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7년 정묘년 6월 복날 안산 아회도(雅會圖)를 그린 강세황은 같은 동리에 살던 일곱 살 어린아이를 눈여겨 보았다. 어린아이는 강세황의 집을 수시로 찾아와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골똘하게 지켜보곤 했다. 강세황은 아이가 그림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붓을 주고 날마다 자신의 집으로 불러 그림의 세계를 알려 준다. 그 아이가 바로 김홍도다.

시서화금기사로 통칭되는 예능(滑能)은 개인만의 노력으로 이루기 힘든 분야로 누군가의 안내와 지도가 필요하다. 하여 이 분야의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후계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후학이 선학을 뛰어 넘는다는 것은 언제나 유쾌한 일이다.

강세황에게는 강이천(姜彛天, ?-1801)이란 손자가 있다. 강이천도 시서화 삼절로 불리던 재주 있던 사람이다. 정조가 신동이라 불리던 열두 살 강이천을 불러 시를 지어보라 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탁발한 사람이다. 그러나 강이천은 신앙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강이천은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주문모와 함께 효수된다. 주문모가 정감록에서 말하는 정도령이란 발언을 한 것이 치명타였다. 강이천은 '한경사' 103수를 지어 정조시대의 한양풍경을 전해준다. 그리고 '이화관총화'를 써 바둑계에도 작은 도움을 준다.

강이천은 윤덕희(尹德熙, 1685-1776)가 바둑판을 잘 만든다 했다. 자를 대지 않고도 바둑판 19줄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윤덕희 하나라 했다. 이 윤덕희가 강세황가(家)와 더불어 조선의 유명 화가집안이던 윤두서의 아들이다. 윤덕희는 실사(實寫)에 뛰어 난 화력의 소유자다.

 (윤덕희의 그림)

윤덕희는 윤선도의 후손으로 해남 윤선도 집안의 뒷산에 자생하던 비자나무를 잘라 다듬어 바둑판을 만든 모양이다. 비자나무를 재료로 당대의 화력의 소유자가 직접 만든 바둑판이라면 명품 중의 명품일 것이다.

5월27일. 맑고 더움.
쌀 땔감 담배 삼베 등을 60냥어치 들였다. 논에 피살이를 했다. 품삯 국수값으로 10냥을 썼다.

5월28일. 맑고 더움.
을동이 왔다. 기보를 바꾸어 주고 바둑 몇 판을 두었다. 며칠간 장사가 신통치 않다. 여름은 늘 그렇다. 늦게 술을 마시고 잤다. 나라에 난리가 났다.

지남규의 을동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참으로 보기 좋다. 강세황이 어린아이의 기질에서 장래의 김홍도를 내다보며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과 비슷하다. 강세황이 김홍도에게 붓을 들려주고 그림의 세계를 열어 보여주었다면 지남규는 을동에게 바둑의 세계를 안내하는 역할이다. 물론 지남규의 안내가 을동의 미래를 보장한 것도 아니고 실증자료도 없다.

그러나 한 세계의 재능을 간파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 재능의 후계를 생각하고 기여도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직업의 책무가 아닌 예인의 책무로 조건 없는 후계자를 키울 때 예인의 계보는 이어진다는 말이 실감 난다. 세상은 강세황과 지남규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발전한다. 세상은 언제나 부조리한 듯하지만 문득 문득 저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희망을 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