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제스티 호텔.
스위트룸.
하루 숙박비가 무려 230만원이다, 물론 부가세는 별도다. 서민의 눈으로 보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가격이다. 도대체 어떤 놈이 그런데서 자나 싶지만 실상 뜯어보면 가격이 그럴 만도하다
룸2개와 스툴바와 월풀을 갖춘 리빙룸의 크기는 웬만한 아파트 40평 형 규모였다. 거기다가 2인기준 풀코스 디너제공, 저녁에 무드 잡으라고 와인과 치즈 등 간단한 안주 무한 제공, 아침에 프렌치식 브런치 제공, 또한 사우나와 바버숍 무료이용에 공항까지 리무진으로 배웅과 전송 등 상당한 혜택이 있다.
남자는 이곳을 예약하면서 이런 부가서비스는 전혀 필요가 없었다. 단지 리빙룸에서 바라보는 전경이었다. 전동식 커튼을 열면 리빙룸 밖으로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야경은 더욱 아름다웠다.
더군다나 창 바로 앞에는 바닥을 30센티 정도 돋은 바닥에 보통 월풀의 6배 정도 크기의 타원형 욕조가 있는데 스파를 즐기며 한강의 야경을 바라보는 건 아름다움을 넘어서 황홀하기까지 했다.
남자는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기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옷을 전부 벗은 남자는 주민등록증을 봤다.
오대호.
1960년생.
주소는 압구정동이었다.
“겨우 48년인가...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한 100년은 산 듯싶은데 실상 얼마 안된다.
남자는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약봉지와 커터칼과 와인 한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인생 마감을 도와줄 도구들이다.
약봉지에서 알약을 털어내자 손바닥에 수북했다.
수면제였다.
그것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입안이 가득한 게 다 먹으면 잠들기 전에 배가 불러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핏빛 와인의 도움으로 알약을 우걱우걱 식도로 넘긴다. 그리고 커터칼을 들었다. 일제 도루코다. 날이 아주 예리한 것이 고통을 덜어줄 것이다.
남자는 욕조 안에 몸을 담궜다.
물은 적당히 따뜻했다. 기분이 좋아진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야경이 그야말로 화려했다.
한때 저 도시는 남자의 것인 듯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남자 앞에 무릎을 꿇었고 수많은 여자들이 남자의 품안에 안겼다.
하지만 이젠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바둑은 끝났다.
남자는 커터칼을 잡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허벅지에 커터칼을 댔다.
“잠깐이야, 그래, 곧 끝나, 길어야 몇 분이겠지...”
남자는 거침없이 커터칼로 허벅지를 그었다.
허벅지의 살이 쩍 갈리지며 피가 뿜어나왔다.
단 몇 초도 되지 않아 욕조 안은 온통 빨갛게 물이 들었다.
남자는 고개를 젖혀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댔다.
고통은 없었다.
정신이 몽롱하다.
남자의 머릿속에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역순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마치 비디오테이프를 거꾸로 돌리듯이...
남자는 30분전에 스위트룸으로 들어왔다. 어제까지만해도 남자는 도망중이었다.
부채가 100억이 넘었다.
아내한테 연락이 끊긴 건 한달 전이다.
위장이혼이라는 것이 진짜 남남이 돼버렸다.
위장이혼을 종용한 건 남자였다. 살고 있는 아파트라도 건지려면 위장이혼을 해야 한다면서 이혼장에 도장을 찍기를 아내한테 강요했다. 아내는 이혼장에 눈물을 떨구면서 도장을 찍었다. 그것이 4개월 전이다.
6개월 전...대형아파트 70세대가 전부 미분양됐다. 은행과 사채업자들이 빚을 갚으라고 독촉한다.
8개월 전...악운의 시작은 여기부터다.
명일동 260세대 아파트 입주자들이 아파트 하자와 그에 따른 위자료 소송에서 이기면서 남자에게 세대당 5500만원을 지급하라는 법원 명령이 떨어졌다. 150억에 가까운 돈이다.
그동안 돈을 갖다 쓰라면서 돈다발을 싸들고 오던 은행과 사채업자들이 일제히 대출을 거부한다.
1년 전 천호동에 180세대 아파트가 100프로 분양됐다. 이 불황에 상상을 초월하는 대박으로 신문에까지 오르내릴 정도였다.
중소건설업체 대명 불패신화! 천호동에서도 계속되다!!
5년 전 대명이란 이름으로 최초로 아파트를 분양했다. 응암동 자투리땅에 지은 90세대 소규모단지였다. 처음 아파트 건설이라 몇날 며칠을 잠을 안자고 걱정했던 남자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보자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계약률 100프로! 시작부터 대명은 아파트업계에 신화로 불려진다.
남자는 빌라와 상가를 전문적으로 지었다. 남자가 건설한 건물은 그야말로 날개돋힌 듯 팔렸다. 5년 동안 남자는 전국곳곳에 수십 개의 빌라와 상가로 100억이 넘는 돈을 벌었다.
이제 이 구멍가게 같은 짓도 그만둬야겠다, 아파트를 지어야해, 남자는 아파트로 뛰어들기로 한다.
10년 전 IMF때 모든 업체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남자는 고시원이란 걸 만든다. 그게 대박이 된다. 고시원은 많게는 1억까지 프리미엄이 붙어 팔려나갔다.
그걸 바탕으로 원룸 건설에 뛰어든다. IMF이후 독신세대가 늘어난다는 것을 예측한 사업이다. 그 예측은 정확히 적중했다. 원룸은 건물이 절반도 올라가기 전에 전부 계약이 끝났다.
남자의 의식이 가물가물해온다.
난생 처음 보는 빛이 남자를 감쌌다. 기분이 좋다.
마약을 먹으면 이런 기분인가...하늘에 붕 뜬 기분이다.
남자의 기억은 점점 더 과거로 흘러가고 있었다.
순간!
남자의 뇌리를 스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남자는 감기는 눈을 부릅떴다.
피를 뿜어내는 허벅지의 갈라진 상처를 손으로 틀어막고 필사적으로 욕조에서 기어나왔다.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어 위 속에 있는 것을 전부 토해냈다.
정신이 점점 몽롱하다. 눈앞이 뿌옇게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남자는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기어갔다.
이쯤에 테이블이 있을 텐데...
손을 휘적거려보니 테이블보가 손에 잡힌다. 테이블보를 끌어내려 허벅지의 갈라진 상처를 동여맨다.
바닥에서...뚜뚜뚜...전화기 수신 두절음이 들려온다. 테이블보를 끌어내릴 때 떨어진 전화기인 모양이다. 남자는 더듬거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집고 간신히 전화통을 찿았다.
버튼을 눌러야지...버튼...
이미 시야는 잃었다. 손의 감각으로 간신히 버튼을 누른다.
없는 번호이다. 다시 시도를 한다.
상냥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114다.
남자는 다시 버튼을 누른다. 손가락의 감각이 점점 무뎌진다.
“119구급대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는 죽어가고...있습니다...살려주세요...이곳은...”
거기까지였다. 남자의 의식이 남아있는 마지막은...
“오대호씨!”
멀리서 아련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승사자인가...그런데 하얀옷을 입고 있다.
하얀옷을 입은 저승사자...
“오대호씨, 정신이 드십니까, 정신이 있으면 눈을 깜빡여 보세요.”
의사다.
살았구나, 내가 살아있구나, 죽지않았구나.
남자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깜빡였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한 겁니까. 결국 죽지도 못할 거면서...몸 버리고 여러 사람 고생시키는 거 아닙니까, 에이...”
너는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 심정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냐.
그 싸가지 없는 의사한테 한마디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대호는 일주일 만에 퇴원을 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한 사람도 오지 않았고 퇴원할 때도 혼자 수속을 밟았다. 의료공단에서 병원비를 대납했다. 공짜는 아니다. 나중에 벌어서 갚아야한다. 지금까지 내가 낸 세금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공짜로 해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얄짤없다. 또 100만원이 넘는 빚이 생긴 셈이다. 그까짓 100만원...100억이 넘는 채무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돈은 백만, 억, 백억하는데 실상 주머니에는 단돈 만원도 없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300원이 있다.
대호는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공중전화 입속에 집어넣고 전화를 했다.
“야.,,대호 이 새꺄, 너 어떻게 된 거야.”
회사 앞 분수대에 앉아 있는 대호를 보고 창수는 대뜸 일갈한다.
“얌마, 그렇게 앉아만 있지 말고 뭐라고 말을 해봐.”
“일어날 힘이 없어, 밥부터 먹자.”
대호는 설렁탕을 허겁지겁 입속에 집어넣었다. 창수는 황당했다. 저놈이 내 친구 오대호란 말인가...지금까지 저렇게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인간을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창수다.
창수는 대호의 친구다. 흔히 말하는 불알친구다.
창수도 대호한테 5천만원이란 돈을 빌려주고 마누라한테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는 처지다. 그래도 지금까지 대호한테 돈 얘기는 한번도 하지 않았다.
...꺼억...
순식간에 설렁탕 두 그릇을 비운 대호가 시원하게 트림을 한다.
“더 먹을래?”
“이따 다른 거 사줘. 설렁탕은 두 그릇이면 충분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얘길 들어보니 일주일 전에 친구들한테 얼마씩 빌려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마제스티 호텔 스위트룸을 얻었지, 하룻밤 말야.”
“뭐야! 그건 왜?”
“죽기에는 좋은 장소잖아.”
대호는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했다.
창수는 대호가 농담이라도 하는 듯싶었다.
“그런데...”
“지금 병원에서 퇴원하는 길이야. 공연히 허벅지에 상처만 생겼어. 이젠 수영장도 못갈 것 같다.”
“이...이 미친새끼...!”
창수는 와락 대호의 멱살을 잡았다.
“이 새꺄!! 너 그렇게 썩은 놈이야!! 그렇게 대가리까지 썩어버렸냐고...”
“넌 내 목숨하고 바꿔도 아깝지 않은 친구야, 하지만 말이야,..그렇다고 해도 니가 내 마음을 전부 헤아리지는 못해. 내가 오죽하면 죽을 생각을 했는지...”
“이...이...병신새끼...”
창수는 눈에 눈물이 괴었다.
“아줌마, 여기 소주 한병 줘요!!”
창수는 소주를 시켰다. 오늘 회사는 안 들어갈 생각이다.
창수는 소주를 글라스에 따라 물마시듯 입속에 부었다.
“나도 한잔 줘.”
“마셔도 괜찮아? 지금 병원에서 퇴원했다면서...”
대호가 피식 웃는다.
“지옥 문턱까지 갔다온 놈이야, 뭔 상관이야.”
글라스에 가득 따라진 소주를 대호는 숨도 안 쉬고 마셨다.
“카아...좋군.”
대호는 와자작 깍두기를 씹었다.
“그래, 얘기좀 들어보자. 니가 자살을 결심한 심정은 내가 이해한다고 하자.
그럼 죽음 문턱에서 다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땐 뭔가 의지가 있을 거
아니냐. 그게 뭐냐. 어쩔 작정이야?”
“그래, 죽음 문턱에 서 있었지. 이게 죽는 거구나...여기가 생과사의 경계점이구나...이렇게 난 죽을 운명이구나...근데 말야, 이게 운명이라면...왜 나는 이런 운명에 처하게 됐을까...이런 생각이 들더라는 거지. 사람은 과연 이렇게 정해진 운명에 순응해야 하는 것일까...이런 의문...”
“그래서?”
“내가 죽을 생각을 하게 된 원인이 뭐지? 바로 건설업을 했기 때문이잖아. 그럼 내가 건설업을 하지 않았다면...?”
창수는 대호의 말에 점점 흥미가 생겼다.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래, 원래 넌 법대를 지망했지. 그러다 두 번 재수하고 건축으로 돌아섰지.”
“그렇지. 난 원래 검사가 꿈이었어. 근데 그게 안 된거야. 만약 내가 계속 법대를 지원했다면...? 붙을 수도 떨어질 수도 있었겠지. 붙었다면...? 혹은 떨어졌다면...? 지금 내가 어떻게 돼 있을지는 이 세상 누구도 모르는 거야. 붙어서 검사가 됐는데 법원에 가다가 느닷없이 교통사고로 죽었을지도 모르고...떨어져서 노가다나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 이 모든 경우는 수만, 수십만, 수백만...아니 수억 가지야. 난 지금 이 수억 가지 경우 중 하나에 처해진 거지.”
창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과연 이 수억 가지 중에 선택한 이 경우가 과연 바꿔질 수는 없는 건가라는 의문이 생긴다는 거야.”
이 부분에서 창수는 동의가 안 된다.
“말도 안돼. 이미 경우가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바꿔.”
“사람의 운명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끼리의 만남에서 결정되지. 내가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뀐다는 거야. 태어날 때 어떤 부모한테 태어나느냐, 자라면서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 어떤 상사를 만나느냐...심지어는 슬쩍 지나가는 사람도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인연일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런데 내 인생 자체를 송두리째 바꿔버린 그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이 다시 또 내 운명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아리송한 말이다. 이 새끼는 차라리 사이비교주가 됐으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전부터 해오던 창수였다.
“그래, 니가 거기까지 생각을 했다면 니 인생을 바꿀 사람이 있다는 건데...그게 누구야? 설마 난 아닐 테고...”
“문제는 내가 건축을 시작한 거야. 근데 내가 법대에서 건축으로 바꾸게 한 사람이 누구지?”
창수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낙원기원...낙원동에 있는 기원이다.
당시 대호가 종로의 재수학원을 다닐 때 가끔 가던 곳이라고 했다. 창수는 그 당시 대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가끔 같이 몇번 간 적이 있었다.
“낙원기원 원장!”
“그래, 낙원기원 원장, 그 분이 내 인생을 바꿨지. 나한테 법대를 포기하고 건축과로 가보라고 권유한 사람이야. 난 그 분 말을 듣고 그 해 건축과를 지원했고 과 수석으로 입학했어. 그때 난 그분이 내 인생의 은인이라고 생각했어. 한번 찿아가 봐야한다면서 학교다닐 땐 공부하느라 바빠서 못가고 졸업해서는 일하느라 바빠서 못가고 결국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할려구?”
“글쎄 모르겠어. 일단은 찿아가 봐야지.”
“나도 같이 가자.”
“회사 안 들어가 봐도 되겠어?”
“임마, 지금 회사가 중요하냐. 친구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데...”
“내 인생에 가장 큰 행운은 아마 너를 만난 것 같다.”
“새끼,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 죽는다는 놈이 전화 한통 안하는 게 무슨....”
대호는 조용히 웃었다.
“근데 기원이 아직도 있을까? 벌써 30년 전인데...그리고 그 원장님이 계속 기원을 한다는 보장도 없고...”
“글쎄...그것도 내 운명이겠지.”
낙원동에 도착했을 때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기원은 이상한 위치에 있었다.
낙원동 옆골목으로 들어가면 허름한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 3층에 있는 기원은 이상하게 쉽게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당시 가끔 기원을 가던 대호도 바로 눈앞에 두고도 기원을 못 찾아 이리저리 헤매기 일쑤였다.
“원래 그 기원이 잘 안보여. 이 근처인데...”
벌써 10분이나 대호와 창수는 그곳을 헤매고 있었다.
“저기!”
창수가 소리쳤다.
바로 그들 머리 위에 있었다.
유리창에 희미하게 써 있는 낙원기원이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기원에 불이 켜져 있었다.
창수와 대호가 기원에 들어서자 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갑게 맞이한다.
“어서 오세요.”
대호는 노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때? 그 분 맞아? 난 잘 모르겠는데...”
창수가 나지막이 대호에게 물었다.
그대로였다...
머리가 좀 하얗게 샌 것을 빼고는 그때 그 원장님이었다.
“두 분이 오신건가?”
“저...저 원장님, 저 모르시겠습니까?”
대호가 노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신지...”
“한 30년 전쯤일 겁니다. 오대호라고 법대를 지망했던 재수생입니다. 가끔 여기 와서 바둑을 두곤 했었지요...그때 기력으로 4급쯤 됐습니다만...”
“글쎄요...30년 전 일을 어떻게 기억하겠어요...허허...”
“그때 원장님께서 저에게 법대를 포기하고 건축 쪽으로 지원하라고 하셨지요.”
“허허...그랬던가요. 암튼 일단 앉으세요.”
창수와 대호가 자리를 잡자 노인이 커피를 가지러간다.
뜻밖의 난관에 봉착했다. 세월은 생각하지 못하고 원장이 자신을 기억할 거라고만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 원장은 머리가 하얗게 샌 것을 빼고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미 3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커피 한잔씩들 하세요.”
노인이 창수와 대호 앞에 종이잔을 놓으며 말을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가요?”
“사실은...”
“여러 소리 말고 일단 한판 두자.”
창수가 뭔가를 말하려는 걸 대호가 말을 끊으며 바둑돌을 집어들었다.
“허허...그러세요.”
노인은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괜한 얘기해봐야 소용없어. 일단 바둑이나 두자. 두다보면 원장이 기억해낼지도 모르지.”
“그래, 그러고 보니 너하고 바둑을 둬본 지도 오래됐네.”
둘은 그야말로 용호상박, 난형난제였다.
같이 바둑을 둬본 지는 이미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됐다.
돌을 가리자 대호의 백이다.
창수는 철저한 실리바둑이었고 대호는 두터운 세력으로 중반 이후 전투로 승부를 내는 힘바둑이었다.
역시 창수는 양소목이고 대호는 소목과 화점이다. 아무리 오래돼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바둑이다.
창수는 소목을 중심으로 변쪽에 착실하게 집을 지어간다. 대호는 변을 내어주고 중앙에 두터운 벽을 쌓는다. 창수가 그걸 그냥 볼 리가 만무다. 슬금슬금 세력을 무력화 하려는 듯 기어나온다. 대호가 한칸을 뛰자 창수가 날일자로 씌운다.
“끊겠구만...”
바둑에 몰두하던 대호가 그 말에 문득 돌아보자 노인이 두 사람의 바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렇다. 대호는 당연히 끊을 생각이다.
날일자는 건너붙여라. 축이 안되니 일단 건너붙여 끊고 본다. 이제 중원의 넓은 평원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질 상황이다. 중앙에 끊긴 흑돌 한점이 열점으로 불어났다. 단곤마는 죽지 않는다. 살기만하면 창수가 이기는 바둑이다.
그때 대호는 손을 빼서 우변 3선에 두칸 벌려진 흑돌의 옆구리에 갔다붙인다. 창수가 움찔한다. 성동격서인가?
받아주면 탈출로가 봉쇄된다. 손을 빼고 기역자 행마로 중앙돌에 탄력을 준다. 이제 한수만 가일수하면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돌이다. 대호는 그쪽을 무시하고 우변에 붙인 흑돌 위로 날일자를 둔다. 옆구리에 붙이고 모자를 씌운 모양이다.
희한한 행마다. 붙였으면 젖히든가 늘든가 해야지 날일자는 또 뭔가. 창수가 이게 웬 떡인가 싶어 밑으로 젖힌다.
대호가 끊는다. 이건 또 무슨 속셈인가.
끊은 돌을 잡으면 백이 되단수를 쳐 두칸 벌려진 흑돌이 양분된다. 둘 다 위험하다.
그렇다고 끊겨진 2선의 돌을 늘면 백이 끊겨진 3선의 돌을 단수를 쳐 좀전에 묘하게 날일자로 모자를 씌운 돌로 인해 축이 된다.
부득불 흑은 3선에 끊은 백돌을 단수친다. 축으로 잡을 생각이다. 그러자 백이 기다렸다는 듯 중앙에 기역자 행마한 흑돌을 들여다본다.
교묘하게 축머리다.
창수는 할 수 없이 단수를 친 3선의 돌을 잡아낸다. 백은 중앙의 흑 기역자를 뚫어버린다. 순직간에 중앙돌이 허약해진다.
“끝났어.”
노인이 중얼거린다.
노인 말처럼 바둑은 거기서 끝났다.
그 후 60여 수 진행됐지만 중앙의 공룡처럼 거대해진 흑돌이 전부 잡힌다.
창수와 대호가 돌을 주섬주섬 거두자 노인이 한마디한다.
“그래, 기억나는군...내가 가끔 라면도 끓여줬었지.”
“예, 맞습니다. 원장님...기억나십니까?”
노인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대학교 합격했다고 오고 처음이지...아마...”
“죄송합니다. 그간 사는 게 바빠서...”
“허허...인생이 그렇지.,.그래, 내말대로 건축 쪽으로 전공을 바꿔서 어떤가?”
“살만했습니다. 백번 잘했다고 생각했지요...”
대호는 그간의 일을 쭉 얘기했다.
“끌끌...그랬구만...”
“원장님, 전 철저한 운명론자입니다. 사람은 주어진 운명대로 살다가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운명이란 건 어느 순간 바뀔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제가 법대에서 건축으로 돌아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가?”
“전 그렇다고 믿습니다.”
“좋아, 그렇다고 치세. 그럼 날 찾아온 용건이 뭔가?”
“제 운명을 바꿀 생각입니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지?”
“원장님은 제 운명을 바꾸신 분입니다. 그럼 결자해지 차원에서 원장님은 다시 제 운명을 바꾸실 수 있다고 봅니다.”
“허허허...괘변이군, 괘변이야. 그래, 내가 어떻게 해야 자네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무 말씀이라도 해주십시오. 전 그대로 할 생각입니다. 죽으라면 전 이 자리에서 아낌없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주어진 운명이니까요.”
“거참...이런 황당한 얘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할 수 있다니...”
“원장님...”
대호는 원장을 재촉하듯이 불렀다. 원장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럼 말일세. 이렇게 해보세. 자네 말처럼 운명은 인간과의 인연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지금까지 자네가 살아온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 있을 걸세. 자네 운명을 바꾸기에 충분한 그런 사람 말이야. 그런 사람 3명을 만나보게. 그럼 거기서 뭔가 답이 나올지 모르겠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세 사람...”
“그렇다고 자네 운명이 지금보다 더 좋아질 거라는 확신은 없네만...어쨌든 지금보다 나빠진다고 또 날 찾아오지는 말게. 내가 괜히 남의 인생에 끼어든 것 같으니 말일세...”
자살까지 시도한 몸이니 더 나빠질 것도 없다.
“물론입니다. 원장님.”
대호는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하고 창수와 함께 기원을 나섰다.
원장은 창밖으로 대호를 내려다보았다.
“허허...이제 여기를 떠나야 할 때가 된 듯싶군. 자신의 운명의 변이(變異)를 알고 찾아오는 친구가 있으니 말이야.”
원장은 기원의 불을 껐다.
기원은 어둠에 묻혔다.
=> (2편 보기)
2008-09-18 본 내용은 작가의 순수 창작물이므로 무단복제나 도용, 표절을 금합니다.
.gif){kind=logo}
자객행
달선공팔
춤추는고래
