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남규는 장마당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상인이다. 그러나 그의 일기 속에 자신의 생도지망의 원천인 장마당 풍경이 한줄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지남규가 살던 장마당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1901년 조선에 왔었던 프랑스의 고고학자 '에밀브르다레'의 눈에 포착된 경기도 '파주장'의 모습으로 지남규가 살던 장마당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겠다.

에밀브르다레는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이란 책을 프랑스에서 출간했고 그 책이 국내에 '정진국'의 번역으로 소개된 바 있다.
 

(마침 그날이 파주장이었다. 너도 나도 긴 담뱃대를 물고 기념비 같은 모자를 쓴 정말로 단 한번 본 적이 없는 농부들이 거리에 넘쳤다. 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조잡한 일본의 진열장 속에 든 붕대(양약을 말하는 듯)를 사려고 거의 한시간이나 흥정을 했다.

곡물장사가 가장 잘된다. 작은 종이자루에 든 곡물을 팔고 면직물, 삼베, 모직, 명주 등도 잘 팔린다. 파주는 낡은 오둑막집들이 가득하다. 한복판에 객사가 버티고 있고 그곳에 황제폐하의 위폐가 모셔져 있는데 제단은 허물어져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고 거미줄과 새집들이 썰렁한 사원을 덮고 있다.

흙과 돌 너저분한 풀로 가득한 이 공공 건물을 문짝에 그려진 태극 문양만이 돋보이게 한다. 봄날의 꽃들과 장날의 다채로운 풍경이 이곳의 모습을 꾸며준다.)

지남규가 살던 시대와 비슷한 시기의 파주장의 모습은 망해가는 조선의 마지막 모습이다.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들 위에서 독사같이 군림하던 지방 '관아'가 1901년에는 거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객사는 지방 관아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수령이 매월 보름 국왕이 있는 한양쪽을 향해 망궐례를 올리던 장소다. 그런 건물이 어느 순간 황성옛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장마당의 풍경은 흥겹고 활기로 가득하다. 정치와 관계 없이 생업을 이어가야 하는 백성들의 모습은 건강하고 지속적이다.

5월20일. 흐리고 맑음.
하루를 더 쉬었다.  (北風其凉 雨雪其雱.)

5월21일. 맑음.
큰장이다. 70냥 이익을 보았다. 쌀 땔감 고기 담배값으로 50냥을 썼다. 김이 사전 앞에서 박포((博譜)를 하다 시비가 되어 싸웠다. 형리가 와서야 종결이 되었다.

(장서각소장본 박보)

지남규는 울쩍한 마음에 하루를 더 쉬고 일기에 시 한줄을 첨가해 놓았다. 시경 패풍의 한 구절이다. 원 내용은, 북쪽 바람차고 눈발이 펄펄 날리면 나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당신이 용기를 내어 나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떠나달라는 내용인데, 이 대목에서 지남규가 이 시를 거론한 이유를 모르겠다. 이것도 바둑으로 많은 돈을 잃은 충격인가.

장마당이 풍성하면 에피소드도 많기 마련이다. 필자는 어린 시절 장마당에서 자란 탓에 지금도 간혹 5일장의 풍경이 떠오른다. 싸전, 잡화전, 생선전, 옹기전, 우시장, 그리고 장마당을 찾던 약장수와 연극단이 어우러져 품어내던 낭만적 풍경이 추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장이 파장이 다가오면 꼭 싸움이 나곤 했었다. 술 한잔씩 챙기신 분들의 뒤풀이인데 어린 아이들은 그 모습마저도 재미 있었다. 김이 장마당에서 '박포'를 하다 시비가 붙어 큰싸움을 벌인 모양이다. 불과 수일전 백금을 따간 김이 장마당에서 박포를 벌이는 모습은 전혀 향기롭지 않다. 박포는 박보((博譜)를 말하는 것으로 장기의 수를 이용한 도박으로 수가 무궁무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