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사람 이운규(李雲奎)는 '그늘이 세상을 움직인다(影動天心月)' 했다. 이 말은 역사의 주체자가 유력자들이 아니라 유력자들의 그늘에 살면서 말없이 역사를 써 가는 민초들을 말하는 듯하다. 필자는 이 말에 유야산릉(幽夜山陵)을 떠올렸다. 유야산릉은 '상군서(商君書)'에 나오는 말이다. 상군서는 오늘의 하잘것 없는 것도 내일에는 큰것이 되는 법을 말하지만, 한편으론 진실 앞에 눈 감은 맹아의 무지를 말하기도 한다.

오늘 들판을 어지럽히는 꽃씨도 바람을 만나면 천리를 간다. 바람의 기세를 얻었기 때문이다. 천길이나 되는 물속 깊이를 알 수 있는 것은 돌에 줄을 매달아 깊이를 재보았기 때문이다. 기세를 아는 사람은 천리를 가고 수를 쓸 줄 아는 사람은 물속의 깊이도 알 수있다. 어둠이 깊으면 거대한 산도 보지 못한다. 아무리 눈밝은 사람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날이 밝고 해가 뜨면 하늘의 새도 가을의 한터럭 깃털도 볼 수 있다. 그것은 해의 기세를 의지했기 때문이다. ( 今夫飛蓬遇標 而行千里乘風之勢也深淵者知千認之深懸繩之數也  故託其勢者 唯遠必至 守其數者 唯深必得 今夫幽夜 山陵之大 而離婁不見. 淸朝日端則上別飛鳥 下察秋毫 故目之見也 託日之勢也)

상군서는 군왕의 치도를 위해 쓰여진 책이지만 때로는 미망에 갈피를 못잡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준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조잡하다. 등판에 깔개를 메고 사는 노숙자나 정나라 동문 앞에 서서 상가지구(喪家之狗) 신세를 자임하던 공자도 예외는 아니다. 상군서는 오늘의 만족을 경계한다. 하잘것 없는 꽃씨도 바람을 만나 천리를 간다고 하지 않는가. 기세를 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바둑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둑인은 한번쯤 되새겨 볼만한 말이다.

 

8월14일. 맑음.

을동이 왔다. 기보를 바꿔주고 쌀, 마른반찬과 돈 5냥을 주어 보냈다.지난번 기보의 사우분치후(四遇分置後)를 묻기에 가르쳐 주었다. (을동이)글을 모르는 것이 애석하다. 네 귀에 각기 돌을 배석한 후 한간 낮은 곳에 행마한다. 이립삼전이고 삼립사전이 방법이다. 성점(치석)에서는 5칸 행마도 무방하다. (晴 乙童來至矣 換碁譜 米魚物金五兩歸家也 前譜何問 四後分置石後耶 眞明而字不足哀己矣 四遇分置石後 一路行桂馬 二立三間三立四間方法 星點如發五間 善.) 

* 桂馬(계마) : 눈목자행마

지규남은 추석 전날 찾아온 을동에게 기보를 바꾸어 주고 쌀과 반찬 그리고 약간의 돈을 주어 보낸다. 지난번 기보 속에 나오는 '사우분후치후'란 말에 상세한 설명을 해준 것은 물론이다. 이 대목에서 지남규는 '한 분야를 사랑하는 방법과 사람을 아끼는 방법'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이것이 지남규의 바둑사랑이다. 그의 사랑은 조건이 없다. 지남규는 재능이 있는 아이에게 바둑을 가르쳐 주고 생활비(?)도 대준다. 그러면서도 후원을 자랑하거나 선생을 자처하지도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라면 지남규가 제격이다.

우리는 이 글 속에서 순장식 바둑과 중국식 바둑형식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사우분치석후(四遇分置石後)란 말은 분명 중국식 사배자 형식을 말함이다. 네 귀에 먼저 돌을 깔아놓고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이 기록이 특별한 기록은 아니다. 바로 '현현기경'의 말이기 때문이다. 을동은 현현기경을 지남규에게 받아가 공부를 한 것이고 어려운 한문 구절을 물은 것이다. 조선시대 '현현기경' '선기무고' '적정록' 등 중국의 바둑책들은 거의가 들어와 읽히고 있었다. 물론 조선만의 '기보'도 생성되고 출판되기도 했다.

우리는 조선은 '순장바둑'이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선은 순장바둑도 사배자식 바둑도 두었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시시각각 정보와  문화를 교류하던 현실에서 바둑만이 순장식 바둑을 두며 고립을 자처 했다고는 믿지 말자. 조선시대 어느 시기에 오면서 갑자기 순장식바둑이 유행했던 이유는 앞으로 연구할 과제라는 점은 인정하고 조금 더 넓고 깊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