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몸살에서 조금 회복한 지남규는 한동안 안보이는 김을 찾아 그의 집을 찾는다. 병문안을 안올 김이 아니기에 내심 걱정을 하면서 부리는 사람을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나선다. 병중에 기력을 회복하는 것에는 운동도 필요하다.

5월9일. 따뜻한 바람이다(朗風)
김이 집에 없다. 다 쓰러져가는 삼칸집에 밥수저 하나와 밥그릇 몇개가 전부인 살림이다. 오래전부터 혼자 살기는 하지만,  몸이 가벼워 좋은 것인가. 김은 또 좌은(坐隱)인가.

좌은은 바둑의 다른 말이기도 하지만 바둑으로 숨는다는 의미도 있다. 강호(江湖)는 숨기 좋은 곳이다. 기인기사는 강호의 골목으로 숨는다. 작은 은자(隱者)는 산속으로 숨고 큰 은자(隱者)는 저자거리로 숨는다는 말이 있다. 바둑으로 숨는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이 있겠다. 팔구십년대 기원의 풍경을 기억하는 분이라면 더욱 그럴 터이다.

그때 대한민국의 어떤 기원이라도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바둑손님을 기다리던 기객(碁客) 한둘을 보는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좌은행(坐隱行)의 실천가(?)였다. 필자는 지남규의 일기를 읽으면서 박지원이 기록한 그의 친구가 떠오른다. 박지원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한가하고 무료한 친구가 있었던 모양이다.

'영수재'는 양인수의 초당이다. 깎아지른 벼랑의 늙은 소나무 아래 있다. 여덟개의 기둥을 세우고 안쪽 깊은곳에 방을 들였는데 창살을 성글게 하고 평마루를 두어 널찍했다. 이어서 이층루각을 만들어 안에 조용한 방하나를 더 만들고 대나무로 난간을 두르고 띠풀로 지붕을 했다. 바른편은 둥근창이고 왼편으로 교창을 만들어 오밀조밀 갖출 것은 다 갖추니 겨울은 밝고 여름은 그늘이 졌다.

집 뒤에는 십여 그루의 배나무가 있고 대사립 안팎은 은행나무와 붉은 복숭아나무가 빽빽하다. 바닥에는 하얀 돌이 깔려있고 맑은 계곡물을 먼곳에서 끌여들여 섬돌 아래에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 양인수는 천성이 느긋하여 집에 있기를 좋아하여 무료하면 발을 내리고 괘와 거문고 검 향로 술병 바둑판 등이 어지러운 사이에 퍼진 듯 누워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다 자다 일어나서 발을 걷고 해가 이른가 늦은가를 내다본다. 섬돌 위에 나무 그늘이 잠깐 사이에 옮겨 가고, 담장밑에 낮닭이 우는 것을 보고  그때서야 궤에 기대어 검을 살펴보고, 혹은 거문고 두어 곡을 타고 술 한잔을 홀짝거려 스스로 가슴을 트이게 하거나, 혹은 향 피우고 차 달이며, 혹은 서화를 펼쳐 보기도 하고 혹은 옛 기보(碁譜)를 들여다보면서 바둑판 위에 두어 판 복기를 한다. 그러다가 하품이 밀물이 밀려오면  눈시울이 처진 구름마냥 해서 다시 누워 버린다. 

손님이 와서 문에 들어서면, 발이 드리워져 고요하고 낙화가 뜰에 가득하며 처마 끝의 풍경은 저절로 울린다. 손님이 자(字)를 서너번 부르고 나서야 일어나 앉는데, 다시 나무 그늘과 처마 그림자를 바라보면 해가 여전히 서산에 걸리지 않았다.

 [晝永簾垂齋 梁君仁叟草堂也 齋在古松蒼壁之下 凡八楹 隔其奧 爲深房 踈其欞 爲暢軒 高而爲層樓 穩而爲夾室 周以竹欄 覆以茅茨 右圓牖 左交窓 軆微事備 冬明夏陰 齋後有雪梨十餘株 竹扉內外 皆古杏緋桃 白石鋪前 淸流激激 引遠泉入階下 爲方池 梁君性懶而好深居 倦至輒下簾 頹然臥乎烏几一琴一劒一香爐一酒壺一茶竈一古書畵軸一碁局一之間 每睡起 揭簾看日早晏 則階上樹陰乍轉 籬下午鷄初唱矣 於是乎據几看劒 或弄琴數引 細吸一盃 以自暢懷 或點香烹茗 或展觀書畵 或棋按古譜 擺列數局已焉 久來如納潮 睫重若垂雲 復頹然而臥 客至入門 則簾垂寂然 落花滿庭 簷鐸自鳴 字呼主人三四聲 然後起坐 復觀樹陰簷影 則日猶未西矣 ]  =북한 보리출판사=

(박지원 친필 원고 면양잡록중 칠사고)

박지원의 친구는 한가한 사람이다. 게으르고 나태하다. 그러나 이 속에 기보를 보며 복기를 하고 있는 조선의 한 게으른 선비의 모습이 그림같다. 양인수의 풍모는 '이서구'가 바라고 원했던 귀거래사다. 이서구도 향리로 돌아가면 산수간에 초막 한채 지어놓고 거문고 바둑판 하나씩 들여놓고 찾아오는 친구와 주담수담을 나눌 수 있다면 족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남규의 친구 김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김은 혼자 사는 홀아비다. 문사에 어느 정도 재력까지 갖추고 있던 박지원의 친구와는 품어내는 스팩트럼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남규는 김의 행방을 좌은행(坐隱行)이라고 한다. 그랬다. 조선의 한때 '좌은행'을 일삼던 사람들이 있었다. 다음편에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