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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훈현과 이창호가 사제간 도전기를 벌이기 전까지 세계바둑 역사상 스승과 제자가 타이틀을 다툰 적은 없었다. 제자 이창호가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급성장하는 바람에 한국바둑 일인자로 현역에서 뛰는 스승 조훈현과 정면으로 맞부닥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 일찍이 바둑사에 사례가 없었던 첫 사제도전기는 1988년 12월 성탄절 전날 부산 광안리에서 벌인 제28기 최고위전 도전1국이었다. 사진에서 보듯 제자를 도전자로 맞은 스승은 내내 어색했고 제자는 시선 둘 곳조차 찾지 못할 만큼 좌불안석이었다. 이 역사적인 첫 대국은 제자가 부담이 더 컸는지 단 80수 만에 돌을 거두면서 ‘단명 도전기’로 끝나 또 화제가 되었다. 이 도전5번기는 3-1로 스승이 타이틀을 방어해 제자가 보은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제29기에서 제자는 또 도전자로 스승에게 찾아왔고, 두번째는 처지가 달라졌다. |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가르쳐 주고 인도해준 스승의 은혜는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의 은혜 못지않다. 그래서 이날은 모든 제자들이 스승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감사의 절을 올린다.
바둑계도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이곳은 승부하는 세계라 그 고마움을 갚는 방법이 다르다. 한 송이 꽃이나 선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력으로 보여야 진정한 제자의 도리를 다했다고 판정한다. 승부사에게 승부란 놓인 레일 위를 달려야 하는 기차처럼 운명과도 같은 것이어서 때로 스승과 제자가 콧김을 쐬며 대국을 벌여야 하고, 이때 제자가 이겨야 비로소 스승의 은혜를 갚았다하여 ‘보은(報恩)’이란 표현을 쓴다.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은 세계에서 가장 실력이 센 사제이다. 보통 제자양성은 현역에서 한발 물러섰을 때 하는 것이나 조9단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창 현역으로 뛸 때 물건(?)을 하나 내놓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것이 부메랑의 화살이 되어 스승과 제자가 비정한 승부를 허구한 날 벌이게 된 것이다.
처음 스승이 한두번 질 땐 “얘가 제법 컸구나” 정도로 여겼던 것이 지는 횟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얘가 아예 기둥뿌릴 빼가네 그랴”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9단이 ‘작은엄마’로 부르는 정미화 씨(조9단의 부인)가 겪은 정신적 고충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막상 제손으로 밥해 먹이고 빨래해서 키운 아이에게 당하다보니 처음엔 감내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72년에 일본에서 병역의무차 귀국해 90년대 초부터 제자 이창호에게 밀리기 시작하기까지, 20여년 동안 패배를 몰랐던 남편이었으니 지는 것에 익숙해지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쯤되면 보은도 보은 나름이다. 바둑계의 골초로 소문난 조훈현 9단이 금연을 시작한 것도 제자의 보은을 더는 받아주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그 덕에 스승은 지난해 세계금연의 날 기념식에서 금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제자에게 지지 않으려 이를 갈아무는 스승의 모습이 보기 안 좋으니 이쯤 물러서서 제2의 이창호를 더 많이 키우는 것이 승부사의 길이 아니냐고도 한다. 하나 승부사는 승부할 때가 가장 빛나고 행복한 법. 자신의 손으로 퍼올린 원유(제자)가 사위어가던 승부욕에 불을 당겨주었니 이 또한 제자의 보은선물 아니겠는가.
이려구려, 그 어떤 말로 단장을 한들 이창호처럼 병주고 약주는 제자는 스승에게 실로 ‘뜨거운 감자’가 아닐 수 없다. 승부세계에서는 사제간에도 승부를 비껴갈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스포츠서울>
▲ 1988년 연말 제28기 최고위전 도전자로 스승 조훈현 9단과 첫 사제도전기를 벌인 이창호는 해를 넘겨 패왕전과 국수전에서도 연거푸 도전권을 따 스승과 세 차례나 맞섰지만 모두 패퇴했다. 과연 스승은 백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하다는 천재기사라는 소리를 듣는 승부사답게 강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 앞에 장사 없다 했다. 이창호는 떠오르는 해였고 스승은 정점을 찍고 오후로 넘어가는 태양이었다.
제29기 최고위전에서 다시 도전권을 딴 이창호가 해를 넘겨가며 스승과 대결을 펼친 네번째 사제도전기에서 3-2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보은(報恩)’했다. 1990년 2월, 2-2로 팽팽히 맞선 가운데 맞은 제29기 최고위전 도전5국에서 제자가 딱 반집을 남겨 사제도전기 네번째 만에 마침내 스승을 꺾은 것. 바둑계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이겼을 때, 가르침에 대한 보답을 했다 하여 ‘보은’이란 표현을 쓰지만, 당시 소년 이창호의 승리는 보은을 운운할 차원이 아니라 ‘파천황’을 거론할 정도의 메가톤급 사건이었다. 15년을 독주해온 조훈현의 시대가 이창호시대로 넘어가는 시작점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1990년 1월8일 한국기원에서 열렸던 제29기 최고위전 도전3국 복기 장면. 1-1의 상황에서 분수령이 된 이 대국에서도 제자는 얄밉게도 딱 반집을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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