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에는 고달픈 현실에서도 늘 여유를 갖고 즐겁게 살고자 했던 즉, 인간으로서 <바른 몸>과 <바른 마음>을 닦는 선조들의 삶의 지혜와 멋이 담겨 있는 것이다. 신라의 화랑도를 비롯한 고구려의 조의선인 등 우리 민족 고유의 선도(仙道)는 모두 이런 풍류에 근본을 두고 있다.


남효온의 단풍놀이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은 조선 전기 시대 문인으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 의령(宜寧). 자 백공(伯恭). 호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 시호 문정(文貞). 김종직(金宗直)의 문하로 김굉필(金宏弼)·정여창(數汝昌)·김시습(金時習)·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고 한다.

남효온이 가을 날 영통사(靈通寺)에 단풍놀이 갔다가 지은 시다. 영통사는 고려 때인 1027년(고려 현종 18) 창건된 사찰로, 개성시 용흥동 오관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이곳에서 교관(敎觀)을 배우고 천태종을 열었던 곳이라고 한다. 화담 서경덕도 영통사에 놀러갔다 지은 시가 남아있는 것을 보면 꽤나 주변 경관이 좋았던 모양이다.

추강집(秋江集) 제2권 기행(紀行) 24수 중 제8수

靈通寺樓高 (영통사누고) 영통사 높은 누각에 오르니
秋山四面紫 (추산사면자) 가을 산 사방에는 단풍이 붉게 들어
淸川繞砌鳴 (청천요체명) 맑은 내 섬돌 휘돌아 소리쳐 흐르는데
落風啼窓紙 (낙풍제창지) 낙엽 쓸어 날리는 바람에 문풍지 울어 떠네

瓊老少年交 (경노소년교) 흰머리 노승은 어릴 때부터 사귀었는데
迎我畵圖裏 (영아화도리) 이제는 영정 속에서 나를 맞는구려!
中庭月紛紛 (중정월분분) 안뜰에는 달빛만이 어지러이 비칠 때
石榻敲碁子 (석탑고기자) 돌 마루 걸터앉아 바둑돌 두드리네

砌 섬돌 체 ㉠섬돌(집채의 앞뒤에 오르내릴 수 있게 놓은 돌층계) ㉡겹쳐 쌓다
瓊 구슬 경 ㉠구슬 ㉡옥 ㉢붉은 옥 ㉣패옥(佩玉: 허리띠에 차는 옥) ㉤주사위


깊어가는 가는 가을의 소슬(蕭瑟)한 정취를 나타내고 있다.

예기(禮記)에 春作夏長 仁也 秋斂冬藏 義也(봄에 심고 여름에 자라는 것은 천지의 물건을 낳는 인(仁)이다.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감추는 것은 천지의 물건을 성숙시키는 의(義)이다.)라 했던가! 늙은 노승의 죽음을 거론하며, 가을 金기운의 숙살지기(肅殺之氣)가 빚어내는 스산하고 쓸쓸한 느낌을 고조시킨다.

고요한 절간에 달빛이 가득한 황량한 풍광에서 문풍지 떠는 소리를 들으며 바둑돌 놓는 느낌은 어떨까?


상락주(桑落酒)와 국화전(菊花煎)

먹고 살만해졌음인가? 매 계절마다 산하가 몸살을 앓는다. 올 가을도 유명하다는 산은 인파로 넘칠 것이다. 달리는 관광버스가 들썩일 정도로 만취되어 흔들어대고, 산에서는 고성방가에 고스톱 판이 즐비하게 벌어질 것이다. 신선놀음인지 야차놀음인지. 산 정상에 뭔 볼일이 있다고 숨을 헐떡이며 오르기에 급급한 분들도 있다. 아마도 단풍놀이보다는 체력단련이 그 주목적인 듯싶다. 건강해서 나쁠 거야 없겠지만 거기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도 병 아닐까 싶기도 하고.

중양절에 마시는 술을 상락주라고 한다. 진달래전 부치듯이 누런 국화잎을 찹쌀떡에 빚은 것을 국화전이라고 하고, 또 배와 유자와 석류와 잣 등을 잘게 썰어서 꿀에 타면 이것을 화채라 한다.

<금꽃을 처음 거두어다가 둥근 떡을 구워 놓고 상락주(桑落酒)를 새로 걸러 자그마치 술지게미를 짜냈다. 붉은 잎 가을 동산에 아담한 모임을 이루었으니, 이 풍류가 억지로 등고(登高)놀이하는 것보다는 낫다>라는 시가 있고 보면, 애써 멀리 가서  높은 산에 오르며 숨을 헐떡이는 것보다 그저 주변 풍경 좋은 곳에서 상락주에 국화전과 화채를 곁들이는 것이 깊어가는 가을 정취를 느끼기에는 그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침 서광사 도신 스님 화보가 났는데, 거기 비산비야(非山非野) 같다는 부춘산의 가을 풍광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주지스님과 바둑 한판 하고, 달빛에 상락주라도 한잔 기울였으면 하는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