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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뭉크의 절규처럼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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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뭉크의 절규처럼 (16)
2014-01-10 조회 8152    프린트스크랩
▲ 영화 '소녀'의 한 장면.


50분 전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세찬 바람을 뚫고 도로가에 주차돼 있는 택시로 달려왔다. 오늘 같은 날 이렇게 택시를 잡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횡재를 한 기분으로 여자가 먼저 택시 뒷좌석으로 몸을 들여놓으려는 순간 택시기사의 말이 절망적으로 들렸다.

“손님, 다른 차를 타세요. 이건 이미 대절된 택시입니다.”

“대절이요? 손님도 없잖아요.”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이거 승차거부 아닙니까? 고발할 겁니다.”

남자가 발끈해서 소리를 쳤다. 남자의 그런 말에도 기사는 여유만만이었다.

“고발을 하셔도 좋은데요 여기 미터기를 보세요.”

미터기를 본 두 남녀는 기겁을 했다. 미터기에는 30만원이 넘는 요금이 찍혀 있었다. 누군지 택시를 타고 엄청 싸돌아다닌 모양이다. 결국 두 남녀는 투덜대며 발길을 돌려야했다. 택시기사는 기지개를 늘어지게 하고 도로 옆 건물 2층을 힐끗 쳐다보았다. 보라색으로 HILTOP이라고 써 있는 심플하면서 세련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시계는 벌써 8시를 넘고 있었다. 여자가 들어간 지 1시간이 넘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하는지 알 수가 없다.

택시기사로서는 오늘 횡재한 날이다. 일찌감치 점심을 먹고 택시승차장에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그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길게 줄을 선 사람들 중에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큰 키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택시기사뿐만 아니라 주변에 줄을 선 사람들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여자를 힐끗힐끗 쳐다볼 정도였다. 택시기사는 기도했다. 제발 저 여자가 자신의 손님이 돼 주기를. 기사의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여자는 자신의 손님이 되었다. 뒷좌석에 여자가 올라타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기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목적지를 물었다. 제발 아주아주 먼 곳으로 가주기를 간절히 빌면서. 평소에 믿지도 않는 하느님은 기사의 그 소원까지 들어주었다. 여자는 특이한 말투로 말했다.

“아무 데나 가주세요.”

“아무 데나요?”

기사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그리고 여자의 다음 말에 기사는 입까지 쩍 벌렸다.

“9시까지 택시를 빌릴 거여요. 이건 대여료여요. 요금은 따로 나중에 지불할게요.”

여자가 내민 30만원을 받는 기사의 손이 덜덜덜 떨렸다. 50년 인생 중에 가장 횡재를 한 날이다. 꿈에도 못 볼 이런 절세미인과 드라이브라니. 그것도 돈을 두둑이 받고 말이다.

기사는 행복한 드라이브를 원없이 했다. 서울 곳곳을 돌고 그것도 부족해 청평까지 드라이브를 했다. 6시가 다되자 여자는 목적지를 말했다. 이곳이다. 1시간 전에 여자는 저 힐탑이란 가게로 들어갔다. 여자는 택시에서 내리기 전 자신의 전번을 따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혹시 더 큰 소원이 이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사는 고개가 아프도록 2층만 바라보았다. 너무 바라봐서 이제는 고개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때 문자가 들어왔다. 그 여자다.

<힐탑으로 올라오세요 언니가 너무 취했어요 부축 좀 해주세요>

 

45분 전
허겁지겁 힐탑에 들어온 기사는 두리번거렸다. 스툴바에 여자가 눈부시게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언니라는 여자가 바에 고개를 처박고 널부러져 있었다.

“얼마나 술을 드셨기에 이지경입니까. 겨우 1시간 만에...”

기사가 황당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이 여자는 이미 카운터에서 계산을 끝내고 있었다. 다급하게 언니를 부축하는 기사다.
 

40분 전
호철은 112개의 ‘소’자에서 한개를 골랐다.

嫊: 여자이름 소

여자이름은 여자를 의미할 수도 있다. 여자는 소녀다. 소녀입장에서 자신을 버리고 취하는 것은. ‘대’가 문제다. 여기서 다시 속절없이 시간을 보내는 호철이다. 49개의 ‘대’자 중에 하나. 눈이 빠지도록 보던 호철에게 하나가 잡힌다.

檯: 등대 대

등대는 희망이고 빛이다. 누구의 희망인가. 누구의 빛인가.

 

38분 전
“이곳으로 가주세요.”

뒷좌석에 앉은 여자가 주소가 적힌 쪽지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얼마나 걸려요.”

쪽지를 본 기사는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을 머리 속으로 굴렸다.

“30분이면 갈 수 있습니다.”

“9시까지 가주세요. 늦어도 안되고 빨라도 안돼요.”

“문제 없습니다.”

기사는 자신 있다는 말투로 대답을 하고 룸미러로 힐끗 뒤를 보았다. 언니라는 여자는 여자의 무릎에 머리를 눕히고 널부러져 있었다. 기사는 저 여자대신 자신이 저렇게 누워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을 하며 힘차게 악셀러레이터를 밟았다.

 

37분 전
호철의 머리는 마비될 지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녀가 취할 빛이나 희망은 없었다. 등대 대(檯)를 포기하려는 순간이다.

 

36분 전
호철의 머리를 번개같이 스치는 하나가 있었다. 설마...

호철은 자신의 생각을 부인했다. 그럴 리는 없다. 말도 안돼. 절대 아니야. 그런 부인 속에도 한 사람의 이름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35분 전
호철은 핸드폰에 저장된 1번 버튼을 눌렀다. 민지현이다. 신호음이 울렸다. 호철의 손이 떨렸다. -받아. 지현아- 라고 속으로 말하는 순간 신호음이 떨어지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호철은 얼굴이 납처럼 굳어졌다.

“힌트를 알아냈어요.”

소녀는 특유의 목소리로 핸드폰에 말을 했다.

“하지만 늦었어요.”

“무슨 짓이야!! 지현이를 어떻게 하려는 거야!”

핸드폰 너머에서 호철이 절규했다. 호철의 절규에 동문서답을 하는 소녀다.

“어쨌든 지금이라도 힌트를 알아냈으니 힌트를 하나 더 드릴게요. 뭉크의 절규가 힌트여요. 시간은 9시까지여요.”

“유리애!!”

호철의 외침은 속절없었다. 이미 소녀는 핸드폰 너머에서 사라진 다음이었다. 재발신을 눌렀지만 지현의 핸드폰은 전원이 꺼진 상태였다.

 

33분 전
“강형사! 뭐야! 민형사가 어떻게 됐다는 거야!”

반장이 옆에서 재촉을 했지만 호철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소녀는 지현을 죽일 생각이다. 이유는 모른다. 중요한 건 이 순간 지현의 목숨이 소녀한테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뭉크의 절규, 그 힌트 속에 장소가 들어있다. 시간은 9시까지다. 현재시간 8시27분. 33분 남았다. 9시까지 힌트를 풀고 소녀가 말한 장소로 가야 한다. 힌트를 풀 수 있는 가상의 시간을 20분이라고 한다면 장소까지 이동 시간은 10분 남짓. 소녀는 내가 자신의 아파트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여기서 10분 거리의 장소다. 현재시간 차로 10분 동안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10킬로미터.

호철은 스마트폰에서 GPS로 현재 위치를 설정하고 반경 10킬로미터 내에 있는 다리를 검색한다. 총 12개의 다리가 검색됐다.

  

31분 전
뭉크의 절규에서 다리 뒤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다리 뒤가 서쪽이라는 뜻이다.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다리는 모두 세 개가 있었다. 그 중 두개는 자동차 전용도로에 있었다. 또 하나는 간선도로를 건너는 다리다. 다리 주변에는 공원도 놀이터도 없었다. 범행 장소로는 아무리 봐도 적합하지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검색하는 호철의 모습은 광기 어린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에 반장은 더이상 호철에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뭔가 심각한 상황인건 알지만 그저 지켜볼 따름이었다.

 

30분 전
그렇다면 어딘가. 어디에 있는 다리인가.

시간이 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29분 전

28분 전

27분 전

26분 전

25분 전


24분 전
지도를 검색하던 호철의 눈에 한 곳이 눈에 띄었다. 다리라고 해서 꼭 물 위에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동일로를 가로지르는 사람이 건너다니는 구름다리가 있다. 다리 바로 옆에는 공원이 있다.

서쪽으로 향한 다리. 범행 장소로도 적합하다.

 

23분 전
잡았다!

호철이 득달같이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뭔가가 발목을 잡았다. 호철은 시계를 봤다. 현재시간 8시37분. 구름다리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이렇게 쉬울 리가 없다. 뭔가가 이상했다. 너무 단순했다. 전혀 소녀답지 않았다. 호철은 직감했다.

이건 함정이다.

 

22분 전
택시는 동부간선도로로 올라서더니 거침없이 북쪽으로 질주했다.
 

21분 전
호철은 스마트폰에 뭉크의 절규를 띄워놓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소용돌이치는 물과 다리, 그리고 노을. 절규하는 사람. 이것이 전부다.

다리.

노을.

 

20분 전
노을이 꼭 서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18분 전
“당신 누구야!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지현은 외쳤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지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꿈이었다. 지현은 빨리 이 악몽에서 깨어나길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꿈은 깨지지 않았다.

  

17분 전
순간 호철의 머리를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노을이 의미하는 건 방위가 아니라 색깔이다. 다리 뒤로 분홍색으로 칠을 한 아파트 단지가 있는 곳이 있다. 그곳은 상계동과 의정부의 경계에 있다. 이미 예상거리부터 잘못 계산한 호철이다. 그곳은 이곳에서 1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에 있었다. 현재시간 8시43분. 17분 만에 거기까지 간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더이상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아파트 문을 부술 듯이 박차고 튀쳐나가는 호철이다.

“강호철!!”

반장이 뒤를 따라 아파트 밖으로 나왔지만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호철의 발소리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뭣들하는 거야!! 빨리 쫒아가 봐!!”

반장의 벼락같은 호통에 두 명의 형사가 비상계단으로 뛰었다.
 

12분 전
택시는 동부간선도로에서 빠져나와 도봉로를 타기 위해 우회전을 했다. 9시까지 도착하려면 빨리 달릴 필요가 없었다. 기사는 시속 60킬로미터로 여유롭게 운전을 했다.

  

10분 전
차 지붕에 경광등을 켠 코란도는 미친 소처럼 질주했다. 중앙선도 신호등도 무시했다. 코란도가 지나가는 곳마다 차들은 기겁을 하고 급정거를 했다. 호철은 시계를 보았다. 9시10분 전이다.

10분까지 그곳에 간다는 건...거기까지 생각한 호철의 시선에 코란도 앞으로 가로질러 달리는 트럭이 들어왔다.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꺾는 호철이다.

끼아아아아아악..

코란도가 비명을 질렀다.

  

4분 전
택시는 망월사역에서 좌회전을 했다. 정돈이 되지 않은 어수선한 도로 오른쪽으로 분홍색으로 칠한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허름한 상가를 끼고 다시 좌회전을 하는 택시다. 겨우 차 한 대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 나왔다. 차가 다니는 길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다니는 보행로 같았다.

 

2분 전
좁은 길을 조금 가자 눈앞에 다리 하나가 보였다. 다리 역시 차 한 대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다리였다. 기사가 보기엔 차가 지나가면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1분 전
“여기서 내려주세요.”

“여기서요?”

기계음 같은 소녀의 말에 기사는 당혹스런 말투였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칙칙한 가로등 몇개로 겨우 불을 밝힌 주변은 사람 사는 집은 물론이고 가게 하나 없었다. 10미터쯤 돼 보이는 다리 건너는 신도로의 축대가 높게 벽을 이루고 있었고 좁은 길은 양옆으로 축대를 따라 갈려져 있었다.

기사가 걱정되는 마음에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소녀가 5만원권 몇 장을 내미는 걸로 기사의 입을 막았다.
   

0분
바람이 거칠게 불고 있었다. 세상을 모두 날려버릴 기세였다. 소녀가 물먹은 솜처럼 축 처져있는 지현을 부축하고 다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본 기사는 뭔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 소녀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불안하다는 생각보다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편견을 가지고 있다. 여자는 언제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기사는 후진으로 택시를 빼면서 가는 길에 파출소에 신고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분 후
지현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걸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발이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고개를 떨군 지현의 시선에 걷지 않아도 움직이는 자신이 보였다. 어디론가 끌려가는 자신이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지현은 힘들게 입을 들썩였다.

“어디..가는..거야.. 도대체..너..너..누구야..왜 이러는 거야..나한테..”

지현의 말은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3분 후
지현은 자신의 등이 어딘가에 기대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등을 기대자 조금 편안해졌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뒤통수를 벽에 기댔다. 눈앞에 희미하게 그 여자가 보였다. 이미선이라는 여자.
 

5분 후
바람이 소녀의 머리카락을 미친 듯이 할퀴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속으로 무표정한 눈이 보였다. 도대체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현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도대체..왜 이러는 거야. 너..너..누구야.”

“시간을 더 줬어요. 그런데 구하러 오지 않아요.”

“말을..할 수..있는 거야. 벙어리잖아.”

“구할 수 없는 운명이어요.”

“무슨 말..”

그 순간 지현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 상황이 너무 기억에 익었다. 등에 기대진 채 살해된 사람. 여자 연쇄살인범. 설마...

“설마..네가..그..연쇄살인범..”

“...”

소녀는 대답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지현을 바라볼 뿐이다. 지현은 혼신의 힘으로 발버둥을 쳤다. 소녀를 밀려고 했지만 소녀의 가벼운 손짓 하나에 그것은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소녀가 오른팔로 가만히 지현을 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소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너무나 포근해서 스르르 잠이 올 것 같았다. 지현이 힘겹게, 그리고 필사적으로 말을 했다.

“왜..이러는 거야..나한테..”

“미안해요.”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오른쪽 갈비 사이가 뜨끔했다.

곧이어 불로 달궈진 것 같은 뜨거운 뭔가가 몸 안으로 들어왔다.

지현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아주 잠깐, 그것은 멈추는 듯 하다가 끝까지 밀고 들어왔다.

지현의 눈은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세상 모든 모습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세상 모든 소리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세상 모든 느낌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을 때 눈부신 라이트가 쏟아졌다. 찢어지는 브레이크 소리도 동시였다. 눈부신 라이트 속에 한 남자가 다급하게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꼼짝마!!!”

호철은 권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강호철.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남자.

지현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호철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왜 이제 왔냐고 투정이라도 부려보고 싶었다. 이렇게 늦게 올 거라면 더 늦게 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렇게 죽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아. 이렇게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니까.

고마워.

소녀는 등을 보이고 있었다. 축대에 기댄 여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지현이다. 호철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소녀가 지현의 몸에서 칼을 빼내자 피가 뿜어져 나왔다. 지현은 자신의 몸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영혼이 사라지는 건가...라는 생각이 이 세상 마지막이었다.

지현은 마치 썩은 고목나무처럼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민지현이라는 하나의 개체가 아니고 단지 영혼 없는 몸뚱아리에 불과했다. 호철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한 여자가 그렇게 바람 속에 스러져갔다. 호철의 머리 속은 하얗게 텅 비어버렸다. 그 머리 속에 분노가 채워지고 있었다.

뎅그렁..

칼 떨어지는 소리와 소녀가 양손을 들고 돌아선 건 동시였다. 눈부신 라이트 속에 양손을 들고 서있는 소녀의 모습은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호철의 머리 속은 분노로 가득 찼다. 온몸이 분노로 통곡하고 있었다. 권총을 겨눈 손이 분노로 떨렸다.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분노로 소스라치고 있었다.

바람이 소녀를 무참히 할퀴고 지나갔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소녀의 무심한 얼굴이 보였다.

호철은 절규했다.

“이 살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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