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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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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15 회
2011-08-09 오전 11:15 조회 4130추천 3   프린트스크랩
▲ 그곳의 사람들이 짓는 미소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생각해 보기를 원해.

                                                            15


  석가모니가 우주 안에 깃들어 있는 신에 관한 이야기와 신과 사람들 간의 사연에 대해 정립하기 위해 취했던 영적 기반은 인도에서 가장 유행하던 ‘윤회사상’이었다. 그것은 마치 신의 아들이 페르시아에서 유행하던 선악 사상을 기반으로 예수라는 이름과 그의 영이 그려질 수 있도록 한 일과 다르지 않았다. 

  한 가지 놀라운 일은 석가모니가 세상에 내보인 생각들과 이야기들이 열등의식 위에 서 있는 여호와와 자존의식 위에 서 있는 예수의 중간에 해당하는 교묘한 지점에 위치한다는 사실이었다. 석가모니의 ‘삶’ 또한 그랬다. 그는 무하마드처럼 승천을 한 경험을 고백하거나 예수처럼 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석가모니의 영을 따르는 추종자들도 그러했다.

  상대적으로 예수의 추종자들은 공격적인 마케팅을 택했다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교인들은 좀처럼 타 종교에서 말하는 내용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는 면이 있었다. 물론 타 종교의 신자들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그들처럼 눈을 감고 귀를 닫고 경기를 일으키며 달아나지는 않았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출석해서 몇 구절의 경전을 읽고, 교훈적이거나 희망적인 설교를 하는 목사에게 박수를 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샬롯과 함께 다니던 교회에 더 이상 출석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샬롯은 나에 대해 그녀를 시험하는 사탄 정도로 취급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때 값비싼 정장을 입고 귀금속을 착용하고 있던 목사의 살찐 얼굴을 더 이상 보지 않겠다고 한 결정에 대해서 후회는 없었다. 

  나를 찾아온 그분은 경건한 프로테스탄트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따로 설명을 하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나는 다만 내가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된 이유를 알고 있을 그분이 나를 지지해주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건 열등의식에 의한 변명과도 같은 마음이었다.

  나는 마음을 좀 더 비울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동양인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을 하는 방식으로 신과 가까워지려 하는 태도에 의미가 있었음을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분의 다음에 하게 될 말을 기다렸다. 아마도 석가모니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좀 더 거론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분이 석가모니에 대해서 말을 시작했을 때 나는 영안이 열리기 시작한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어쩌면 조금만 더 순조로울 수 있다면 환상을 보거나 방언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데이비드. 석가모니의 가르침들에 대해 말하기 전에,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알아야 할 몇 가지 부분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듯하네. 우선 그들이 당연한 것처럼 알고 있는 ‘복음주의’라는 것은 그렇게 오래 전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그것은 도르가를 죽음에서 살려낸 베드로의 일화 이후로는 더 이상 나의 영이 이적을 허락하지 않았음을 의미해. 물론 죽은 것 같기도 하고 가사상태인 것 같기도 한 유두고를 살려낸 바울이 있긴 하지만, 생명에 관한 소생에 관해서라면 그 시대에서 전설은 끝이 난 셈이지.

  나와 내 아들이 복음주의를 지지했다면, 그 후로도 더 오래도록 예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이적을 만들어 냈어야 하는 거야. 최소한 바울은 방언과, 예언과, 병 고치는 은사가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것처럼 말했으니까.

  그들은 콜로세움으로 끌려가서 사자 밥이 되고, 정적들에게 모함을 받아 톱으로 켬을 당하고, 마녀사냥의 희생물이 되어 산 채로 화형당하기까지 순결한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었어. 그렇다면 그들 가운데는 선배들과 동일한 능력을 보이는 자들이 가끔씩은 나타나야만 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기록이라는 것이 구전에만 의존하지 않고 질 좋은 종이와 잉크로 남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좀처럼 전설적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해.

  소위 방언이라는 것은 1901년 1월 1일 새벽에 미국 캔자스 주 토피카에서 개최한 부흥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날 한 여자가 방언을 하기 시작했어. 그날 이후로 오순절 운동이 시작됐지. 다시 말해 그 이전까지 수십 세기에 걸쳐서 예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아직도 방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던 사람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거야.

  방언이라는 것이 요한이 기록한 대로 예수가 입김을 내뱉어 지상에 남기고 간 성령에 의한 작용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성령은 어째서 1900년 가까이 지상에서 사라졌던 방언의 은사를 갑자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한 걸까? 또 어째서 방언을 하게 되려면 큰 소리로 빨리 기도를 해야만 하는 걸까? 그리고 혹시 시간이 난다면 방언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사람들의 체험담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네. 그럼 그들이 신들림 현상이 아닌 스스로의 속에서 나온 자기 암시적 현상에 의해서 방언을 하였다고 고백하는 걸 들을 수 있을 거야.

  다른 한 가지 지적은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 대해 들을 필요도, 읽어 볼 필요도 없다고 믿는 그들 중 대부분이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기록된 내용을 전체적으로 스스로 읽어 볼 생각도 않는다는 사실이야. 그리고 기록에 관한 여러 견해들이 있을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배들이 함부로 이단이라고 말하는 일에 있어서 무조건적으로 동의하는 일이 얼마나 잘못된 태도임을 알아야 해. 즉, 루터가 등장하기 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영을 올바로 따르고 있다고 믿었는지 그 수효를 짐작이라도 할 수 있길 바라.”

  나는 그분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보스턴 대학에서 비교종교학 수업을 들었던 일 외에도 내가 그분의 대화상대가 될 수 있는 요건은 몇 가지 더 있었다. 그 중에 하나는 바로 ‘이단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나는 오늘날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악의적이지 않은 가운데 나의 심정을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에게 있어서 프로테스탄트는 파리이며 가톨릭은 똥이었다. 파리는 내게 다가와 아무런 이로움도 없이 귀찮게만 했다. 그리고 똥은 어떤 각도에서 보아도 똥이며 파헤쳐 보아도 똥이었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똥은 치워버려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않겠는가. 가톨릭이 근대에 이르기까지 조장하고 저지른 살인이 몇 건인지 세어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히틀러와 스탈린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게 그의 영혼을 위해 이로울 것이었다.

  유대교의 이단인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단을 낳았다. 그리고 오늘날 어렵사리 구입해서 읽어볼 수 있는 코란의 내용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복합적인 이단이었다. 그밖에도 군소적인 이단들이 많을 테지만 안식일교와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교 정도는 검증된 이단이라 할 수 있었다.

  중요한 사실은 이단이라고 규정되는 후발주자들이 최고의 도덕성을 지니며, 원리에 충실하다는 점이었다. 양태만 놓고 보자면 이슬람교와 안식일교와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교는 세속성의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물론 그들의 건너편에는 신과 함께 한 주류라고 주장하는 세속적인 집단이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단들은 영적으로 사나운 감이 있었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확실히 사나웠다. 그건 과거 예루살렘에서 주류층을 찾아가 싸움을 걸던 선지자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전부터 주류로부터 이단이라고 규정되는 개인이나 단체를 ‘선지자’라고 보고 있었다. 언제나 주류는 타락을 하기 마련이었다. 고대의 유대교는 늘 타락했고, 늘 선지자가 필요했다. 같은 맥락에서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에게 선지자이며, 여호와의 증인은 프로테스탄트의 선지자였다.

  좀 더 시야를 넓히자면, 주류와 이단의 대립 양상은 유일신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불교 역시 어느 시점에선가부터 불상을 만들어놓고 절을 하는 이단화가 벌어졌다. 석가모니 사후 500년까지의 정법 시대에 불상을 모시지 않았다는 건 정설이었다. 그러다가 알렉산더 대왕의 침공으로 인해 우상을 섬기는 헬레니즘 문화와 바벨론 문화가 인도 서북부 간다라 지역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불자들이 불상을 만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원불교라는 신흥 교단에서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석가모니 시대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기존 종단의 입장에서 보자면 원불교는 이단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언제나 변질된 자들이 주류에 서 있고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자들이 탄압을 받는다는 일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유일신교와 비교하자면 기존 불교 종단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아우르는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으며, 원불교는 여호와의 증인과 같았다.

  물론 석가모니의 영을 지닌 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을 지닌 자들의 행태와 비교된다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일 게 분명했다. 실제로도 불교계에선 이단의 문제로 서로 헐뜯고 배척하는 일은 미미했다.



  그분은 석가모니를 소개하기에 앞서서 그리스도교의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하나는 복음주의며, 다른 하나는 방언이었다. 그분은 나처럼 가톨릭을 똥으로 비교한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유일신만을 믿는 그들을 지지할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데이비드. 말을 심하게 하지 않는 게 옳다면, 생각을 점잖게 하는 것도 옳고 그름으로 나뉠 수 있다네. 참고하게.”

  나는 가슴이 뜨끔 했다. 하지만 그분께 사과를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분이 종교재판에 의해 고문을 당하고 죽어갔던 최소한 수천 만 명은 될 억울한 사람들을 대변해 주지 않으려 한다는 게 섭섭할 뿐이었다.

  그분은 그러한 나의 생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석가모니를 말하기에 앞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자신의 아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내 아들이 땅 위에서 가르친 내용 중 사람들 사이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자 요한에게 가르친 다음 내용은 위에서 말한 것들에 대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네. 한 번은 요한이 예수에게 찾아가 이렇게 말했지.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어.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나의 아들이 전하고자 했던 의미는 어려울 이유가 없다네. 곧 예수의 영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충성심의 여하에 상관없이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이야. 그리고 앞서서 말했지만 우리는 충성심이 지나친 자들을 신뢰하지 않아. 대개는 열등의식으로부터 비롯된 태도인 경우가 많으니까.

  궁극적으로 나의 아들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사람들과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수고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자라면 이단이라고 할 수 없는 거야. 그리고 그들 가운데 사리사욕을 위해 나와 내 아들의 이름을 파는 자가 있다면 그냥 내버려 두길 바라. 왜냐하면 그들의 잘못보다 그들을 정죄하는 자들의 속에서 지펴지는 열등의식을 대하는 일이 더 안쓰럽기 때문이야.”



  역시 그분은 명쾌했다. 하지만 가톨릭이 저지른 죄악을 과잉충성 정도로 치부해 버리고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는 결론인 것 같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분은 이번에도 변명은 생략한 채 처음 하려고 했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제 나의 아들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행한 승리와 가시적인 성취에는 비할 수 없지만, 또 다른 가능성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자 해. 다시 말해 나의 영과 다르지 않은 석가모니의 영에 대해서 말하려는 거야.

  흔히 복음주의자들은 석가모니의 영을 사탄의 영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 그것은 그들이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고, 마리아의 조각상과 베드로의 조각상 앞에서 기도하는 행태를 생각해 볼 때, 불상 앞에서 기도하는 이들이 크게 타락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야.

  다만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중국을 거쳐서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기복신앙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을 뿐인데, 최소한 석가모니의 영은 진리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악한 것들이라 해도 침해할 수는 없는 것이지.

  잠시 처음의 부분을 되돌아보자면, 나는 날개가 달리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천사 같은 것은 창조한 일이 없어. 따라서 천사가 타락해서 되었다는 사탄 같은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거야. 그리고 다시 처음에 강조하였던 부분을 말하자면, 사람은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형상을 대신할 수 있는 천사이며, 사람은 육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의 형상을 욕되게 하는 사탄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잊지 말게. 단순 명료한 진실을 바탕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은 진리라고 할 수 없어. 서양에서 기록된 기록들과 동양에서 기록된 기록들은 모두 입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들을 서둘러 글로 남기려 한 결과들인데, 과연 그 안에 담긴 단순명료한 진실은 몇 가지나 될까 생각해 보게.

  그렇다면 기록 속에 담겨 있는 주제 외의 것에 지나치게 분석적으로 집착하는 태도는 불필요한 셈이야. 그리고 그 ‘주제’야 말로 영을 글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만큼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야만 나의 이야기는 계속될 가치가 있을 테니까.”

  그랬다. 진리는 단순 명료한 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가톨릭은 유럽 전역에서 양민들의 재산을 약탈했고, 그러기 위해 이단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살인을 자행했다. 따라서 그들은 신을 섬기는 집단이 아닌 강도의 무리이며 해적의 무리였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그분은 잠시 떼었다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 ‘천하의 괴로움은 이 몸뚱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 몸은 괴로움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 근심과 두려움이 한량없다.’

  석가모니가 한 말이네. 위와 같은 고백은 내가 앞에서 한 이야기에 비추어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겠나? 즉 그의 영이 깨끗하다는 증거야. 사탄의 영이라느니 하는 소리는 어림도 없는 수작이지.

  흔히 석가모니의 제자들 중에서는 그들의 스승이 지닌 영과 그가 여러 말들로 묘사하고 있는 주제가 무념무상의 세계로 도착해서 끝이 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어.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석가모니에 관한 증언들은 육체를 초월한 신적인 행적에 의해 묘사되고 구전되고 있지. 그것은 여호와라는 이름과 예수라는 이름의 주변을 싸고 있는 신비적인 증언들과도 같은 양상이야. 그런데 그들은 정작 신격화 되고 추앙받는 현상에 만족하지 않고 우주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한 사실에 집중하길 원했어.

  자신들의 종교적 대상을 신뢰하는 이들은 과거에 신적인 능력을 행하는 존재가 실재하였으므로 믿고 추앙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지. 하지만 정작 그 신적인 능력자의 관심사는 온통 ‘육체와 마음’에만 집중되고 있었으니 아이러니도 그런 아이러니가 없다네. 석가모니가 남긴 다음과 같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사람은 항상 생각을 해야 한다. 먹을 것을 언제나 적게 먹을 줄 알면 그 때문에 고통스러워 여위어지고, 조금 먹어 소화되고 목숨 보전하리라.’”

   


  그분은 잠시 떼었다가 나의 반응이 없자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물론 석가모니는 ‘무념무상’과 관련한 생각들을 많은 말들로 강조하기도 했어. 따라서 많은 추종자들은 선문답이나 즐기는 일과 허무주의적인 가치관을 말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모르게 된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잘 알려졌다시피 석가모니는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고, 바로 말하고, 올바로 행동하고, 올바로 목숨을 유지하고, 바르게 노력하고, 올바로 기억하여 판단하고, 바르게 마음을 안정한다는 8정도를 자신의 바탕에 두고서 세상에 가르침을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해.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는 당시 인도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관념적인 철학을 실존으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던 거야.

  데이비드. 석가모니가 동양의 사상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설명의 맨 마지막 부분을 주목하면 알 수 있다네.

  ‘악한 사람 백 명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명의 착한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고, 착한 사람 천 명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명의 다섯 계명을 가지는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며, 만 명의 다섯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명의 수다원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고, 백만 명의 수다원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명의 사다함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며, 천만 명의 사다함을 공양하는 것이 한 명의 아나함을 공양하는 것만 못하고, 일억 명의 아나함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명의 아라한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며, 십억 명의 아라한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명의 벽지불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고, 백억 명의 벽지불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명의 삼 세제불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며, 천억 명의 삼 세제불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 명의 생각 없고 머무름 없고 닦음 없고 증득함이 없는 사람을 공양하는 것만 못하느니라.’

  위와 같은 말과 표현이 흔히 사람들이 믿고 상상 속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세계에 대해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석가모니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모든 세대에 있어서 슈퍼스타로 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같은 이유를 공유하고 있어. 그것은 바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사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잘 알 수 없는 외계에 대해 설명했다는 사실이지.

  석가모니는 한 명의 생각 없고, 닦음 없고, 증득함이 없는 ‘사람’이 온갖 신적인 권능을 행하는 부처보다도 고귀하다고 말하고 있어. 그것은 예수가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지 않았더냐.’고 말한 내용과도 다르지 않아.

  나는 줄곧 한 사람의 내면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자존의식이 무엇이며, 그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설명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 거야. 그러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존의식을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필연적으로 그들이 나면서부터 소유하고 있었던 열등의식에 대해 말하며 그것을 죽이는 일에 집중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해.”



  그분은 정말로 석가모니에게 호의적이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당사자의 입장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렴 어떨까. 어차피 이야기의 주제는 ‘맹신’에 대한 부분으로 옮겨가 있었다.

  사람들은 제가 저지르면 로맨스고 남이 저지르면 불륜이라고 말하는 일에 익숙했다. 세계 4대 종교에 속한 가운데 열심을 내는 사람치고 스스로 맹신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는 자가 과연 한 명이라도 있을까. 그들은 모두 자신이 진리에 서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나머지 종교에 속한 자들은 맹신을 하고 있는 상태라고 여기고 있을 게 분명했다.

  공통적인 현상은 모두들 사람보다 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분은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분은 여호와에 대해서 설명할 때도 할례는 히브리 여성들의 자궁질환을 예방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히브리인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오늘날까지 할례를 신에 대한 경건한 행위나 약속의 이행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그분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심정이 이해가 되는 듯했다. 그것은 세계 4대 종교와 나머지 하나의 신흥 종교까지 생각해 볼 때 충분히 고려해 볼만 한 신에 대한 배려였다.

  진화론이라는 신흥 종교는 박테리아의 편모가 회전자와 고정자의 톱니 구조로 맞물려 있고, 회전자가 분당 만 번 이상의 회전을 하여 편모를 움직여서 이동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들의 구동 시스템이 저절로 생겨났을 거라고 하는 맹신에 빠져 있었다.

  나는 비록 유신론자가 된 지 불과 몇 시간 되지 않았지만 어느새 진화론이 득세하는 세상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는 상태였다. 세상은 그렇게 무지와 독선과 맹신으로 충만한 가운데 진리가 눈 녹듯 녹아버리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우선하는 신흥종교는 신을 부정하고 있었고, 세계 4대 종교는 신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종교인들이 신보다 사람에게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중요한 결론은 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신뢰할 만한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천국과 지옥, 사람들의 삶 속에서 적용되어야 할 열등의식들, 그리고 그리스도와 석가모니가 표현했던 자존의식들과 같은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데 이때 그분은 석가모니와 관련한 한가한 예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석가모니는 말했네. ‘사람은 항상 생각을 해야 한다.’ 또 이런 말도 했지. ‘한 명의 생각 없고 머무름 없고 닦음 없고 증득함이 없는 사람을 좇으라.’ 어떤가? 석가모니의 영이 과거 히브리인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던 바알신을 섬기는 이방인들의 영과 같아 보이나?

  이제는 석가모니와 불교를 분리해서 생각하려 들거나, 불경에 대해서 논리적인 오류를 찾으려 드는 태도가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거야. 사실 후대의 석가모니의 추종자들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경구로 모든 생각들을 정리하기를 원했으나, 그것은 가뜩이나 어려운 가르침들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데에 기여할 뿐 도움이 되지 못했어.

  석가모니가 생전에 남긴 여러 이야기들은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어. 그리고 석가모니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과 같은 견해와 복잡한 생각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학습하고 읽고 외우고 가르치는 과정의 열려 있는 상태와 사람의 내적인 성장에 관해 주목하길 원했지.

  나는 석가모니가 열반과 해탈이라는 것의 상태를 자존의식을 깨달은 사람의 상태로 말하고 있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거야. 석가모니는 좀처럼 자존의식의 가치에 대해서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을 알았기에, 대부분 열등의식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비유들을 말했지.

  석가모니가 왕사성의 연화라는 여인을 교화하였던 내용은 허영과 관련한 교훈을 말하고 있어.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고 연연하는 심리도 결국은 사람의 열등의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지. 허영이 자존의식이 아니고 열등의식인 이유는 자꾸만 드러내려고 하고 자랑하려고 하는 행위의 열매가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것이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임을 알 수 있어야 해.

  석가모니가 사위국 기원정사의 한 동산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한 수도자는 육신의 음욕과 다투다 못해 스스로 할례 중의 할례를 감행하려고 도끼를 들었다는군. 곧 석가모니는 그의 일을 꿰뚫어 보고 그 앞에 나타났어. 그리고 ‘너는 어찌 그다지 어리석으냐. 도를 얻으려면 먼저 그 어리석음을 끊고, 그 다음에 마음을 제어하여야 한다. 마음은 선과 악의 근본이다.’ 하며 가르쳐서 그 제자가 깨달음을 얻도록 하였지. 이 또한 석가모니가 선악의 열매란 곧 육신에 갇힌 상태를 뜻하며, 열등의식으로써 드러나는 실상에 관해 설명한 예라고 할 수 있다네.

  그 밖에도 석가모니는 거리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던 바사익왕을 칭찬하는 상인과 비웃는 상인의 예에서도 열등의식의 투영된 마음과 자존의식이 투영된 마음에 대해서 설명했지. 이 때 석가모니는 훗날 왕이 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 상인에게 말했어.

  ‘옛날 저 나라 대왕이 네거리에서 겸손한 행실을 보일 때, 그대는 바사익왕이 마음을 굽힐 줄 아는 일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였소. 왕께선 그 좋은 생각의 종자를 심었기 때문에 지금 스스로 그 결과를 얻은 것이오. 지금 왕이 된 것은 어떤 용맹으로 된 것이 아니고, 선을 하면 복이 되고 악을 하면 화가 되는 것이오. 다 제가 짓는 것이고, 신이나 귀신이 줄 수 없는 것이오.’”



  방금 그분이 말한 내용은 의미심장했다. 그것은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진리’였다. 인과응보는 신이나 귀신도 참견할 수 없는 불가침의 대원칙이었다. 하지만 칼뱅의 가르침을 맹신하는 자들이라면 입이 근질근질할 게 분명했다.

  그분은 석가모니가 예수와 겨루게 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해두었던 게 아닐까 생각될 만큼 정금과 같이 아름다운 예화들을 계속 들려주었다.   

  “또 석가모니가 기사굴산의 브라만 계급의 농부들을 만났을 때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가르침을 남기기도 했어.

  ‘대개 농사를 짓고 목축하거나 또는 해와 달과 물과 불에 제사하거나, 설사 기도하여 하늘을 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사를 해탈하여 영원히 사는 법은 아니다. 그것은 도의 지혜가 없기 때문에 다시 생사의 세계에 떨어지는 것이다.’

  위의 설명은 영적인 세계를 설명하는 아주 훌륭한 묘사였어. 설사 기도하여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한다 하여도, 글을 깨닫고 설명을 할 줄 알고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돌아 볼 줄 모른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었던 거야.

  그 밖에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무수한 예화와 함께 기록되어 있지만, 모두 마음의 구원과 마음의 멸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어. 그리고 그처럼 동양인들이 일찍부터 마음과 깨우침에 집중할 줄 알았다는 의미는 그들이 비록 세상 창조의 기록과 종말의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하지만, 나와 내 아들의 영을 받아 구원에 접근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지 않은가.”

  그분이 지적한 마음의 구원과 마음의 멸망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것은 믿음이라는 표현이 갖지 못하는 섬세함이 있었다. 그분은 석가모니의 시대의 믿음과 여호와와 예수의 시대를 관통하는 믿음을 통시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믿음이라는 것은 소식과 인지에 따른 조건적인 것이기 때문에 행운과 다름없는 상태임을 다시 말하고 있는 거야. 곧 어떤 대상이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를 마음에 믿는 상태가 아니라, 실행된 일의 의미를 깨닫고 진리에 합당하게 마음에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해. 믿음을 모르고 죽은 어린아이들의 영혼이 어디로 간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의미를 깨닫고 진리에 합당하게 마음에 받아들인 상태가 아닌 것이지.

  데이비드. 믿음에 대한 오해는 여호와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사망의 속성인 열등의식을 죽이지 못한 채 진리를 맛보려 하던 자들로부터 시작됐어. 그들은 첫 살인이 일어났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찾아내야 할 교훈이 열등의식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거야.

  그들은 노아의 시대에 여덟 명의 사람 외에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육체를 사랑한 결과라는 것을 알았지. 그러나 세상의 손가락질을 아랑곳하지 않고 방주를 건설한 노아의 의가 여호와에 대한 믿음에 있다고 단정 지어 버린다면, 노아가 지녔던 자존의식은 어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먹고 마시며 육체를 사랑했던 첫 종말을 맞은 사람들을 기억할 거야. 그리고 그들을 떠나 있었던 노아는 여호와 앞에서 믿음을 증명하기 이전에 이미 의인이었으며, 내 아들이 기록하는 생명의 리스트에 이미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음을 알아야 해.

  노아는 방주를 건설하는 거창한 일을 통해 구원을 받은 게 아니야. 노아는 방주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받고 믿기 시작한 때에 비로소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지. 자존의식을 가진 노아는 세상과 벗하지 않기를 작정하고 구별된 삶을 실천하는 순간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볼 수 있어. 그리고 그의 의, 그의 자존의식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빼앗길 수도 없는 고귀한 것이지 않겠나.

  나는 내 아들이 세상에 내려가 죽기 전에 조로아스터와 석가모니와 공자와 같은 이들의 속에서 나의 영이 진동되고, 그들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어. 그렇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나의 아들이 세상에 빛을 비추고 진리가 퍼져나가도록 하기 전에 스스로 어둠이 되어 희생을 자초하였다는 사실이야. 그는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율법을 강요하고, 멸망과 회복을 통한 ‘변심’의 선두에 서 있음으로 해서 신을 믿거나 신을 바라보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어.

  나의 아들은 훗날 사람들이 나를 믿는다고 말하고, 어떠한 이름이 붙어 있는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며,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들이 지니게 될 가증함을 내가 체험하기를 원치 않았던 거야. 그는 나를 위해 오랫동안 스스로를 모욕했어. 그리고 마침내 땅에 내려가 사람들의 손이 자신을 심판하도록 할 때에는 자신의 옛 모습을 사탄이라고 부르며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지.”



  그분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믿기에, 다시 한 번 영과 영혼에 대해 이야기 하려는 듯했다. 그것은 여호와와 석가모니와 예수의 이름으로 언급된 ‘영혼’이라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걸 의미하는 내용이었다.

  “데이비드.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열고 생각해보도록 해보게. 나는 저 먼 다른 은하계에 천국이라고 불릴 만한 별들을 조성해 놓았어. 그리고 지구에서 다양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 중에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택해서 옮기려고 한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부활’을 핵심적인 실행의 방식으로 택할 때 반드시 영혼이 몸속에서 나오고 다시 새로운 몸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걸까?

  나는 지구에서 살았던 300억 명의 사람들의 몸을 구성하는 유전자의 염기서열 순서를 대충 생각해도 모두 떠올릴 수 있어. 그리고 사람들이 기억이라고 부르는 모든 생각들을 저장하는 뇌의 주름도 모두 알고 있어. 원한다면 그대가 어릴 적에 길렀던 점박이 애완견과 그 녀석이 마당에서 잡아먹은 쥐까지도 다시 부활시킬 자신이 있으니 내게 도전해보도록 해보게.

  아무튼 나는 지구보다도 날씨가 좋고 달도 여러 개가 번갈아 뜨는 한 행성에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유전자 조건과 뇌의 주름을 지닌 그대로 사람들을 재생시키기 시작했어. 필요하다면 재생의 과정에서 유전자의 조합을 조금 바꿔서 좀처럼 다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육체가 되도록 하는 것도 괜찮겠지. 아이큐도 조금은 높게 하고, 우울함을 잘 느끼지 않고 쾌활한 마음을 늘 유지할 수 있는 성격도 부여할 수 있을 거야.

  자. 이제 이렇게 내가 새롭게 마련한 천국이라고 불릴 만한 행성에 생명공학적인 방식으로 부활시켜 놓은 생명체들을 살펴보도록 해봐. 아마 그들은 과거에 지구에서 지녔던 모습과 생각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을 거야. 그리고 과연 그들에게 영혼이 있는가를 찾아보도록 해봐. 잘 모르겠다거나 확신할 수 없다거나 하는 대답을 나는 원치 않아. 또는 무조건 영혼이 없다고 말하거나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일을 원하는 것도 아니야.

  이제 사람이 죽은 뒤에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는지 아무 것도 빠져나오지 않는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 거야. 다만 한번만 더 그곳을 다시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라. 내가 그곳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 가운데 부활시켜 놓은 존재들 중에 자신과 닮은 얼굴이 있는지를 말이야.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찾지 못하겠거든 그곳의 사람들이 짓는 미소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생각해 보기를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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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선달 |  2011-08-11 오전 10:08:2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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