사람이 세상을 살아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차원으로 나가도록 하려는 것 이상의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 자체가 거울이 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 올리려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를 비춰서 서로의 모습을 밝힐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던 겁니다.”

  나는 다시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도 존재할 가치가 있었다. 나는 이전까지는 신세기의 시작을 알리며 보급된 기록의 결과가 분열과 타락과 세속화와 재생으로 반복되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그것을 부실한 저작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저 고대의 동방에서 너무나 빠르게 완성되어 버린 ‘부처’라는 자존의식의 다른 진행이었던 것이다.

  그분의 아들은 소름끼치도록 치열한 존재였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치열했지만, 자신의 영을 받은 사람들 역시 치열할 수밖에 없게끔 무서우리만큼 치밀한 안배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나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우리는 영원토록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될 것입니다. 그 방법이 아니고는 영원한 실존, 영원한 육체, 영원한 사람, 영원한 사랑 그 무엇도 불가능합니다. 마침내 사람들은 당신과 같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 우주 안에서 실재하게 될 것입니다.”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그분은 내가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뒤 이야기를 정리하려는 듯했다. 가다의 입에서 구현되는 말의 속도가 차분해진 걸로 보아, 그분이 더 이상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의미의 할렐루야를 외치는 농담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영이 세상에 충만하게끔 한 바탕에는 역시 나의 아들이 이룬 세상에 대한 첫 승리의 영향이 컸어. 그것은 우주 안에서 처음 발생한 영인 열등의식에 대한 자존의식의 첫 승리였던 거야. 승리에 관한 복된 소식은 사람들의 속에서 영의 씨앗이 될 게 분명했지. 승리 이후엔 악의 폭풍우가 그치지 않던 세상에 의의 등대가 하나둘 씩 생겨나기 시작했어. 이제 나의 기쁨은 다윗성에서 울려 퍼졌던 아름다운 시와 지혜의 말들이 세계의 곳곳에서 들려오는 것을 기다리는 일이야.

  나는 석가모니의 영을 받은 자들이나 예수의 영을 받은 자들을 가리지 않고 그들이 나의 속성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왔어. 그렇지만 나의 아들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만큼, 아름다운 열매는 예루살렘의 서쪽에서 많은 결실을 맺었지.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고 말한 바대로, 죽기까지 세상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한 그의 실천은 힘을 드러냈어. 그리고 복된 소식으로서 퍼져나갈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석가모니가 사람들에게 부처를 나누어 주어 세상에 세워지도록 한 것은 탑이었어. 그것은 나의 아들이 계획한 것과 다르지만은 않아. 하지만 나의 아들은 그 탑들이 빛을 발하기를 원했던 거야. 그것은 등대이자 거울이었어. 마침내 세상을 비추는 등대와 거울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거리에서 노숙인들을 돕는 작은 손길에서부터 수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일을 실천한 빌게이츠에 이르기까지, 그 사례를 말하려면 몇일 동안 밤을 새워도 불가능할 테지.

  물질의 축복을 받은 야벳의 후손들 사이에서 노예 해방이 선언되고, 민주주의가 태동하고, 가장 먼저 기부문화가 형성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정착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야. 그것은 물질문명의 세계를 끝장내어 버리려고 벼르고 있는 용을 결박해 둘 수 있는 유일한 쇠사슬인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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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선달 |  2011-08-14 오전 7:31:0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다녀갑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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