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남규의 바둑사랑은 스스로 고수를 지향하는 기력에 대한 자부심에 기반하지만, 바둑이 단순 오락이 아닌 어떤 철학적 의미로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도  큰 영향을 받는다. 지남규는 바둑이 담아낸 속성이 하늘의 천기(天機)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한양에서 돌아온 지남규의 일상은 다시 시작된다.

6월14일. 흐림 아침 비 조금 (蔭晁雨)
상점을 열었다. 국운(國運)을 운운하는 요설이 나돈다. 바둑에 이런 말이 있다. 백의 의도를 알고 흑을 지키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知其白守其黑爲天下式).
 

6월15일 흐림.
형리가 와 또 하도낙서를 운운한다. 바둑을 여러 판 두며 시간을 보냈다. 닭 한마리 내기를 하여 진 형리가 울상을 하고 돌아갔다. 어제 오늘 10냥 이익을 보았다.

바둑을 두며 입으로 연신 하도수를 운운한 형리가 내기바둑으로 닭 한마리 잃고 투덜대며 돌아간 대목이 재미있다. 감히 하도를 운운하는 사람이 닭 한마리에 울고 웃는 소시민의 내심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다. 고래로 바둑을 병법이나 천문의 하나로 본 생각들이 있었다. 지방 관아의 일개 아전의 입에서 하도수법(河圖手法)의 언급이 나온 것도 바둑을 천문으로 보려한 생각의 반영이다.

필자는 얼마전 기론(碁論)이라는 1765년에 쓰여진 바둑책을 보았다. 40쪽의 고서로 작가와 기록날짜가 특정 된 자료인데, 바둑을 하도낙서로 이해하려한 작가의 사고가 눈길을 끈다. 책자의 앞표지는 '기론', 뒷표지는 '하도낙서'라 되어 있었다. 올 8월쯤 이 책을 소개할까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한국국비문학대계'에 70년대 전국에서 모은 전설 신화모음이 있는데 경상남도 김해와 밀양지역에서 채록한 자료 중에 '하도바둑'과 '낙서바둑'이 기승전결의 요소를 갖춘 완전한 스토리가 남아있어 위의 자료와 비교할 수 있다.

하도낙서(河圖落書)는 주역의 발전 과정에 나타난 한 유파다. 시초는 '초연수' '경방'이나 하도낙서를 철학의 문제로 끌어올린 사람은 '소강절'이라 할 수 있다. 지남규 스토리에서는 '소강절'의 주역인 하도낙서가 서양에 전해져, 라이프니츠(1647-1716)가 이진수(二進數)를 발견하게 했다는 논문이 있고  또 그건 오해라는 논문도 있다는 정도만 알고 넘어가면 되겠다. 사족으로 현대의 학자 중 하도낙서를 아주 잘 설명한 김상일(미국 클리어몬트 대학원 교수)의 요점정리를 한번 읽고 넘어가자.

- 하도낙서가 만들어진 취지는 아포리아에 대한 도전이다. 역의 도상 차원의 관점에서 고찰해 보면 의미가 있다. 3차원과 그 이상의 차원에서 역을 바라볼 때 역의 강물이 어디까지 흘러왔고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다.

2차원 사각형을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3차원의 원기둥 그리고 위상공간의 4차원 뫼비우스띠와 클라인병 사영평면의 대칭구조를 역의 음양대칭 구조와 비교할 때 선명하게 역의 도상들이 갖는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뿐 아니라 하도와 낙서의 문제점도 발견하게 된다. (김상일의 역과 탈출의 논리 중)

하도낙서는 수로 세상만물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동양철학자들이 만들어낸 이론이다. 이 고상(?)한 이론이 바둑으로 스며들어 와 책을 쓰고, 옹벽진 산골에서 하도바둑과 낙서바둑이 승부를 다투는 전설을 만드는가 하면, 관아 아전이 하도를 운운하며 바둑을 두는 등 조선의 시공간을 일통하며 나타나는 점만 알면 족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