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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둑행사장에서 이재룡, 이창호 부자와 스승 조훈현(맨오른쪽). 무표정하고 묵묵한 성격을 타고 난 것도 있지만 어린나이에 입단해 나이 많은 선배들과 대국하면서 항상 조심하고 겸손한 표정관리를 해야했기에 더더욱 '포커페이스' 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기념사진을 찍을 때도 뚜~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
남편의 별명은 ‘조제비’였다. 행마가 제비처럼 날쌔고 가볍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것이 89년 바둑올림픽인 응씨배를 첫 우승하면서 쏙 들어가고 그때부터 ‘바둑황제’로 불리기 시작했다. 창호는 말할 것도 없이 100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하는 바둑천재요 ‘바둑황제’에 오른 사람이 벌어다주는 수입을 오롯이 전대(錢臺)에 휘어찬 아내이겠다, 여기에 더해 바둑신동이 ‘작은 엄마’라고 부르는 여자이니, 하긴 다들 클레오파트라가 부럽지 않은 여제(女帝)로 보일 법도 했다.
좀 우스갯소리를 늘어 놓자면, 하기사 두 사람이 이 손 안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두 사제가 기사(棋士) 자격증은 있어도 기사(技士) ,즉 운전면허증은 없다. 아침에 대국장으로 가는 길은 으레 ‘좌(左) 황제’에 ‘우(右) 신동’을 거느리고 이 손으로 손수 모시니 그들의 운명은 내 손안에 달렸다고 할밖에.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시라. 날마다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는 사람끼리 나란히 한 지붕 밑에서 잠을 자고 한 식탁에서 숟가락을 뜬 후 같은 승용차편으로 싸움터로 나서는 그 길을 말이다. 그 사이에 끼인 나는 어떤 심정이었으며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말을 꺼내도 되도록이면 승부와 무관한 소재를 끄집어내야 하고, 어색, 서먹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면 썰렁한 얘기나마 둘 사이에서 뭔가 주절거려야 될 것 같은 삐에로의 심정을.
전영선 7단이 맺어준 창호와의 인연
원래 우리가 살던 곳은 화곡동 강서구청 근방이었는데 84년 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면서 연희동으로 옮겼다. 좁기도 하거니와 창호가 연구생 수업을 받기에는 종로에 자리한 한국기원과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91년 2월 창호가 충암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분가하면서 지금 사는 평창동으로 이사했으니, 이창호의 내제자시절은 바로 이 연희동시대의 시작과 끝을 말함이다.
창호가 바둑을 배운 것은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라고 한다. 전주에서 할아버지(이화춘, 86년 작고) 손에 이끌려 기원순례를 하며 아마강자들에게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 하듯 지도를 받았다. 그러던 창호가 같은 전주 출신 프로기사인 전영선 7단에게 소개되면서 본격적인 바둑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햇수로는 3년, 2년 가까운 기간을 전영선 7단은 서울과 전주를 오가며 지도했다. 어떤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10판 정도 두기도 했다고 하니 어림잡아 500판은 넘었을 것이라고 한다. 워낙 스폰지같이 빨아들이는 아이라 전7단이 전날 술이라도 거하게 마신 날이면 (지도기였기는 했지만) 선을 접고도 어린아이에게 혼찌검이 날 지경이었다고. 창호가 속기에 능하고 수읽기가 깊은 건 아마 이때 ‘힘바둑’의 대명사인 전7단에게 단단히 단련받은 덕분이라고들 말한다.
창호를 내제자로 받기로 결정한 건 84년 6월초였고 서울 연희동에 들어온 때는 8월말이었다. 전주교대부속 초등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부터 이화여대부속 초등학교로 전학했다.
그러나 창호가 우리집에 처음 온 건 84년 4월말경이었다. 그때는 화곡동에 살 때였다. 각종 언론지상에는 창호가 우리집에 첫 방문하던 때가 바로 내제자 시험기(테스트)를 받으러 온 날로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평소 절친했던 전7단이 전주에 “물건(?)이 하나 있다”며 그이에게 지도기 한판을 부탁했고 어린 창호의 손을 잡고 가볍게 방문한 자리였다. 어깨동무 어린이바둑왕 대회를 우승한 전주의 바둑신동이 아범에게 지도기를 받으러 온다고 하여 시부모님께서도 무척 관심을 기울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떻게 생긴 아일까, 나도 궁금했다.
▲ 구렁이가 밥주발로 스르륵 기어들어가는 태몽을 꾸고 낳은 아이 이창호. 태어날 때 몸무게가 무려 4.8 킬로그램일 만큼 우량아였다. 전북 우량아 선발대회에 나가서 3위인가 입상도 했다. 바둑의 길을 걷게 해야겠다 결심한 계기는 1984년 어깨동무배 바둑대회에 나가 우승하면서. 이때까지만 해도 아버지 이재룡 씨는 둘째아들에게 바둑을 시킬 생각이 없었다. 바둑을 취미로 하는 할아버지가 손자 손을 잡고 기원을 순례하며 즐기는 정도로 생각하다가, 어느 정도 실력이 되나 보자고 출전했던 어깨동무배에서 예기치 않게 우승하자 마음을 달리 먹게 되었다. 사진은 어깨동무배에서 우승상장을 받고 있는 이창호.
창호와의 첫대면
전7단의 손을 잡고 대문을 들어서는 열살배기 아이는 생각보다 통통했다. 마치 만화영화 ‘똘이 장군’의 주인공을 연상케하는 용모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아이를 내 손으로 밥을 지어 먹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7단은 창호를 옥석으로 다듬기 위해서라면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우리집에 오기 전 이미 조치훈 9단의 형인 조상연 5단에게도 보인 적이 있었나 보았다. 조상연 5단과 선바둑(덤 없이 흑으로 두는 치수)을 두고 그 기보까지 떠서 일본의 조치훈 9단에게도 보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일본행은 전주 창호네 본가에서 결사반대했다. 언어라든가 교육문제 등도 문제였겠지만 무엇보다 일본에 보내게 되면 창호를 보기 힘들다는 게 첫째 이유였다.
그이(조훈현 9단)와의 지도기는 석점 바둑이었다. 전7단이 그이로 하여금 힘들게 할 요량으로(그래야 비적비적 땀을 흘리며 열심히 두어 줄 테니까) 석점이나 깔게 했던 것이다. 첫판은 창호가 졌고 둘째 판은 이겼다. 이때 그이는 뭔가 창호의 재능을 발견한 듯했다. 지금은 양파처럼 빨간 껍질에 휩싸여 있지만 장차 한겹 벗기면 벗길수록 하얀 속내가 끊임없이 드러날 그런 재주를 감지한 것 같았다.
이후 창호네 집에선 조훈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여러 경로로 모색했고 강력히 희망했다. 대놓고 내게 속을 보이진 않았지만, 창호의 ‘물건’됨을 확인한 그이도 내심 “한번쯤 들여볼까” 하는 마음이 일었을 것이다.
84년 6월초 창호 부친인 이재룡 씨가 한턱 벅적지근하게 낸다고 그이를 전주로 초청했다. 전영선 7단은 물론이고 홍종현 7단, 박치문 씨(당시 중앙일보 전문위원)와 함께 내려갔다. 우리집에서 첫 지도기를 둔 후 두달 만에 다시 벌인 지도기였고, 그 자리에서 내제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남편은 박카스만 마셔도 취하는 체질이니 술기운에 내린 결정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고...^^;; <월간 바둑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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