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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30 조회 5328    프린트스크랩
 


 

 

노래와 전혀 관계없는 바둑이야기  편지       


 

새벽부터 내리던 비는 저녁이 되자 아예 비바람으로 바뀌었다. 그 비바람 속에 낡은 1톤 화물차는 비포장인 좁은 산길을 위태롭게 달리고 있었다. 라이트 한쪽은 고장이 난 데다 낡아빠진 와이퍼는 쏟아지는 빗물을 쓸어내기엔 이미 힘이 부친 듯 삐그덕 거렸다.

이런 날씨에 어떻게 이런 고물차를 운전할 수 있는지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운전하는 50대의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낡은 카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목이 터져라 따라 부르는데 여념이 없었다.


울리지 않을꺼어야~~

나의 여자로 만들꺼어야~~~

내게 은제나 너뿐이야아아아아

웃으며 내애게 돌아와줘어어~~

곤드레..만드레..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지만 무척이나 흥에 겨운 듯했다.
사실 남자는 오늘 무지 기분이 좋은 날이다. 사과 과수원을 20년 가까이 했지만 올해처럼 좋은 가격에 수매를 하기는 처음이다. 남자가 생각해도 올해 사과는 색깔과 당도도 그렇고 크기도 예년보다 월등히 좋았다. 거기다 수확량도 좋아 그야말로 무슨 갑부라도 된 기분이었다.




남자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객지로 떠돌았다. 노동일에 장사, 사업...안한 것 없이 다했지만 고생만 죽도록 하고 돈은 벌기는커녕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몸만 축났다. 그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물려준 땅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사과나무를 심고 난 후 10년 동안 남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처음엔 과실 작농법을 몰라 일년 내내 손이 부르트도록 정성을 쏟았지만 사과는 무처럼 맹탕에다가 크기는 겨우 계란만했다. 그 이유를 알기까지 3년이 걸렸다. 겨우 사과다운 사과를 기르자 이번엔 벌레가 먹어 썩어문드러졌다. 또 어느 해는 제대로 됐다 싶으니 늦태풍에 전부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이고생 저고생해서 제대로 된 사과를 길러 수확을 앞두고 남자는 감격에 눈물을 흘렸는데 그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싸그리 도둑을 맞아 몇날며칠을 피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10년 동안 남자는 평생 동안 울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이 거름이 되었는지 10년이 지나자 겨우 사과다운 사과를 수매할 수 있었다. 겨우 생활이 안정이 되자 남자의 나이는 40을 훌쩍 넘었다. 40이 넘어 겨우 결혼을 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자식도 얻었다. 


남자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했다.

사과는 자신의 인생이라고...

그 인생이 이제야 활짝 만개를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했다.




카스테레오에서는 송대관의 네박자가 막 나오고 있었다. 요즘 남자가 열심히 배우는 노래다. 신이 난 목청으로 막 노래를 따라부르려는 순간 그렇지 않아도 비실비실 대던 와이퍼가 기어코 고장이 난 듯 멈춰버린다.


“뭐여, 저놈이 기어코 사단이 난겨.”


20년이 넘게 다니던 길이라 웬만하면 갈 수 있는데 양동이로 쏟아붓는 듯한 이 빗속에는 아무래도 무리다 싶어 남자는 어떻게든 와이퍼를 작동시켜 볼 요량에 화물차에서 내렸다.


이제는 갑부 아닌가. 갑부는 몸조심을 해야지...


남자는 흠뻑 젖은 몸으로 와이퍼를 억지로 움직여도 보고 두들겨도 보지만 한번 맛이 간 와이퍼는 다시 소생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빌어먹을...당장 이놈의 화물차부터 바꾸든가 해야지.”


그때 남자의 뒤통수에 차가운 금속이 닿는 느낌이었다.


“뭐여...”


몸을 돌린 남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죄수...


푸른색 죄수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자신의 눈앞에 서있었다. 그중 한명, 20대쯤으로 보이는 죄수는 권총을 남자에게 겨누고 있었다.


이게 꿈인가...

내가 영화를 보고 있는건가...


아니다, 생시다.

그렇군, 맞아, 생시가 확실하다.


남자는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티브이에서 빗길에 죄수호송차가 굴러 죄수 8명이 탈출했다는 뉴스를 봤다.


그건 저 산 너머인데...

그럼 이 죄수들이 이 빗속에 저 산을 넘어왔다는 얘긴가.


남자는 도대체 자신한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어이, 아저씨, 뭐야, 왜 그렇게 얼이 빠져있어, 어?”


권총을 겨눈 20대 죄수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아...아니...그...그게 아니고...”


남자는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뭐야, 이거 맛탱이가 간 인간 아냐? 뭐? 뭐? 어? 말을 하라구...말을...”


“그만둬.”


그때 다른 죄수가 나지막이 20대를 막아섰다.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죄수였다.


“집이 어디요?”


“저...저...산모퉁이를 돌아가면...과...과수원이...”


“과수원이 집이야?”


20대가 또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네...네.”


“해칠 생각은 없소.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요기 좀 하고 잠시 쉬어갈 생각이오. 그렇게 해주시오.”


40대 죄수는 무척이나 정중했다. 죄수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남자는 40대 죄수의 말투에 그나마 조금은 안도를 하며 정신을 차렸다.


“어이, 꼰대, 지금 뭐하는 거야. 우리가 지금 부탁할 처지야.”


20대의 말에 40대가 힐끗 쳐다봤다. 40대의 눈빛에 한발 물러선 20대가 공연히 남자에게 성질을 부렸다.


“어이, 아저씨, 뭐해!! 빨리 운전하라구!”


“네...네...”


황급히 운전석을 오르는 남자를 따라서 20대와 40대도 화물차에 올랐다. 화물차에는 고물 오디오가 계속해서 트로트를 토해내고 있었다.


“이거 끕시다.”


“네...네.”


40대는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죄수들 가슴에는 번호표가 붙어있었다.


20대는 484.

40대는 336.


아마도 수인번호인 모양이다.




와이퍼가 고장나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화물차는 엉금엉금 기듯이 겨우 산모퉁이를 돌았다. 산모퉁이를 돌자 저만치 어둠속에 묻힌 과수원이 보였다. 과수원 옆쪽엔 넓은 공터가 있었고 남자가 살고 있는 거택(居宅)이 있었다. 

실평수 20평쯤되는 거택은 남자가 과수원을 시작할 때 손수 지은 집이다. 벌써 20년 가까이 됐으니 거의 쓰러질 듯 낡은 집이지만 남자에게는 어떤 호화주택보다도 소중한 집이었다.


“집에는 누가 있소.”


“아...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아저씨 혼자 산단 말이야?”


“저...저기 집사람과 딸내미가 있는데...지금은 서울 갔습니다.”


“씨발...왜 말을 더듬고 지랄이야. 서울은 왜갔어?”


젠장, 누구는 말을 더듬고 싶어서 더듬는가. 지금 이 판국에 제대로 말이 나올 리가 만무이지 않는가.


“딸내미가 공부하러가서...집사람하고 같이...”


“그러니까 딸이 서울로 유학을 가서 기러기아빠라는 얘기 아냐.”


“그...그렇습니다.”


“알았어. 차 세워.”


484는 자기 아버지뻘인 남자에게 계속 반말 짓거리였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남자는 빨리 이 악몽이 깨기만을 기도했다.




화물차가 거택 마당에 정차하자 마당에 묶어놓은 누렁이가 미친 듯이 짖어댔다.


“저 개새끼가...”


484번이 화물차에서 내리며 금방이라도 누렁이를 쏴죽일 기세로 권총을 빼들자 남자는 기겁을 하며 황급히 누렁이를 진정시켰다. 주인의 손길에 짖는 걸 멈춘 누렁이는 그래도 낯선 이방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계속해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릉 거렸다.


“자...자 들어가십시오.”


남자는 죄수들을 거택 안으로 안내했다.


남자가 거택 불을 켜자 초라하지만 깨끗하게 정리된 집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돈된 모습이 남자의 성격을 말해주는 듯했다.


“시장들 하시죠...금방 밥상 차릴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남자는 어떻게든 이놈들을 빨리 내보낼 생각에 부랴부랴 밥상을 차렸다.

그때 484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남자는 화들짝 놀랐다.

484는 거실에 놓여 있는 가족사진이 담긴 탁상용 액자를 들고 따지듯이 물었다.


“이거 뭐야, 이게 아저씨 마누라하고 딸이야.”


“네네...”


“근데 왜 이렇게 젊어. 딸은 이제 겨우 초딩이잖아.”


“제...제가 늦게 결혼을 해서 나이차가 좀 납니다...”


“몇 살 차인데...”


“15살...”


남자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이 아저씨 완전히 도씨네. 세상에 15살이나 어린 여자하고 결혼을 했단 말이야?”


“말조심해. 아버지뻘이야.”


묵묵히 있던 336번이 484를 나지막이 나무랐다.


“이거 웃기는 짜장이구만. 어이, 꼰대! 빵살이 하면서 나이 따져? 나이가 무슨 벼슬이냐고? 글고...왜 그렇게 시비야. 가만히 보니까 아주 내가 쫄로 보이는 모양인데...여기서 한 따까리 해볼까? 어?”


484는 336에게 금방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로 바짝 대들었다. 

484의 행동에 당황한 건 남자였다. 지금 두 사람이 싸워서 좋을 건 없다. 어떻게든 말썽 없이 밥술이라도 먹여 이 뜻밖의 불청객들을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내보내는 게 남자로서는 최상수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에 남자는 두 사람 사이로 황급히 끼어들어 금방이라도 한바탕 붙을 싸움을 말린다.


“이...이러지들 마쇼...그렇지 않아도 몸이 천근만근일 텐데...자자, 금방 밥상차릴 테니 좀 앉아서 쉬시구랴...”


남자의 만류에 분위기는 일단 진정된 듯했다.




그런데 기어코 사단이 난 건 바둑판 때문이었다.

484가 투덜대며 돌아서 거실 한쪽 벽에 놓여진 바둑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둑판은 남자가 애지중지 아끼는 물건이었다. 아니, 물건이라기보다도 보물이었다.


남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바둑판부터 닦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그래서인지 바둑판은 원목색깔이 고스란히 드러나며 윤이 났다.
484가 그 바둑판에 앉는 걸 보며 남자는 울컥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며

“당장 바둑판에서 일어나!!”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데 남자대신 그 말을 해준 건 336이었다.


“거기서 일어나!”


“뭐?”


336의 말에 484가 힐끗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쳐다본다.


“일어나!”


336의 말이 한 톤 올라갔다.


“이 꼰대새끼가 보자보자하니까...”


484가 벌떡 박차고 일어났다.
484가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336의 발이 먼저 484의 안면을 뭉갠다. 

484가 벽으로 나가떨어지자 336이 무자비하게 484를 발로 짓뭉갰다.

남자는 기겁을 해서 336을 끌어안듯이 떼어놓았다. 484의 얼굴은 피떡이다.


“어디 봅시다. 끌끌...이거 약이라도 바르든가 해야지...”


“저리 비켜!”


484가 애꿎은 남자에게 화풀이를 하듯 밀친다.


“꼰대, 두고 보자.”


“두고 보는 건 나중이고 앉아.”


336의 목소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나지막했다.


“그...그래요, 일단 앉아요. 내 금방 밥상 차려올 테니까...”


남자는 빨리 이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듯 허겁지겁 밥상을 차렸다.


밥상이 차려지자 484는 금방까지 치밀어 올랐던 화는 까마득하게 잊은 듯 게걸스럽게 밥을 입안으로 퍼넣었다.
484와달리 336은 밥먹는 것도 조용했다.

그런 336에게 남자는 묘한 호감을 느꼈다.




밥상을 물리자 484는 앉아서 꾸벅꾸벅 병든 닭처럼 졸더니 급기야 코까지 골아대며 곤잠에 빠졌다.


적막한 거실에는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숨막히는 침묵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조심스런 말투였다.


“저어...이런 말을 물어봐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무슨 일로...”


남자는 차마 ‘죄’란 말을 입에 담기 어려워 ‘일’이란 표현을 썼다.


“그냥 죄라고 그러시지요. 죄를 지었지요. 그래서 이렇게 죄수복을 입고 있는 것이고...”


336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무슨...”


“아내를 죽였습니다.”


남자는 깜짝 놀랐다.




“전 선생이었습니다. 어느날 몸이 아파 일찍 집엘 왔더니 아내가 다른 남자와 그 짓을 하고있었어요. 그런 거야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그 짓하는 아내 앞에 3살 먹은 아들이 울고 있었지요. 우는 아이 앞에서 다른 남자와 그 짓이라니...눈이 뒤집히더군요. 그 남자놈은 벌거벗은 채 도망가고 아내와 티격태격하다 그만...그렇게 됐습니다.”


“그...그렇군요. 그럼 형량은...”


“7년 받았습니다. 이제 2년 남았는데 우연치 않게 이렇게 돼버렸군요.”


“5년 전이면 이제 아들도 꽤 컸을 텐데 누가...”


“외국에 누이가 살고 있지요. 누이가 데려갔어요. 마침 누이도 자식이 없어 잘된 거지요. 아들을 데려갈 때 누이한테 말했습니다. 나는 없는 걸로 치라고...나도 아들은 없는 걸로 생각할 테니...”


336은 자신의 얘기를 마치 남의 얘기하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꼭 남의 인생을 사는 듯했다. 

그런 336 앞에 남자는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번엔 336이 침묵을 깼다. 


“저 바둑판은 어디서 난겁니까, 꽤 좋아보이는데...”


“아...그건 내가 직접 만든 겁니다.”


“직접...?”


336이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경이롭다는 표정이다.


“철없던 시절에 객지생활을 했어요, 10년 넘는 생활에 남은 건 저거 하납니다. 우연히 비자나무를 얻었는데 몇 달 동안 공을 들여 만든 겁니다.”


“비자나무군요...”


336은 마치 소중한 보물을 만지듯 바둑판을 쓰다듬었다.


남자는 336이 바둑을 좋아하는 듯해 물었다.


“바둑을 두십니까?”


“아...네, 전에는 제법 뒀지요.”


336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보였다.


“아...그렇군요. 난 한국기원 공인 5단입니다.”


남자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누구한테든지 이 말을 할 때가 남자는 가장 자랑스러웠다.


“아...그렇습니까?”


바둑얘기가 나오자 두 사람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남자는 이왕 말나온 김에 한수를 청한다.


“괜찮다면 우리 한수할까요?”


“그럴까요.”


336도 두말 않고 응한다.

바둑판 앞에 앉자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남자는 조금전까지 끔찍했던 상황은 모두 잊은 듯이 즐거워했다. 336도 모든 것에 관조하는 자세에서 바뀐 듯했다.


“얘길 들어보니 약한 바둑은 아닌 것 같은데 일단 호선으로 합시다. 일단 한판 두고 치수는 조정하면 되고...”


“그러지요.”


돌을 가리자 남자가 흑이다.


남자는 모처럼 만에 두어보는 바둑에 기쁨이 충만한 듯 심호흡을 한번하고 정성을 다해 첫수를 두었다. 

336은 감읍한 듯 바둑판을 훑어보았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분인가.


336은 돌통에 손을 넣어 천천히 바둑돌의 촉감을 음미했다. 달그락거림과 매끄럽게 손안에서 노는 바둑돌들...그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골라 천천히...아주 천천히 첫점을 놓는다.


...딱...


명징한 울림.

적막한 거실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빈 공간처럼 빗소리와 바둑돌 놓는 착점소리만이 존재했다.




빗소리.

착점소리.


이 두 소리가 어떤 오케스트라보다도 더 훌륭한 음악을 연주해냈다.

그렇게 100수쯤 지났을 때...그 청아한 화음을 깨는 소리가 있었다. 누렁이의 짖는 소리다. 무아지경에 빠진 두 사람은 미처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잠을 자던 484가 잠에서 화들짝 깨어난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제야 두 사람은 고개를 돌린다.

누렁이의 짖는 소리.


“뭐야?”


484가 득달같이 몸을 일으켜 창쪽으로 가 몸을 숨기고 밖을 본다.


경찰차, 경찰차가 과수원쪽으로 오고 있었다.


“짭새야!”


화들짝 놀란 건 남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이 와봐야 상황이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다. 

경찰차가 거택 마당에 정차하고 경찰 두명이 내리자 누렁이는 목이 찢어져라 짖어댔다.


“씨발...저거 뭐야, 짭새가 어떻게 온 거야.”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숨어요1”


남자는 어떻게든 두 사람을 숨길 생각에 등을 떠밀었다.


“이 코딱지만한 집구석에 숨을 데가 어디 있다고 숨어.”


“그저 순찰온 거니 집안에는 안들어올 거요. 그러니 저 방으로...”


“끝났어. 여기까지야...”


두 사람의 실랑이에 끼어든 건 336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뭐야, 뭐가 끝나...”


“자수해.”


“뭐? 지금 이 꼰대가 뭐라고 지랄하는 거야.”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남자는 기겁을 했다. 


“잘 알고 있겠지만 자수하는 거하고 체포되는 건 형량이 달라. 나야 상관없지만 자넨 앞길이 구만리야. 자수하는 게 좋아.”


“아가리 닥쳐!!”


계속 울러대는 초인종 소리와 함께 누렁이는 더 미친 듯이 짖어댔다.


“잘 생각해. 이게 마지막 기회야. 자수해.”


“꼰대, 주둥아리 놀리지 마!!”


“포기해”

336의 목소리는 한 톤 올라갔다.


“좃까는 소리하지 말란 말이야!!”

484는 절규했다.

                     

...쾅... 


마치 절정을 향해 치닫는 듯한 바이올린 연주는 한 발의 권총소리에 줄이 끊어졌다. 순간 누렁이 짖는 소리와 초인종 소리가 멈췄다. 심지어는 빗소리마저 멈춘 듯했다.


혼비백산해서 얼이 빠진 경찰들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뭐...뭐야?”


“총소리잖아.”


경찰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거실유리창을 보고 경악을 했다. 거실 유리창은 박살이 나있었고 안에는 두 명의 죄수가 있었다. 한명은 권총으로 과수원 주인을 인질로 잡고 있었고 옆에는 다른 죄수가 서있었다.


“저...저건 탈주범...”


“그...그러게...”


본서에서 외곽지역을 순찰하라고 해서 건성으로 왔던 경찰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넋을 잃었다.


“짭새들!! 조금이라도 허튼짓하면 이 아저씨 머리에 바람구멍이 날 거야. 알았어?”


“알...알았다!!”


경찰들은 경찰차 뒤로 몸을 숨기며 행여 인질범 성질을 건드릴까봐 악을 썼다.


“짭새들!! 경찰차에서 멀리 떨어져!!”


484는 남자를 인질로 잡고 화물차로 도망을 갈 생각이다.




경찰들이 경찰차에서 물러서는 걸 확인한 484는 남자를 인질로 잡은 채 게걸음으로 움직였다.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길 생각이다.


남자는 아예 눈을 감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집사람과 딸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때 권총을 들은 484의 손을 336이 번개같이 잡아 비틀었다.
권총이 허공을 향해 발사됐다.


336은 484를 안은 채 바닥으로 뒹굴었다.

484의 손에서 권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두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됐다.

336이 484위로 올라타며 손으로 멱살을 누른다.

484는 캑캑 대면서 손을 허우적대며 전가의 보도처럼 믿었던 권총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때 336이 바닥에 떨어져있는 뭔가를 집는다.


바둑알통이다.


그것으로 484의 안면을 내려친다.

비자나무로 만들어진 바둑알통은 묵직하면서도 단단했다.

484의 안면을 아무리 내려쳐도 끄떡없었다.

단지 피투성이가 됐을 뿐이다.


남자가 336을 말리자 그제야 336은 제정신이 돌아왔다.

484는 이미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면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채...




판사는 336에게 7년을 선고했다.

탈주는 우발적 범행. 484에 대한 살인은 인명구호를 위한 정당방위로 인정돼 비교적 관대한 선고를 받는다. 탈주 전 잔형 2년까지 합하면 9년 형기다.


하지만 336에게는 9년이든 90년이든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살 의욕도 없다.


336은 죽을 때까지 선생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남자에게는 전부였다. 그런데 한 사람을 죽이고 그것도 부족해 또 한 사람을 죽였다. 살인자가 누굴 가르치겠는가. 가르치는 건 고사하고 숨쉬는 것조차 부끄러운 336이다.


336의 가슴은 점점 황폐해져갔다. 식음도 전폐했다. 336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교도소는 정신병원에서 치료까지 받게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336은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3개월...

336에게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봉투를 뜯어보니 글자 하나 써져있지 않은 종이가 한장 들어 있었다.


아...


종이를 보고 남자는 길게 신음했다.

그것은 기보였다.

과수원 남자와 두었던 바둑이다.

그때 끝내지 못한 바둑...


과수원 남자가 둘 차례였다.

기보에 과수원 남자가 자신의 수를 표시하고 보냈다.


336은 몇날며칠을 기보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수를 표시해 보냈다. 

한달 후 과수원 남자에게 다시 답장을 받는다.

그렇게 한달에 한수씩 주고받는다.


1년이면 12수.

9년이면 108수.


여기서 나갈 때쯤이면 바둑이 끝날 것이다

336은 희망이 생겼다. 살아갈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서신대국은 계속되었다.




7년이 지날 때쯤 어느 달...

기보가 오지 않았다.

336은 기다렸다. 애타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나 다음달에도 또 그 다음달에도 기보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서신대국은 끝이 났다.




2년 후 어느 여름.

안개가 자욱한 새벽...


336은 만기 출소를 한다.

같이 출소한 출소자들은 마중나온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얼싸안고 두부를 먹고 야단법석인데 336은 혼자였다. 어차피 마중나올 사람도 없지만 그런 걸 좋아할 336도 아니었다. 


그저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갈곳이 있다.

과수원에 가볼 생각이다.


그분을 만날 생각에 336은 마음이 들떠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336을 부른다.


“선생님...”


336이 돌아보니 20살쯤 돼 보이는 여자가 단아하게 서있다.


“저를 부르신 건가요?”


“네...유상천 선생님이시지요?”


“선생은 아니지만 유상천인 건 맞소만...”


가만,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여자를 다시한번 유심히 본 336은 깜짝 놀랐다.

조민영 국수.


여자로서 최초로 3년 연속 국수에 올랐고 작년에는 응씨배와 도요타덴소배, 삼성화재와 LG배 등 그랜드슬램을 달성해 세계 바둑계를 발칵 뒤집어놨던 기사다.


“이거...조민영 국수 아니신지...”


“맞습니다.” 


“허어...이런 광영이 있나...조국수님을 직접 뵙게 되다니...가만...그렇데 어떻게 저를...”


“조택수 씨를 아시지요?”


조택수, 어찌 그 이름을 잊을손가.

과수원 주인 아닌가.


“물론 알지요, 압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 아버님이십니다.”


336은 깜짝 놀랐다.


“그...그런가요...”


“9년전...그때 과수원 사건 때 전 서울에서 연구생 생활을 했습니다. 나중에 선생님에 대한 얘기를 들었지요.”


“아아...”


336은 부끄러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의 말에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아버님은...돌아가셨습니다.” 


336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말이 목에 걸렸다. 


“2년전이었지요. 담도암으로...”


336은 아무 말을 못했다.

여자도 잠시 조용히 서있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이 조용했다.




336의 마음이 추슬러질 때쯤 여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 유언을 남기셨어요. 선생님과 끝내지 못한 바둑이 있는데...저보고 대신 끝내달라고요. 아버님처럼 서신으로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출소 때까지 기다렸답니다.”


336의 가슴 저 밑바닥에 알 수 없는 뭔가가 올라왔다.


슬픔...


아픔...


기쁨...


회한...


그 무엇도 아니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


남자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것을 꿀꺽 삼켰다.


“괜찮으시다면 가시지요. 제가 자리를 마련했답니다.”


336은 여자의 차에 올라탔다.

여자의 차는 속리산 밑에 자리 잡은 보성선씨 종갓집에 도착했다. 99칸인 종갓집은 지금 택주(宅主)의 증조께서 직접 지은 고옥이다.


여자와 336이 도착하자 종부가 예의바르게 맞이 한다. 미리 약속이 된 듯 정갈스럽고 정성이 가득한 상을 들인다.


336은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했다. 무슨 맛인지 혀가 느끼질 못했다.




상을 무르고 두 사람은 대청마루에 바둑판을 가운데 두고 앉았다. 그분이 만든 비자나무 바둑판이다. 여자가 두 사람의 바둑을 복기하여 놓는다. 두 사람이 목례를 하고 여자는 한점을 놓았다.


"아버님은 기보에 이 자리를 표시했습니다. 결국 기보를 보내시지는 못했습니다만..."


당연한 자리다. 들여다본 자리를 이었다.

336이 둘 차례이다.


336은 그윽하게 바둑판을 보았다. 그리고 앞에 앉은 상대를 본다. 앞에는 과수원 주인이 앉아있었다.



“나 무시하면 안돼요. 이래봬도 한국기원 공인 5단입니다. 자...두세요.”


“하하...무시하긴 누가 무시합니까. 알지요, 알고말고요...그럼 두겠습니다.”



336은 돌통에서 돌을 하나 집었다. 2년 동안 장고한 수인만큼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


...따악...


착점 소리가 명징하게 대청마루에 울려퍼졌다.

뜨락에 매미소리가 길게 목을 빼 그것에 화답을 한다.


...매애애애애애애...



<끝>



2008-10-14 본 내용은 작가의 순수 창작물이므로 무단복제나 도용, 표절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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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ey |  2009-04-30 오후 4:33:5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꾸울꺽..... 잘 읽었습니다. 끝이....슬프면서도 뭔가 화사한 느낌까지 납니다.  
태봉 |  2009-04-30 오후 10:49:34  [동감1]  이 의견에 한마디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당근돼지 |  2009-05-01 오전 7:04:5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잘 보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어쩌라구♂ |  2009-05-01 오후 1:24:3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박쥐님...살면서 좋아하는 세종류의 인간이 있다면....하나는 글을 쓰는사람..또 다른 하나는 음악가...나머지..하나는 남겨두조...잘 보았습니다...꾸벅...  
초록녹차 |  2009-05-01 오후 7:14:33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박쥐선생의 글을 다시 만나니 청량하군요.  
달선공팔 |  2009-05-02 오후 10:27:12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이 소설은 내용을 차분하게 이끌어간 것으로 기억속에...*^^*  
못안 |  2009-05-05 오전 11:50:1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잘보아습니다.
 
솔이농산 |  2009-05-22 오후 6:36:0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또 읽었다`~~  
맨그감자 |  2009-06-28 오후 7:07:42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아~~그러니깐 이글을 어데서 읽었지?
오레전에 읽긴읽었는뎅 동호회싸이튼강 어덴강 몰르겠는데
이글이 박쥐님 글인진 몰랐어요 또읽어서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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