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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월드컵 티켓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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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월드컵 티켓 사건
2002-08-16     프린트스크랩
별들은 총총했고 바람은 싱그러웠다. 6월의 밤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면서, 성희룡은 방대한 야영촌으로 변한 스타디움을 새삼스럽게 둘러봤다. 이곳 저곳에 진을 친 텐트 수효를 얼추 세어보니 300개도 넘었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쉴 새없이 터져나오는 "대~한 민국"과 "오~필승 코리아"의 외침. 온통 붉은 색으로 몸을 감싼 '밤의 악마'들이 도처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의 구별이 도대체 불필요했다. 모두의 눈 망울엔 희망이, 몸짓엔 활기가, 목청엔 보람이 가득 서려 있었다.

성희룡 그가 이곳 인천 문학 경기장 앞에 정착(?)한지도 오늘로 이틀째다. 이런 방법 아니면 월드컵 축구 입장권 구하기란 사막에서 빙수 구해 먹기 보다 더 힘들다고들 했다. 이제 내일이면 저~어기 보이는 저 거대한 운동장 안에서 한국 대 포르투갈 전이 열린다. 우리나라가 대망의 16강 꿈을 이룰 역사적 현장이다. 나는 그 감격적 순간을 오나랑 씨와 단 둘이 가진다ㅡ. 성희룡은 새삼스럽게 온 몸을 부르르 떨며 전율했다.

성희룡이 집을 나와 이 황량한 벌판에서 노숙을 하게된 이유를 말하라면 너댓가지 쯤 된다. 첫째는 물론 축구에 대한 사랑이고, 둘째 기왕이면 역사의 현장에서 감격적인 장면을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야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가진 욕망이다. 성희룡으로선 좀 더 절박하면서도 분명한 이유가 더 있었다.

오나랑 양을 향한 누구도 못 말릴 연심. 그것이야 말로 성희룡을 이처럼 '월드컵 노숙자'로 만든 진짜 이유였다. 그리고 그 웬수같은 변덕수를 멀찌감치 따돌릴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흐뭇했다. 성희룡은 자신의 우수한 두뇌와 빠른 판단력, 그리고 비호같은 순발력에 스스로 만족하며 6월 초여름 밤 인천 하늘 창공을 향해 흐흐 웃음을 날렸다.

나흘 전의 한국 대 미국 전은 만방기원에서 모두 함께 어울려 관전했다. 오만방 원장 부부를 비롯해 성희룡과 변덕수, 구경만 선생, 오나랑 양 등 10명도 넘었었던 것 같다. 경기가 1대1 무승부로 끝나자 오만방씨가 "이제 워찌되는 거여?"하고 떨떠름하게 물었고, 변덕수는 "16강에 오를려문 우리가 포르투갈 한테 무조건 이겨야 함다"하고 저만 아는 사실 처럼 떠벌였더랬다.

TV 화면은 온통 붉은 빛으로 덧칠을 한 듯 했다. 별반 크지않은 수상기 속에서 바글거리는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 태극기는 그들의 손과 머리와 어깨도 모자라 여성들의 아랫도리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아, 그 역동적 움직임이 던져주는 감동이란. 평소 점잖기 이를데 없는 구경만 씨가 수줍게 입을 연 것도 그 때였다. "우리도 한번 나가서 거리 응원 하면 어떨까?" 나랑이 그 때 박수만 안쳤어도 성희룡이 축구장 앞 노숙 결심으로까지 비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작전 장소는 시청 건물 정문 앞. 디 데이(D day) 에치 아워(H hour)는 6월 14일 오후 1시. 점심들 든든히 드시고 시간 늦지않게 집결해 주세요. 지참물은 각자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변덕수는 지가 무슨 야전 사령관이나 되는 것 처럼 신이 나서 떠들었다. 나랑 씨 붉은 악마 유니폼은 자기가 준비할테니 걱정말라고도 했다.

성희룡은 그날 밤 기원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휴대폰부터 뽑아들었다. 전화선 저편에 떠 오른 나랑 씨의 낭랑한 목소리. 희룡은 가빠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신이 마련한 극비 전략을 털어놓았다. 처음엔 그냥 무덤덤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이내 두 옥타브는 높아졌고, 마지막 무렵엔 들뜬 채 말꼬리가 가늘게 떨리기까지 했다.

"한국 팀 축구 경기를 현장서 볼 수있게 해 주신다구요? 오마나! 정말 그게 가능할까요?" 그녀는 그저 "오마나, 오마나" 만을 반복해 외쳤다. 오냐, 내가 나랑씨를 위해서라면 달이라도 못 따다 주겠느냐. 성희룡은 출근길 곧바로 총무부에 들러 나흘 간의 휴가를 낸 뒤 뒤도 안돌아보고 귀가했다. 그리고 광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텐트를 찾아내 정성껏 손질했다.

오나랑(吳奈娘)양. 오만방 원장의 외동 딸인 그녀는 만방기원의 꽃이자, 죄없는 주변 뭇 총각들로 하여금 무시로 불면증에 시달리게 해 온 방년 24세의 아릿다운 처녀다. IMF 사태 때 많은 기원들이 문을 닫는 가운데서도 만방기원이 굳건히 버텨낸데는 딸 나랑 양의 공이 매우 컸다는 점을 오만방 씨도 인정한다. 바둑은 단수도 모르는 주제에 괜히 나타나서 나랑 양을 향해 침을 흘리다가, 내지않아도 되는 기료(棋料)까지 내고 아쉬운 듯 사라지는 얼빠진 녀석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축구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몰려든 야영객 수는 점점 더 불어나고 있었다. 그래도 이 무리들 중에서 상당한 전입 고참(?)인 줄 알았는데, 앞쪽 텐트 수효를 세어보던 성희룡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진다. 가만히 보니 혼자 텐트를 지키고 있는 건 자기 뿐인 것 같다. 가가호호, 아니 모든 텐트 마다 여럿이 어울려 웃고 떠든다. 친구며 가족이며 좌우간 몽땅 동원한 모양이다. 팀을 짜 서로 교대도 해 주는 눈치다. "나랑 씨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성희룡이 길게 내뿜은 한숨에 직격탄을 맞은 라면 봉지 하나가 10M 밖으로 너풀거리며 날아갔다.

그토록 고생해서 성희룡은 과연 꿈을 이뤘을까. 오나랑 양과 단 둘이, 손을 꼭 잡은 채 문학경기장에서 한국 대 포르투갈 전을 감동적으로 관전했을까. 그 걸 확인하기 앞서 먼저 둘러볼 데가 있다. 시청 앞 광장이다. 어느 새 새로운 동이 터 결전의 날이 밝자 우리의 만방기원 식구들은 시청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용감히 돌진했더랬다. 한국의 16강 진출 여부를 가릴 역사적 경기는 시시각각 가까와지고 있었다.

'우리 모두 새빨개집시다(Be the reds)'. 오만방 원장 부부와 구경만 씨 등 50대 노장들조차 가슴에 새겨진 구호에 백 프로 충실하기로 작심한 듯, 얼굴까지 홍조를 띠고 있다. '대~한민국'에 이어지는 다섯 박자 박수 리듬이 계속해서 어긋낫지만 뭐 어떠랴. "어때, 나도 어엿한 붉은 악마지?" "영감은 그냥 늙은 악마라면 되겠수. 호호" 오만방 씨 부부도 마냥 즐거운 모양이다. 구경만 씨는 오만방 원장에 의해 '붉은 악마' 아닌 '(퉁퉁) 불은 악마'로 명명됐다.

아랫층 바둑 교실 강수만 사범, 그리고 허기진 제갈길에 이르기까지 만방기원 단골 멤버들이 총 출동했다. 안 보이노니 오직 성희룡 그의 얼굴 뿐이다. 어찌된 일일까. 누구보다 신이 난 사람은 변덕수다. 거리 응원 자체도 째지게 재미있을 뿐 아니라, 나랑 양과 함께 있으니 극락에라도 온 기분이다. 그 웬수같은 기적(棋敵) 겸 연적(戀敵) 성희룡이 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쁘다. 경기가 시작되려면 아직 1시간 여나 남았는데도 대형 전광판의 TV가 켜졌다. 온 천지를 집어 삼킬 듯한 함성이 광장을 뒤덮는다.

성희룡은 그 시간 자신이 하숙 중인 동네 인근 대폿집에서 소주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텅텅 비어서 휑뎅하기 조차 한 홀에 다른 손님이라곤 씨가 말랐다. "축구 시합이 도대체 뭐간데, 그거 두 번만 더 했다간 문 닫아걸고 쪽박차기 십상이겠구망ㅡ." 세 병째 병을 테이블에 꽝 소리나게 갖다 놓으며 주모 할머니가 투덜거렸다. 바깥은 고막을 찢는 함성과 꾕가리 소리로 마치 프랑스 대혁명이라도 일어난 것 같다.

엎드렸던 희룡이 갑자기 비칠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곤 주머니를 뒤져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할머니의 손에 쥐어준다. 영문을 몰라하는 할머니가 "이게 뭐시여?"하고 묻는 것과, 만취한 성희룡이 앞으로 고꾸라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할머니가 들여다보고 있는 건 월드컵 입장권이다. 액면가 30만원, 암표 시세론 100만원을 불러도 날개돋친 듯 팔려나간다는 한국ㅡ포르투갈 전 티켓 두 장.

다시 시계 바늘을 어제 밤의 문학 경기장 앞 광장으로 돌려보자. '노숙자' 성희룡은 외로움과 무료함을 달래러 '마실'을 나갔었다. 텐트의 숲을 헤치고 나가던 그의 시야에 바둑 판이 들어왔다. 돗자리 위에 펼쳐진 접는 바둑 판, 그 한쪽으로 한 여성이 혼자 돌을 놓아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선 성희룡은 깜짝 놀랐다. 대학 시절 알고 지내던 후배 K가 아닌가. 교내 바둑 동아리 골방에서 마주칠 때마다 복학생 희룡에게 '성희롱(性戲弄) 아저씨'라 놀리며 묘한 호감을 보였던 하급생. 그녀의 눈이 처음엔 등잔 만큼 커졌고, 그 다음엔 반가움에 펄쩍 펄쩍 뛰었다. 8년 만이었다.

옛날 기분으로 돌아간 둘은 그 아득한 추억을 되살려 바둑 판 앞에 마주앉았다. 흑 돌이 담긴 통을 제 앞에 당겨놓은 K는 다섯 점을 깔았다. 지는 쪽이 팔뚝을 맞기. 칫수도 벌칙도 캠퍼스 시절 그대로다. 일곱 점은 놓아야하는 실력이었지만 적당히 이기고 적당히 져 주면서 즐겁게 시간을 죽였던 추억. 타임 머신을 타고 그 옛날의 젊음으로 돌아간 듯, 성희룡은 꿈을 꾸는 기분으로 가볍게 바둑 돌을 놓아갔다.


바둑은 어느 새 중반을 넘어섰다. 적의(敵意) 없이 두어간 탓이리라. 중반 무렵 이미 흑 필승의 구도가 짜여졌다. <1도> 흑 1로 뛴 장면에서 백은 전체가 엷고 집도 부족하다. 까짓 것, 팔뚝 몇대 맞아주지 뭐. 빙글거리던 성희룡의 눈에 K의 가녀린 손 모습이 들어온다. 백옥 처럼 희고 길어 보는 이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곤 하던 저 손목. 성희룡은 순간 생각을 바꿨다. 이 바둑을 져서 내 손목을 잡히느니, 이겨서 내가 저 손목을 잡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뜻 밖에도 그녀의 바둑 실력은 두어 점은 강해져 있었다. 피차 양보없는 각축 속에 종반을 맞았으나 백 고전이 거듭되고 있다. <2도>를 보자. 2의 곳 패가 유일한 미결 상태. 팻감은 흑이 A, B, C등을 갖고 있는데 반해 백은 변변한 실탄이 없다. 흑 승이 거의 확정 단계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흑 1이 놓였다. 백 2로 D 때 2로 백 한점을 따내 패를 계속하면 된다고 순간적으로 착각한 것이다.


여기까지야 뭐 죽을 죄는 아니었다. 사실 아는 여성을 우연히 만나 바둑 한 판 둘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실착을 깨달은 K의 다음 동작이 비극(!)의 씨앗이 됐다. 그녀가 <2도>의 백 2를 잽싸게 들어낸 뒤 흑 1을 A 자리에 옮겨 놓은 것이다. 이건 그 옛날 두 사람의 대국에서 K가 툭하면 동원하던 애교성 대국 습관이다. 성희룡은 황급히 그 동작을 제지하려 손을 뻗었다. 결국 두 사람의 손은 공중에서 한데 밀고 당기는 서커스를 했고, 그것으로 모자라 얼굴까지 부딪쳤다. 꽤 오래 그런 동작으로 엎드린 채 낄낄거렸던 것 같다.

"알았어, 물러줄께." 인심 쓰듯 한 마디 외친 성희룡은 순간 이상한 육감을 느끼고 옆을 흘낏 올려다 봤다. 하나님 맙소사! 오나랑 양이 그 곳에 장승처럼 서 있었다. 컴퓨터 학원 수업을 마치고 달려온 듯,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의 나랑은 완벽한 천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하얗게 질린 성희룡은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천사는 획 돌아서더니 빠른 걸음으로 텐트촌 숲을 헤치며 사라져갔다. 보자기에 싸인 채 그녀 손에 들려있었던 것은, 나중 곰곰 생각해 보니 정성들여 만든 음식이 잔뜩 담겨있었음에 틀림없는 찬합 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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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성의난 |  2003-08-27 오후 1:00: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역시 인생을 살아봐야 안다니까.. 희룡 사범님께서 색에 약하다는것은 익히 들은 사실입니다만 ;;  
우리임애 |  2004-09-04 오후 5:59: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색에 약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ㅋㅋ  
thxzerg |  2005-01-05 오전 4:39: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색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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