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민화 중에 책가도 또는 책걸이라 불리는 기명도(器皿圖)가 있다.주로 선비들의 사랑방에 놓여 있던 기명도는 고매한 학덕을 꿈꾸던 선비들의 소망과 함께 언뜻 조화가 되지 않는 듯한 술잔과 찻잔 안경 바둑판 거문고 등을 배치하여 선비 자신들만의 소망의 범주를 넘어 한국적 서민들의 염원도 함께 담아내는 경지를 보여준다.

기명도는 천년 한옥과 잘 어울린다. 조선의 역사는 선비들의 사랑방에서 시작하여 사랑방에서 끝나곤 했다. 한옥의 사랑방은 정치와 바둑담론의 생산지였다. 정치와 바둑이 만나는 지점은 무수하다. 태종 이방원과 건곤일척의 한판 승부를 벌였던 이방간과 박포의 난의 중심에 바둑이 있었고 김옥균은 자신의 사랑방에 바둑을 핑계삼아 사람을 끌어모아 갑신정변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한옥은 한반도의 자연이 탄생시킨 예술작품이다. 거대하지 않고 요란하지 않은 산과 강 그리고 사철마다 변하는 자연 풍광 속에 사람과 자연이 함께 공생하는 공간으로 한옥만한 것이 없다.

한옥과 바둑은 잘 어울린다.
바둑팬들은 관철동시절 운당여관의 바둑대국을 기억한다. 하늘로 치고올라가는 버선코 같은 처마밑으로 활짝 열린 창호문짝 안에 엄숙단정하게 앉아 수읽기에 몰두하고 있는 조남철 김인 국수 등의 모습이 흑백사진마냥 아스라하다.

한옥에서 여는 내셔널리그 양평투어

바둑팬들의 기억에 또렷한 운당여관의 대국을 연상케 하는 바둑대회가 열린다. 대한바둑협회가 주관하고 하나은행이 후원한 아마바둑인들의 잔치, 내셔널바둑리그 최종 10, 11라운드가 경기도 양평에 세우고 있는 한옥단지에서 열린다. 양평은 바둑사에 바둑일기를 남긴 지남규의 고향(갑오음청록 저자, 본 사이트 칼럼란에 [바둑의 노래]로 소개)이기도 하다.

양평 강하면의 양자산을 병풍마냥 마주보고 있는 전통한옥촌 천년가(天年家)의 특별무대에서 12개팀이 지난 6개월여 펼쳐온 하나은행배 전국바둑 내셔널리그의 마지막 라운드가 7월14일(토) 오후1시부터 벌어진다.

이 산속에 못하나 쓰지 않고 순수한 전통한옥 기법으로 50평의 한옥을 십여 채 들어서는 한옥촌 단지를 조성하고 있는 (주)천년가의 신홍범 대표와 평생 전통 한옥만 지어온 대목장 박성남(45)의 요청으로 이 대회가 결정되었다.

"이곳에 한국전통 한옥의 모범을 세우고 싶습니다. 궁궐이나 사찰 등 사람이 살 수 없는 한옥이 아니라 전통을 살려 사람이 생활하고 활동하는 공간을 말입니다."

신홍범 대표는 주택사업을 하다 한옥에 마음을 빼앗겨 한양대학 고건축 글로벌과정을 찾았고 이 과정에서 대목장 박성남을 발견하고 그와 이심전심으로 벌린 첫번째 사업이 천년가 한옥단지다. 투입된 예산은 무려 80억이다.

"마음에 차는 집을 짓지 못하면 그 현장을 접는 것이 장인이라 봅니다. 대목장에게는 수익은 고려 대상이 이니죠. 나에게 고건축은 지존심입니다."

여주지방에서 할아버지 아버지로 이어온 유명한 대목장 집안의 삼대로 20년 이상을 고건축에 매달려온 대목장 박성남의 육성은 튼실하다.
 
천년가옥 단지의 풍광은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이다. 양평의 명산 양자산을 앞자락으로 멀리 바라보며 어른 몸통마냥 굵은 육송만으로 보와 들보를 치켜 만든 한옥의 조화는 그 자체로 동양화다.

대국이 펼쳐질 널찍한 공간.

실내에서 바라본 바깥 초여름 풍경.

"바둑과 한옥은 궁합이 그만입니다. 한옥에 투신해오면서 줄곧 내 손으로 지은 한옥에서 멋진 바둑대회를 한번 열기를 소망해왔었지요. 기억에 남는 바둑대회를 만들어드리고 싶습니다. 산속 한옥단지에서 바둑을 두고 통돼지 바비큐와 막걸리로 뒤풀이를 하고 다른 날  또 다른 바둑대회를 약속할 수 있다면 되지 않을까요? 도전기 같은 프로기전도 꼭 한번 유치하고 싶습니다."

현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또 다른 고건축 장인 이기영(49)의 말이다. 천년가 한옥단지에 전력투구하고 있는 사람들은 "한옥과 바둑을 조화시켜 이곳을 찾아오는 내셔널바둑리그 선수들과 관계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싶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바둑은 초보지만 일이 끝난 후면 바둑, 장기 한수를 즐기는 애기가들이기도 하다.

이쯤되면 선수단뿐만 아니라 관심 있는 분들도 유람삼아 참관해도 좋겠다. 대회가 끝나면 만찬에 참가해도 말릴 사람 없을 것이다. [바둑역사학자, 소설가 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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