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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음영이 시간으로 드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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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었던가, 잊어버렸던가. 시간 속에 묻혔던가, 시간이 날 버렸던가.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필자에게도 한 때가 있었다. 지금도 물론 아름다운 시절이지만, 지난 일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시간이라는 관념, 그 허상의 저택 때문일까. 그래서 다시금 돌아보는 오늘, 시간의 각질이 벗겨진 한 해의 그믐.
그믐이 되니 감사드리고 싶은 분들도 많다. 이 분 저 분. 그 중에 이시용 님도 있다. 이 분이 필자에게 말없이 주고 간 선물을 오늘 독자와 함께 끄르고 싶다. 바둑을 직업으로 삼는 프로들은, 알게 모르게 고독의 순간과 표정이 사진틀에 잡힌다. 반상에 몰두할 때를 기다려 형상화한다. 당연하긴 하다. 프로들이야 반상 앞에서보다 진지할 때가 또 언제 있으랴.
이 분이 지난 11월 8일 줌인(zoomin.co.kr)이라는 사진 전문 사이트에 전시회를 열었다. 주제인 즉, '장고(長考).' 말을 빌리면, '한줌의 미학을 위해 불꽃처럼 산화하는 프로의 영혼.' 31인의 표정을 담았는데 화면을 열면 처음 나타나는 상(像)은 조훈현의 고뇌.
상기되는 안색을 하얀 두 손으로 열을 식히듯 감싸안았다. 두 손으로 두 눈을 지긋이 누르고 있는 황원준의 깊은 공간. 허공을 망연히 붙잡는 루이의 몽롱한 눈. 우리 프로에게 저런 표정이 있었던가! 사진에는 표정 외에도 손과 반상이 녹아 있었다. 기사의 언어는 표정과 손, 그리고 반상.
 고마운 건 필자의 얼굴. 왼손으로 코밑을 깊숙이 부여잡고 두터운 검은 뿔테안경 너머 몰입하는 순간. 주시하는 건 돌이 몇 개 놓인 반상. 그렇다. 그 돌! 기억한다, 그 순간을. 1994년 6월 13일 관철동 한국기원 4층에서 장수영 9단(흑)과 두었던 제29기 왕위전 예선 결승. 흑1 승부수에 백2가, 두었다면 승착. 흑A는 백B 이하 백F까지 흑이 곤란하다. 그러나 백은 백2가 아니라 소극적으로 a에 응수, 3집 반을 졌다.
님께 감사한다. 표정과 손을 함께 잡고 시간도 감아 두었으니. 의미를 어찌하면 새기랴. 그 표정을 어떻게 담아야 할지 누군가 가르쳐만 주신다면!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고맙고도 안타까운 순간. 벌써 그믐인가. 흑백의 음영이 시간으로 드리운 그믐.
내일이면 오늘도 어제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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