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부자간에 장기는 못둬도 바둑은 둔다'는 말이 있다. 출처가 어느 곳인지는 몰라도 부자유친과 장유유서의 간극 사이에서 생겨난 갈등(?)으로 이해된다. 조선후기 부자간에 담배를 피우고 바둑을 두는 것은 큰흠이 아니었던 듯하다. 주노(주인과 노비), 부자(父子), 부부(夫婦) 간에 맞담배를 놓고 호불호를 따지는 기록이 생각보다 많다. 이런 갈등을 거쳐 부자간의 맞담배는 금기사항으로 정착되었지만 바둑은 오히려 권장 사항이었다.

10월3일. 맑음.
아침을 먹고 좌수댁에 가서 대화를 나눴다. 시국 소식을 듣고 점심 후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동리 초입에서 온식구들이 대성통곡을 하는 것을 봤다. 호주가 죽었다. 동리에 초상이 났다.

(晴 朝飯後 近洞訪座首 移時談話 何時節 點心後辭歸 至院頭家 食率與數三同伴 方哀哭不止 家主死矣 洞里喪也)

10월4일. 맑음.
을동이 오지 않는다. 소식도 없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형리가 와 한나절 바둑을 두었다. 둘째 아들놈이 바둑두는 것을 와서 보자 형리가 부자간에 바둑두는 것은 좋은 것은 아니지 싶다 물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 부자간의 바둑은 친함이 있다. 그건 자연스런 일이다 말했다. 형리가 그렇지 하고 웃었다.

(晴 乙東不止 足斷有何事焉 來刑吏半日 圍碁 二子者 爲圍碁 吏曰 不好父與對局 余不然 父子之間 對局 自然 吏曰 爲可可)

지남규는 부자간에 친함이 있다는 것을 장유유서를 뛰어넘는 것으로 본다. 부자간의 친함은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라 한다. '어우야담'에 부자간의 바둑 장면이 나온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따뜻하며 평화로워 웃음이 절로 나오는 대목이다.

박계현(朴啓賢)이 나온다. 그는 조선중기 실존 인물로 아들 박충원(朴忠元)과 더불어 같은 시대에 벼슬을 하며 직급도 비슷한 당상관이었다. 두 사람은 바둑을 좋아했는데 퇴청을 하면 박계현이 아들을 부르곤 한다.

- 공 이리 오시게. 바둑 한판 어떠신가.
(令公來 與之對奕)

아들 박충원이 한 걸음 더 나간다. 무엇이라도 걸으셔야지요(請以賭奕)라고 말이다. 부자간에 맞담배 풍토가 사라진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담배가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신비초(?)라 믿던 세상에서 그런 생각을 한 선조들의 안목이 놀랍다. 담배가 백해무익하고 오히려 독초로 밝혀진 현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바둑은 어떤가.

요즘 밤에 책을 읽다보면 열살 딸애가 바둑판을 들고와 오목 한판을 청한다. 시간을 보면 밤 열시가 넘기 일쑤다. 바둑을 알면 사고(?)칠 아이라 생각하며 오목 한판 청을 들어준다. 그런가.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바둑의 나이테도 그렇게 한줄을 더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