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이슬로 사라질 저이의 마지막 소원 한번 들어 주시죠."

oo교도소의 재소자 목회를 담담하고 있는 오주야 목사는, 사형수의 마지막 길을 인도할 예배에 참관한 교도소장에게 간곡히 부탁을 하고 있었다.

"사형수의 마지막 예배야 공식적인 것이고, 단지 그 시간 동안 나형기 씨가 그렇게 좋아하던 바둑 한 판 두겠다는 것인데요. 그 정도는 들어 주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전례가 없는 일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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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 나형기.

알코올중독인 아버지가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를 상습 폭행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스무 살이 되던 지난 98년, 아버지를 치밀한 계획 하에 361군데를 찔러 살해한 후 반성도 하지 않는 등 개전의 정을 전혀 보이지 않아 존속살해로 사형선고를 받은 그였다.

97년 12월 이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고 사형제 폐지의 의견이 각계에서 일어나고 있던 중이었지만, 2004년에 일어난 유영철의 연쇄살인사건으로 사형제 옹호의 여론이 들끓자 기어이 수년 동안 없었던 사형 집행의 날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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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사의 부탁을 들은 교도소장은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평소 사형수 같지 않았던 나형기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던지라 고민 끝에 수락을 했다.

"예배를 보는 시간 동안만입니다. 되도록 빨리 끝내세요."

평소 오주야 목사는 나형기와 사형수 목회 시간에 둘의 공통된 취미인 바둑에 관한 얘기를 많이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죄를 반성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나형기를 위로했다.

이윽고, 오목사가 미리 준비한 바둑판을 앞에 두고 둘은 마주앉았다.

둘의 주변에선 오목사와 함께 사형수 교화에 힘써왔던 신도들이 미리 준비한 찬송가 126장 "천사 찬송하기를"을 나지막이 부르기 시작했다.

"...영생하게 하시니 왕께 찬양하여라~♪ 영생하게 하시니 왕께 찬양하여라~♬"

오목사는 바둑돌을 쥐고 첫수를 두며, 이 말을 덧붙였다.

"영생해야 합니다. 아셨죠? 영생요...이 바둑으로 꼭 영생하셔야 합니다. 명심하세요! 영생입니다~영생! 아셨죠? 영생!"

나형기도 마침내 돌을 들었다. 이 판이 끝나면 그의 목숨도 끝나는 것을 알기에 그의 손은 엷게 떨리고 있었다.

한수 또 한수. 바둑판은 흑과 백의 돌로 좁아져 갔다.

오목사의 입장에선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한수 한수였고, 나형기에겐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한수마다 줄이는 안타까운 현실. 지켜보던 교도소장의 눈에도 촉촉한 이슬이 맺혔다.

서로가 신중하게 착점을 하며 시간이 더디가길 원했지만, 쏘아진 화살을 거둘 수는 없는 법. 바둑판은 이미 흑과 백의 돌로 빼곡히 들어찼다.

결국, 좌하귀의 마무리만 남겨두며 판세는 반집을 다투는 형세불명으로 종국을 앞에 두었고, 주위를 둘러싼 신도들의 찬송가는 더 커져갔다.
"영생하게 하시니↗~~♪"

국면은 254수째(기보 백1) 접어들어 이곳 반패 싸움 결과에 따라 승부가 반집으로 엇갈릴 운명의 상황. 그야말로 사형수의 이승에서의 막지막 대국다운 처절하고도 극적인 승부였다.

<장면1>

현재 집으로는 흑의 반집승. 그러나 백이 1로 때린 반패를 이기게 되면 거꾸로 반집을 이긴다. 이를 생생하게 음미하려면 <장면1> 의 수순을 첫수로 돌려 흑64까지의 패싸움 과정을 한수씩 놓아보시기 바란다.

문제는 이어진 <장면2> 의 백1로 팻감을 썼을 때. 물론 받아주면 이상이 없지만 그러면 팻감부족으로 질 게 뻔하다. 흑의 남은 팻감은 2개뿐이기 때문이다. 해서 두 눈 질끈 감고 흑2로 잇고 보았다. 이것이 포커의 로티플보다 확률이 더 희박하다는 장생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첫걸음이다. 

 

<장면2>

흑4로 마지막 팻감을 쓰고 6으로 때려내자 백도 7로 자살 팻감을 쓰고 이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빙글빙글 같은 수순을 반복하게 된다. 형세는 반집승부이므로 이 장생의 형태에서 누군가 양보하면 그대로 승부는 나는 법. 끊임없이 찬송가도 함께 울려 퍼졌다.

"영생하게 하시니~~♬"

교도소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 역시 바둑을 좋아하는 이로 장생(長生)의 룰을 들어는 봤으나 실제로 판에서 접해보긴 처음인 것. 또, 전례에 없던 이승에서의 마지막 대국까지 전권으로 허용했던 터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쯤 했으니 됐습니다. 이제 판을 거두시죠~~"

"소장님도 바둑을 둬봐서 알겠지만, 이게 양보가 될 문제입니까?"

오목사의 말은 단호했다. 돌을 집고 마주앉은 나형기는 뜬금없이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고...

2시간이 넘게 벌어지는 동형반복으로 형 집행시간을 넘겨 사색이된 교도소장은 긴급히 법무부에 타전을 했고, 뒤늦게 법무부 장관까지 나서 사태를 수습해 보려 하지만, 바둑의 룰이라니 어찌할 수 없이 둘 중 하나가 지쳐 판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데...

그 와중에도 오목사와 나형기는 아직도 따내고 되따내며, 동형반복의 미학을 탐미하고 있었다.

"영생하게 하시니~~♬"

물론 찬송가의 동형반복도 계속 되었고...

생의 마지막에 기회를 얻은 刑棋.

바둑의 영생인 장생을 얻은 형기.

나형기...그는 과연 장생처럼 살아남아 刑棋의 추억을 말할 수 있을까?

오목사와 나형기의 패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후기: 오목사는 지난 목회 때 장생이 나온 프로바둑에 대해 기보를 보여주며 나형기와 얘기를 나누었다고 하며, 그들 이 둔 바둑은 그 기보의 복기였다고...)

(덧글) 1993년 9월 2일 제49기 본인방전 본선리그 고마쓰(小松英壽) 8단과 린하이펑(林海峰) 9단과의 공식대국에서 세계바둑사상 최초로 장생의 형태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본문 중의 기보는 바로 이 바둑입니다. 당시 이 바둑은 333수까지 가는 대혈전이 전개되었고, 승부를 결정짓는 반집패 싸움 도중 '영원히 살아 순환한다'는 뜻의 장생이 출현한 것입니다. (월간바둑 93년 10월호 참조)

장생은 [현현기경]에서 사활문제(아래 문제)로나 출제되어 있을 뿐 공식대국에서 한번도 나타나지 않아 '전설'에서나 등장하는 형태로 알려져 있었다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