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뭐야, 도대체 저년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만택은 당장이라도 여자를 다그치고 싶었다. 하지만 실상 다그쳐야할 입은 다물고 머릿속만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돌려도 여자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그 궁금증을 여자가 풀어줬다.

“여기서 나가는 조건으로 이 두 장의 수표 중 한장을 드릴거여요. 그렇다고 그냥은 아니어요. 그냥 10억을 드리기에는 저도 억울하니까요. 내기를 하지요.”

“내기?”

“네, 내기를 해서 이기면 10억을 드리죠. 물론 지면 1천만원을 갖는 거죠. 어때요?”

만택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만택을 옆에 서있는 남자들이 쳐다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싫다,라고 외칠만한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찌보면 만택에게는 이미 선택권이 없는 결정인지도 모른다.

“내기, 그래, 뭐로 내기를 하자는 거야?”

만택은 다시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아무 거라도 좋아요. 어차피 운에 맡기는 거니까요.”

여자는 만택한테 공을 돌렸다.

공을 받은 만택은 이 느닷없는 상황에 생각할만한 게 없었다. 같은 남자라면 싸움을 하든 팔씨름을 하든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여자와 할 수 있는 내기라는 게 어디 흔한가. 

공을 받은 만택이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있자 여자가 힐끗 옆을 보며 말을 했다.

“저걸로 하죠. 간단하게.”

여자가 가리킨 건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화투장이였다. 만택이 좋다 싫다 말할 사이도 없이 여자는 화투장을 주섬주섬 추슬러 서비스 패를 빼고 48장을 엎어서 넓게 펼쳐놓았다.

“높은 쪽이 이기는 거여요, 어때요?”

만택은 흩어져 있는 화투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틈만 나면 가지고 놀았던 화투장이다. 아무리 엎어져 있어도 대충 패를 다 알 수 있는 정도였다. 전혀 마다할 이유가 없다.

“좋아, 하지.”

“먼저 고르세요.”

만택은 희미한 불빛 아래 화투장을 유심히 보았다. 48장의 화투장 속에 약간 다른 색의 화투장 5장이 보였다.

비광, 비 십끗, 똥 껍데기, 초 십끗, 일광이었다.

화투장이 부족해 다른 화투장을 섞어놓은 것이다. 대충 보면 같은 색이지만 유심히 보면 색이 좀 더 진했다.

그 중에 일광은 무늬가 달랐다. 일광을 뺀 4장 중에 3장은 높은 패다. 

초 십끗을 뽑을 확률은 25프로. 75프로는 높은 패의 확률이다.

만택은 75프로의 확률에서 더 운을 바라는 듯 뚫어지게 화투장을 내려다보았다.

비광을 뽑으면 더 볼 게 없었다. 

다른 남자들도 만택과 같은 생각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자들은 꿀꺽 침을 삼켰다.

돌부처처럼 화투장을 보던 만택이 결정을 한 듯 서서히 손을 움직여 화투장 한장을 집었다. 자기 앞으로 가져온 화투장을 만택은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마치 이 화투장에 자신의 운명이 걸리기라도 한 듯. 그러한 심정은 만택의 주변에 서있는 다섯 남자도 같았다.

12개의 눈이 일제히 만택의 손에 집중됐다.

만택은 서서히 화투장을 엄지손가락으로 밀며 뒤집었다. 화투장이 만택의 손에서 활처럼 휘며 자신의 속살을 드러냈다.

잠자리인지 새인지 알 수 없는 그림.

비 십끗이었다. 

비 십끗이 나오자 남자들은 환호했다. 비광은 아니지만 그나마 최고의 패다. 

역시 아직 내 운은 끝나지 않았군. 

만택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까 보슈.”

남자의 말투는 어느덧 반올림이 되었다. 승자의 여유였다.

여자는 잠시 화투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여자의 새하얀 손이 한쪽으로 가자 남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색깔이 다른 4장 중 한 장이었다. 그것도 일광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왜 하필 저쪽으로 손이 가는 거야.

남은 3장은 초 십끗, 똥 껍데기, 비광이다.

비 십끗보다 높은 비광을 뒤집을 확률은 33프로...

총 47장 중에 색깔이 다른 3장, 그중에 다시 비광을 선택할 확률은...

계산이 안되는 확률이다. 그렇게 운이 좋을 리는 없다.

만택과 다섯 남자들의 눈은 화투장을 잡은 여자의 새하얀 손에 고정되었다.

여자의 손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남자들한테 그렇게 보인 것이다. 

슬로우 비디오처럼 아주 느리게 여자의 손이 화투장을 뒤집었다. 

그림은 우산을 쓴 우비를 입은 이상한 남자와 개구리가 그려진 화투장이었다.

비광이다. 

일순 모든 것이 정지된 듯했다.

만택은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만 부릅뜬 채 할말을 잃었다. 

여자가 10억짜리 수표 한장을 지갑에 넣고 일어설 때까지 만택은 그렇게 넋나간 듯이 앉아있었다.

“게임은 끝났어요. 오늘까지 비워주세요.”

“이년이 어디서 개수작이야.”

만택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만택의 행동에 다섯 남자도 일제히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남자가 한입으로 두말 하실 건가요?”

“개소리하지 마. 단돈 천만원에 여길 비우라고...?”

“착각하고 계시군요. 천만원은 제가 드리는 성의여요. 주지 않아도 괜찮은 돈이라는 거죠. 거기에 10억을 가질 수 있는 기회도 드렸어요. 그 기회를 잡지 못한 건 최만택씨 당신이고요. 김실장 처리하세요.”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서있는 남자에게 나지막히 지시하고 컨테이너를 나섰다. 

“어딜 가는 거야! 너 거기 서!”

 "여기까지입니다."

여자를 뒤쫓아 나가려는 만택을 김실장이라는 남자가 막아섰다.

"비켜 새꺄!!"

만택이 김실장에게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컨테이너 밖에서 대낮같은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뭐야, 이건!”

만택과 남자들은 득달같이 컨테이너 창문을 열어 밖을 보고 기겁을 했다. 컨테이너 밖에는 언제 왔는지 십수 대의 차가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있었고 족히 이삼십 명은 돼 보이는 남자들이 장승처럼 서있었다. 한결같이 검은 양복에 건장한 남자들이었다. 그들이 왜 여기에 와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앞으로 1시간의 여유를 드리겠습니다. 각자 짐을 챙기는 데는 충분한 시간일겁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만 행여라도 불미스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나마 드리려고 했던 저 수표도 드릴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김실장이라고 불리는 남자의 말투는 더할 수 없이 깍듯했지만 말끝은 단호했다.

만택은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1천만원짜리 수표를 보았다. 조금전까지만해도 휴지조각처럼 보였던 수표가 지금은 큰돈으로 보였다.

만택은 힘없이 수표를 집어들었다.

벤틀리는 청담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여자는 뒷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을 자는 건지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구스타프 말러의 대지의 노래였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

최형택이 기원에서 장난으로 노름을 하다 하우스에 간 것도, 하우스에서 하우스장의 소개로 여자에게 돈을 빌리게 된 것도 좀전에 여자가 비광을 뽑게 된 것도...

어떤 것도 우연은 없었다.

여자는 화투장을 추스르면서 비광의 화투장 옆면에 손톱으로 자국을 냈다. 그 자국에는 여자의 손톱에 칠해진 매니큐어 펄이 묻었다.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유심히 봐도 알 수 없지만 당사자는 펄이 불빛에 반짝이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펄이 반짝이는 화투장을 골라잡는 건 누워서 떡먹는 것보다 더 쉬웠다.

정확히 1120평.

앞으로 5년 후에 그 땅 옆에는 2만 세대의 신도시가 들어서게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신도시가 건설되면 수용되는 땅은 똥값이다. 겨우해야 공시지가만 보상받게 된다. 반면에 신도시에 접해 있는 수용되지 않는 땅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여자의 계산대로라면 폐기물 처리장 땅은 300억을 넘게 될 것이다. 여자는 최형택에게 겨우해야 6억을 빌려주고 5년 후에 300억이 넘게 될 땅을 넘겨 받은 셈이다. 최만택에게 준 1천만원은 그야말로 껌값보다도 못한 금액이었다.

벤틀리는 청담대교를 건너 동부간선도로로 접어들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운전하던 김실장이 물었다.

“집으로 가요.”

여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여자의 지시에 벤틀리는 동부간선도로를 버리고 내부순환도로로 올라탔다.

평창동으로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